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홍문의 연회 (5)
범한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말을 들은 늑대는 잔뜩 신이 나서는 호랑이에게 영리하다며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집 밖에서 김을 매고 있던 흰색 토끼도 듣고 있었지요······.”
“참으로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모름지기 기묘한 우연이 있어야 책이 되는 법이지요. 이어서 계속 말하자면······.”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했다.
“셋째 날 흰색 토끼가 다시 대문을 나섰고 길을 가다가 회색 늑대를 만났습니다. 회색 늑대가 말했죠. ‘토끼야 나에게 고기를 가져다줘!’ 그러자 흰색 토끼가 말했습니다. ‘커다란 게 좋으세요? 아니면 작은 게 좋으세요?’ 토끼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회색 늑대가 미간을 찌푸리다가 웃으면서 호랑이가 알려준 다른 방법을 사용했지요. ‘고기는 됐고, 암컷 토끼를 찾아서 데리고 와 줘.’ 그러자 흰색 토끼가 말했습니다. ‘뚱뚱한 토끼가 좋으세요? 아니면 마른 토끼가 좋으세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교활한 토끼를 만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회색 늑대가 이어서 뭐라고 했을지 궁금해하며 범한이 이어서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범한이 약간 마른 입술을 문지르며 웃었다.
“당황한 회색 늑대가 흰색 토끼를 때리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한 번 둘러 보며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모자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세상에서 가장 비합리적이고 후안무치하며 뻔뻔스럽고 황당무계한 이유이자 가장 충분한 이유면서 또 가장 필요 없는 이유는 바로 누구 주먹이 더 센지 보는 것이었다.
범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마무리했다.
“저는 계속 흰색 토끼의 역할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회색 늑대가 되겠습니다.”
오늘 밤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 이야기는 이전 세계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이전 세계에서는 큰 소리로 웃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모두들 속으로 탄식을 내뱉으며 산골짜기에서 범한을 공격한 일을 명확하게 조사할 수 없듯이 오늘 밤 감찰원이 여덟 가문의 장수들을 모두 암살한 일도 증거가 없을 것이므로 범한이 승낙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아낼 수 없을 거라 짐작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서로를 적대시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은 싸우는 충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권력 싸움에서는 항상 늑대와 도망치는 토끼, 그리고 옆에서 방관하는 호랑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 * *
연회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계속할 마음이 없는 상태였다. 이미 경도 관료사회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지만, 오늘 밤에 일어난 일은 파장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일이었다. 감찰원이야 경도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밤을 틈타 움직였겠지만, 이 때문에 모두가 한밤중에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뒷일을 처리하고 앞으로 있을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기 위해 저택과 관아로 돌아가려 했다.
포월루를 떠나던 설청이 고개를 돌려 문 앞까지 배웅을 온 범한을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동물입니다. 혼자 움직이는 늑대는 위험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범한이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공손히 모아 감사 인사를 올렸다.
설청이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상께서 비록 허락했다고는 하지만 분수를 지키고 조정의 체면을 지키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연회에 참석한 귀빈들이 마차나 가마를 타고 연이어 포월루를 떠났다. 황태자가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한 뒤 기생을 품에 안고 아래로 내려오자 일찌감치 대기하고 있던 시중드는 사람이 화려하게 장식된 외투를 걸쳐줬다. 황태자가 범한을 힐끗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 연기는 보는 재미가 있었네.”
황태자가 안고 있던 기생과 관련 없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범한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1년 전 가을날 자네와 둘째 형님이 했던 연기도 보는 재미가 있었지······.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본궁과 자네 사이에는 아직 무엇도 한 게 없는 것 같군.”
범한이 살짝 당황했다. 황태자의 말에 담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본궁과 자네 사이에 어떤 문제도 없었다는 거네.”
황태자가 살며시 두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때의 문제이지 자네와 나 사이의 문제가 될 수는 없는 거네. 본궁은 자네가 이 점을 기억해 주었으면 하네.”
범한과 황태자는 지금까지 계속 모종의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황후과 과거 참여했던 일 때문에 두 사람은 자연적으로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황태자가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고, 무슨 일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황태자가 자신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의 그의 친모를 죽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 못할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하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일 뿐이었다.
* * *
병풍 안, 모두가 떠나는데도 2 황자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범한을 바라보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하며 오른손을 천천히 탁자 위에 올려 손가락 두 개로 남쪽에서 진상한 청과를 집어 베어 물었다.
범한이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술병을 들어 연거푸 열 잔을 스스로 따라 마셨다.
1 황자가 큰 술독을 끌어안고 맘껏 마시고 있는 모습이 아무 생각 없이 취할 작정인 것 같았다.
범한이 술잔을 내려놓고 손뼉을 치자 발 뒤에서 3 황자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걸어 나왔다.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1 황자와 2 황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자신의 스승인 범한 옆에 앉았다. 1 황자가 어른의 일에 아이를 연루시키는 걸 동의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봤다.
