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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76화 (576/1,108)

576화 홍문의 연회 (6)

1 황자가 연거푸 술을 들이켜며 자신의 두 형제가 쌈닭처럼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차갑게 노려봤다.

오랜 시간 2 황자 말에 대꾸하지 않던 범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력은 뜬구름과도 같은 것이지요. 천하에 패하지 않은 장군이나 몰락하지 않은 대가문이 있었습니까? 저하는 황자이시니 천하를 마음에 품고 계시지만, 저는 신하인지라 저 자신과 가족은 안녕을 지키고 싶은 생각······.”

2 황자가 그의 말을 끊고는 차갑게 응수했다.

“당당히 시선으로 불리는 자네는 황실의 핏줄인 걸 영광으로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하기만 했지. 하지만 자네 스스로에게 물어보게나. 만약 자네가 황실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이와 같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자리에 앉아 있는 네 명의 형제 중 두 명은 침묵했고 두 명은 대치하고 있었다.

“그만 내려놓도록 하게.”

2 황자가 간절히 말했다.

“자네의 힘은 사실 모두 거짓이고 자네는 나를 죽일 수 없네.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 자네만 위험해질 뿐이야. 자네는 이 점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모든 걸 내려놓지 못하는 건가? 자네는 지금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고, 완아의 상공이자 부황의 아들이자 북제에서 환대받는 큰 손님일세······ 누가 이런 자네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누가 감히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네를 괴롭히려 하겠는가? 령아가 자네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걸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이라 그러더군. 어째서 좁고 위험한 경도에 스스로를 가두고 떠나지 않는 건가?”

범한이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저하,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와 저하는 생각하는 게 같다고요.”

그가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2 황자를 빤히 바라봤다.

“1년 전에 포월루 밖에 있는 찻집에서 말했듯이 저하께서 내려놓지 않으시면 저는 내려놓으실 때까지 공격할 겁니다. 게다가 이 말은 이미 사실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충분한 세력을 가지고 있고······ 찻집에 있던 여덟 가문의 장수들은 더는 있지 않으니 제 말은 충분히 증명된 셈입니다.”

찻집이란 두 글자에 2 황자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 머릿속에 1년여 전 가을날 포월루 밖 찻집에서 범한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대화를 나눌 때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황자와 신하의 신분이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범한의 권세는 풍선처럼 커져 있었고, 두 사람의 신분도 평등해져 있었다.

“내가 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인가?”

2 황자가 신경질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폐하는 장 공주의 독에 중독되어 계시니 제가 대신 해독시켜 드리겠습니다.”

범한이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냉정하게 대꾸했다.

“당시 말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폐하께서 장 공주와 거리를 유지하시고 정말 모든 걸 내려놓으신다면······ 평안한 삶을 사시도록 해드릴 수 있습니다.”

“자네에게 기대 편안한 삶을 살란 말인가?”

2 황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범한의 두 눈을 바라봤다.

“설마 감찰원과 은전에 기대서 편안한 삶을 살란 말인 건가?”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무엇에 기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황비께 호의를 받은 게 있어 보답하고자 그러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밤에 일어난 일들이 무얼 뜻하는지는 저하께서도 분명히 알고 계시겠지요. 저는 저하의 힘을 모두 제거한 뒤 썩은 물속에서 저하를 빼내 드릴 겁니다.”

순간 2 황자는 오늘 밤에 상당한 손실을 보았다는 걸 떠올리고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처량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버럭 화를 냈다.

“왜 나인가? 나만 부황은 아들인가? 자네도 부황의 아들일세!”

“저는 조금의 야망도 없는 신하일 뿐입니다.”

범한이 차분하게 2 황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틀이 지나면 폐하도 제 진심을 알게 되실 겁니다. 다른 황자들 중에서 한 분은 제 제자이니 혼을 내 다스릴 수 있고, 1 황자 저하께서는 술을 더 좋아하시니 문제가 없으며, 황태자 저하의 경우 저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하를 건들 수밖에요······. 저하의 말이 맞습니다. 이 핏줄을 조금은 존중할 가치가 있으니 저는 모든 힘을 내어 두려운 일이 발생하는 걸 막을 생각입니다.”

2 황자는 순간 마음이 서늘해졌다. 병풍에 틈이 없이 잘 막혀 있는 데도 겨울 찬바람이 포월루 안으로 불어오는 것 같았다.

“춘추가 한창이신 폐하께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 원치 않으실 거라는 걸 저하도 분명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포월루를 떠나는 2 황자는 이상할 정도로 냉담한 모습이었다. 이번 대화를 통해서 그가 어떤 정보를 얻었든 범한의 말이 그에게 얼마만큼의 믿음과 두려움을 가지게 했든 상관없이 오늘 밤에 발생한 일은 이미 많은 것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바로 범한에게서 인정사정없이 세력을 제거당한 그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는 장 공주에게 기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범한이 원하는 대로 깨끗하게 황위 쟁탈 싸움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힘이 없는데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 2 황자 역시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늘 밤 범한이 자신의 세력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오래지 않은 미래에 경국에 혼란에 빠졌을 때 자신은 무참히 숙청을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범한에게 조금도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신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붙인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 같은 건 생길 수 없었다.

1 황자는 범한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3 황자를 데리고 포월루를 떠났다. 황실 형제들 사이에서 즐겁지 못한 대화를 나눈데다가 셋째는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니 금군 대통령인 자신이 데리고 가는 게 맞았기 때문이다.

이때 밤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었고, 하늘에는 두꺼운 눈구름도 걷혀서 고개를 들면 어디에서든 달을 볼 수 있었다.

