579화 여명이 뜨기 전 눈송이와 순두부 (2)
황의는 장 공주 밑에 있는 책사로 지금까지 범한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고, 뛰어난 점을 드러내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움직인 김에 잠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제거하고 싶었으므로, 황의도 죽일 계획이었다.
범한은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자신이 잠시 우유부단했던 것 때문에 사람이 인질로 잡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
“해독 고수가 한 게 아닙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3처 사형, 사제들의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이성 독 종사와 우리는 사용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아무래도 장 공주가 과거 감찰원에 침투했을 때 주격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해독 환약도 상당히 많이 챙긴 모양이군요.”
언빙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주 별채에 잠복해 있는 밀정의 신분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 철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들을 불필요한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살 수 있다면 사는 게 가장 좋지요.”
말을 이렇게 했지만 범한은 이것이 오늘 밤 두 번째 실패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빙운이 범한의 안색을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백을 받아내려 했던 증인이 죽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언빙운이 말하는 증인은 진씨 집안 사병으로 산골짜기 습격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실마리나 증거가 없는 산골짜기 습격 사건을 풀 유일한 희망이 바로 그 증인이었다. 더구나 7처와 3처의 공동으로 지키고 있는 감찰원 감옥 안에서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범한은 노발대발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용솟음치는 기괴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언빙운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방금 늙은 홍 태감이 왔었습니다.”
그가 언빙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빙운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다가 조용히 설명했다.
“제 생각에 아마도 주인께서는 오늘 밤에 대인이 한 일이 선을 넘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인께서는 그가 죽는 것이나 대인이 죽은 것 모두 보고 싶지 않으신 겁니다.”
“주인이라 말하지 마십시오. 절름발이 노인의 얄팍한 입술이 떠올라 싫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언빙운이 웃으며 반문했다.
“비록 폐하께서 고개를 끄덕인 일이라 하지만 어젯밤에 대인이 하신 일은 너무 지나쳤습니다. 분명 오늘 오전에 열릴 대조회에서 대신들이 대인을 공격할 겁니다. 만일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까지 대인을 공격하는 데 가담한다면, 주인······ 아니 폐하께서도 대신들의 압력에 못 이겨 태도를 바꾸실 겁니다.”
“두려울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범한이 작은 언 공자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는 이전부터 감찰원의 권력을 줄이고 싶어 했으니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어젯밤에 급히 공격을 감행했던 겁니다······. 권력이 줄여지기 전에 적들을 제거해야 하니까요.”
그가 도자기 숟가락을 그릇에 던지자 ‘쨍그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만 오늘 밤에 정말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했으니 손해가 막심하군요.”
언빙운은 아쉬워하는 범한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지적했다.
“몇 시간 뒤면 대조회가 열립니다. 오늘 조회에 나가 업무를 보고하고 폐하의 질책을 들을 준비를 하십시오.”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말했다.
“요 며칠 동안 폐하께서 젊은 관리들을 황궁에 부르시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로들이 순순히 자리를 내어주겠습니까? 감찰원이야 마구잡이로 관리들을 체포하고 조사한 거로 처벌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깨끗하지 못한 놈들을 몇 명 물러나게 한다면······ 조정에 빈자리가 생길 테니 폐하께서 마음에 드는 인물을 채워 넣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폐하께서도 저희가 폐하를 위해 한 노고를 생각해서 최소한의 은혜는 베풀어 주시겠지요.”
언빙운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아직도 범한이 황제 폐하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도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말했다.
“어젯밤 일은 거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지만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군요. 제가 계속 기다렸던 그 사람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언빙운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약간은 망설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직도 성에 차지 않으신 겁니까? 오늘 옆에 아무도 두지 않고 혼자 계시는 건 위험합니다.”
범한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감찰원 검수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저렇게 사람을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데리고 다니든 안 데리고 다니든 별반 차이가 없거든요.”
“그리고 데리고 다닌다면 그쪽 사람들이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겠습니까? 모두들 몰래 살인을 저지르는 겁쟁이들입니다.”
범한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제가 여기 가게에 반 시진 정도 혼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강철 군대라는 것도 뜬소문인가 봅니다.”
언빙운은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어둡고 좁은 골목을 바라보고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얼른 드십시오.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범씨 두부 가게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작은 골목길 안에서 잠행복을 입은 일곱 명의 사람들이 마차에 시체를 옮기고 있었다. 마차에서 흐른 피가 눈 위에 떨어지면서 옅은 비린내를 풍겼다.
세 구의 시신은 모두 십여 개로 조각이 났는데 분명 장도로 생긴 상처였다. 7명의 우두머리가 마부석에 앉아 멀리 두부 가게에서 나오는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말고삐로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긁으며 히죽 웃었다.
“도련님, 천천히 드십시오.”
* * *
동틀 무렵 집으로 돌아온 범한은 옷을 갈아입고 몇 마디 지시를 내린 뒤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황궁 문 앞은 이미 시끌벅적했고 대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었다.