범한은 포월루를 떠나지 않고 홀로 오래도록 남아서 양고기 탕을 먹고 술을 몇 잔 마시고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 밖은 죽은 것처럼 적막했다. 경도부와 수비사 사람들 모두 철수했고, 포월루는 오늘 휴업이라서 옆에서 그의 시중드는 사람 몇 명을 제외하면 모두들 잠들어 있었다.

건물 안을 밝히고 있는 붉은 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한이 석청아에게 뜨거운 물을 준비하게 한 뒤 편안하게 목욕을 했다.

목욕을 끝낸 그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최근 이틀 동안 1 황자께서는 양총 골목에 가셨는가?”

옆에서 듣고 있던 석청아는 큰 사장이 서호 부족 공주의 일을 말한다는 걸 알아채고는 고개를 저었다. 범한이 자신이 입을 옷을 준비하는 석청아를 바라보다가 손을 저어 나가라고 명령했다.

잠시 뒤 포월루 총관리인인 상문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는 조심히 그의 몸에 속옷을 입혀준 뒤 손가락으로 그의 균형 잡힌 몸을 쓸며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녀가 침착하게 손가락 세 개 정도 넓이의 암살 쇠뇌를 그의 왼쪽 팔뚝에 꼼꼼히 메어 줬다.

이후 상문은 장화를 신겨주고, 길고 가는 검은색 비수를 장화에 꽂아준 뒤 일어나 범한의 복장을 마지막으로 정리해 주었다. 검은색 감찰원 관복이 범한의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잘 감쌌는지 확인한 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은은하게 웃으며 환약이 모두 있는 걸 확인하고는 상문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가려 했다.

상문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인, 검은 안 가지고 가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돌려 상문이 들고 있는 대위 천자의 검을 바라보았다. 실의에 빠진 듯 멍한 눈동자로 검을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그 검은 너무 눈에 띄어서 가지고 가지 않고 이곳에 놓아둘 생각이네.”

* * *

포월루의 세 겹의 두꺼운 가죽 발을 열고 사람들이 공손히 범한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연의에 달린 모자를 써서 자신의 수려한 외모를 가린 범한이 건물 밖 돌계단을 내려오다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곧 있으면 눈이 내릴 거라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마차가 다가오자 그가 고개를 저어 걸어가겠다는 뜻을 보이고는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 포월루 연회에 그는 호위를 데려가지 않았다. 경도에 있는 계년조를 포함한 감찰원의 모든 힘은 작전을 수행하는 데 투입되어서 지금 그의 옆에는 범씨 집안의 호위병 몇 명과 마부뿐이었다.

모두들 오늘 밤 포월루 연회에서 있었던 일들과 경도 안에서 벌어진 소동을 알고 있기에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려는 범한을 방해하지 않고 잠자코 따랐다. 마차도 멀찌감치 뒤에서 떨어져 따라갔다.

동쪽으로 얼마 동안 걸어가자 곧게 뻗은 긴 거리가 나타났다.

직선으로 길게 뻗은 거리였다.

연의를 입은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건지 귀를 기울이던 그가 손을 들어 뒤에 있는 마차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지시하고는 성큼성큼 거리 중앙으로 걸어갔다.

밤이 가장 깊은 시간 눈이 그친 경도 거리와 골목에 기괴한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점점 짙어지던 안개는 사방팔방에서 모여들더니 어느덧 긴 거리에 자욱하게 깔렸다.

등불이 없는 경도 밤거리에서 색채가 분명하지 않은 옅은 흰색의 안개는 사람의 시야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다. 마치 장님이 된 것처럼 손을 뻗으면 손가락 다섯 개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범한 혼자 밤길을 걷게 할 수 없이 뒤를 따라오던 마차가 그의 명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마차 안에 있는 범씨 집안 호위병들이 등불을 더욱 밝게 했지만 어두침침한 황색 불빛을 아무리 비춰도 보이는 건 안개뿐이었다. 마치 창산 정상에 있는 구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검은색 연의를 입은 범한의 등도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긴 거리에는 범한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 말고는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리에 범한을 제외한 다른 살아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밤 감찰원은 죽이려 한 사람은 모두 죽였고, 체포하려 한 사람은 모두 체포해 7처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모르는 경도 백성들은 포근한 이불의 온기에 취해 있었고, 밤놀이를 나온 귀족 자제들은 일찌감치 겁을 먹고 집안으로 돌아가 있었다. 야경을 도는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고, 13성문사 관병들은 성문만 주시하고 있었다.

계속 귀를 기울인 채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은 아무것도 감지해 낼 수 없자 안개 속에서 멈추었다. 순간 겨울 찬바람이 불어와 긴 거리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흩어지면서 거리 끝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였다.

긴 거리 끝에 당연히 아무도 없겠지만 누군가가 그곳을 지키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의를 입은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든 채 두 눈으로 앞을 주시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사람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다.

체격은 우람하고 어깨는 강철처럼 단단한 그 사람은 마치 우뚝 솟은 산처럼 긴 거리 끝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큰 활과 화살통을 메고 있었고, 화살통에는 열 세 발의 화살이 담겨 있었다.

바람이 그치고 안개가 다시 짙어지자 그 사람의 모습도 가려졌다.

범한은 오늘 밤 감찰원에게 2 황자 세력에 총공세를 펼치라고 명령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가장 맹렬한 공세를 펼칠 때가 바로 자신의 방어력이 가장 약해지는 시기라는 걸 말이다. 지금 그의 옆에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직 자신뿐이었다. 산골짜기 습격 사건에 대한 복수를 진행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는 복수를 하면서 그는 어느 대도독이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위한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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