마차 발을 걷고 밖에 상황을 살펴보던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오늘 가장 큰 화두는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었고, 대신들의 논쟁 중심은 자신인 모양이었다.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지친 그가 등자월이 건네준 얼음물로 적신 수건을 받아 얼굴을 거칠게 닦았다. 얼굴 피부가 바늘에 찔린 듯이 아프면서 조금은 정신이 맑아졌다. 그가 하품하며 허리를 쭉 펴서 기지개한 뒤 마차에서 내려왔다.
황궁 앞 광장의 청색 길을 따라 걷자 주변의 무수히 많은 시선과 수군거림이 따라왔다. 모든 사람이 관복을 입은 감찰원 제사 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범한이 강남로 흠차가 된 뒤로 처음 참석하는 조회인 만큼 일반적인 경우라면 대신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에게 인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신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사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어젯밤에 감찰원이 사람을 죽이고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하급 관리들이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조사를 통해 추가로 누가 더 연루될지 알 수 없었다. 조회에 참석하러 온 대신들은 이 사실을 알고는 처음에는 경악했지만 곧이어 분노가 치솟았다. 오늘 범한은 그들의 적이었느니 몰려가 인사를 할 이유도 없었다.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걸어가는 범한은 기분이 불쾌했다. 마치 자신이 이미 조정 문무백관들에게 멸시를 받는 고립된 신하가 된 느낌이었다. 비록 이건 그 자신이 자초한 일이긴 했지만, 왕따가 된 것만 같아서 억울하고 섭섭했다.
하지만 그는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자신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지 않은 듯 평상시와 같이 침착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문에 이르자 지키고 있던 시위와 태감이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어린 내관들의 아부하는 눈빛을 바라본 그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리니 문관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두 대인이 하늘을 관찰하는 것처럼 콧대를 높이고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범한이 코를 쓱 비볐다. 왼쪽에 있는 수염이 하얀 노인은 익숙한 사람이었고, 오른쪽에 있는 중년 남자는 분명 과거 문학 개선 운동을 일으킨 호 대학사였다. 두 문하중서 수장들이 자신을 냉대하는 건 범한이 어젯밤에 자신이 일으킨 소란이 너무 커서 대신들이 보기에 그가 권신이나 간신이 될 경향이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감찰원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은 조정에 몹시 나쁜 영향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천하 문관들의 우두머리인 두 사람은 밀정의 우두머리를 친밀하게 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무시에 주눅들 범한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치솟은 화를 억지로 가라앉힌 그가 히죽히죽 웃으며 아무 말 없이 두 대학사 옆에 서서는 고개를 들어 똑같이 하늘을 바라봤다.
조회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대신들의 눈앞에 무척이나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학사 두 명과 천벌 받은 감찰원 제사가 목을 꼿꼿하게 젖히고 머리를 힘껏 들어 올리고는 하늘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격이 소탈한 서무 대학사가 결국 먼저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작은 범 대인, 뭘 보고 계십니까?”
호 대학사도 하늘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었다. 두 대학사는 똑똑한 사람이긴 해도 범한처럼 낯가죽이 두껍지는 못해서 이상한 시선을 견뎌낼 수 없었다. 호 대학사가 아무 말 없이 마른기침했다.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두 대인께서 보고 계시는 걸 저도 보는 중입니다.”
서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잠시 끙끙거리더니 결국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대인도 감찰원은 막중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만큼 조심히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인이 도대체 뭘 하려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경도 안에서 이런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면 저희 백관들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조정이 어떻게 대처해야겠습니까? 천하 세도가들의 체면을 대인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조정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대인이 한번 말해 보십시오! 6부 관아 관리들을 그렇게 많이 잡아가서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조정 관리들의 마음이 이렇게 심란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입이 열리자 서무 대학사는 말을 멈출 줄 모르게 계속 호통을 쳤다. 보다 못한 호 대학사가 서문에게 눈짓을 줘서 겨우 말이 멈추기는 했지만 씩씩대는 게 화가 삭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범한은 태학에서 제자를 가리키는 선생이자 실속 없는 부마이면서, 홍려사에서 갖은 경력을 거친 관리이자 감찰원 제사였다. 이에 품계는 비록 높지 않았지만, 어쨌든 오늘은 흠차 대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고, 서 대학사가 비록 문관들의 우두머리라 할지라도 흠차 앞에서 훈계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없었다.
“너무 혼내지 마십시오.”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인이 아무리 연장자라고는 하지만 저에게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건 아래 관리들이 보이게도 좋지 않습니다.”
서무는 발끈하면서도 범한의 피곤이 가득한 얼굴과 공손한 표정을 보니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콧방귀를 연신 뀌며 옷소매를 털다가 쏘아붙였다.
“오늘 조회에서 제가 대인을 나무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예상하였던 일입니다. 애틋하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무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바로 그때 황궁 문이 열리면서 채찍 소리와 함께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서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호 대학사와 함께 가장 먼저 안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