이때 포월루 3층 응접실에는 세 명의 황자와 범한만 남아 있었다. 먼저 떠난 황태자를 제외하고 경국 황제의 핏줄이 모두 모인 셈이었다.
조금 전까지 진행된 홍문의 연회가 기괴한 분위기의 가족 연회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겁을 먹었군.”
2 황자가 반쯤 먹은 청과를 내려놓고는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범한이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두렵지 않다면 오늘 밤에 이런 짓을 벌일 필요가 있었는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하는 2 황자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두려우니까 오늘 밤에 이런 소란을 피운 거겠지. 내 장수들을 죽이고, 심복들을 체포한다고 해서 대세에 영향을 줄 것 같은가?”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켠 뒤 침착한 얼굴로 응수했다.
“이제 외부인은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도 상관없겠군요. 오늘 저하의 부하들을 모두 죽인 건 제가 한 일이 맞습니다만······ 다만 저하에게는 이를 증명할 만한 증거가 없지요. 산골짜기 습격 사건처럼 말입니다. 저도 그 일에 증거가 없지만, 당신들이 한 일인 건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산골짜기 습격 사건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알지 못하네.”
2 황자가 범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범한이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외양간 거리 사건은 어떻습니까? 흰색 토끼는 뺨을 너무 많이 맞았습니다······. 지금은 산골짜기 사건을 누가 저질렀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제 일에 방해되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이어 말했다.
“사방팔방이 모두 적인지라 어느 쪽 적이 한 일인지 알 수 없으니 화살을 마구잡이로 쏠 생각입니다. 주모자가 맞으면 이득인 거고 상관없는 사람이 맞아도 제게 손해는 아니니 이 또한 이득이지요.”
“외양간 거리 일은······.”
2 황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몇 년 전 일을 자네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군.”
범한이 고개를 들어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받은 원한은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하도 제가 원한 때문에 이번 일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저하께서 하루도 가만있지 않으시니 저도 하루도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신들도 황태자도 없는 자리에서 기질이 무척이나 닮은 범한과 2 황자가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 모두 두뇌 회전이 빠른 서로를 말로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2 황자가 범한 옆에 앉아 있는 3 황자를 바라보고는 대뜸 입을 열었다.
“가끔은 인생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네······. 최씨 집안과 명씨 집안일은 말할 것도 없고 본궁이 예뻐하던 누이는 자네에게 시집을 가서 아내가 되었고, 어려서부터 사이가 돈독했던 형제들도 이제는 자네의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2 황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은은하게 분노가 보였다.
“만약 본왕이 능력이 자네보다 못하다면 상관없네만······ 황당한 이유로 지금 상황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만약 부황께서 감찰원을 본왕에게 주었다면 내가 자네보다 못했을 것 같은가? 만약 부황께서 황실 금고를 나에게 주었다면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지 못했을 것 같은가? 큰 강 제방을 수리하는 일도 다르지 않네. 자네가 은전을 융통해 자금을 마련했듯이 나도 그리할 수 있었네. 안지, 자네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어쨌거나 내가 정식 황자이지 않은가.”
범한이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도 자신이 경국에서 휘황찬란한 일생을 살면서 비정상적인 권세를 누리는 이유가 모두······ 과거 그 여인의 유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여인으로 인해서 많은 골치 아픈 일들과 위험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2 황자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만약 자신이 2 황자의 상황에 있다면 그는 그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2 황자는 능력이 있음에도 지금껏 능력을 펼칠 무대에 서 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세상일에 만일이라는 건 없습니다.”
“맞네. 지금 왼손에는 감찰원을 오른손에는 황실 금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자네이지······.”
2 황자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자네가 지금 쥐고 있는 권세는 사실 과거 자네 모친이 가졌던 것이지······. 그래서 지금 미리 겁을 내는 게 아닌가.”
범한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2 황자가 천천히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자네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바삐 고생하는 건가?”
그가 눈을 옆으로 움직여 3 황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너도 황실 자제이니 황실 자제가 사귀기 좋은 상태가 아닌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
3 황자는 고개를 숙일 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범한은 2 황자의 이런 말이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라 계획과 생각에 따른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2 황자가 담담히 말했다.
“자네는 정말 겁을 내고 있어······ 생각해 보니 자네는 이제 고립된 신하에서 단절된 신하의 길을 가고 있군. 나중에 누가 천자의 자리에 오르든 이 경국이 자네를 포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은가? 감찰원이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범한이 잠자코 듣기만 하자 2 황자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네는 두려워하고 있네. 총명한 사람이니 지금 자신이 가진 권세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드높다 한들 언제든 흩어질 수 있는 구름과 같은 것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2 황자가 탄식하며 계속 말했다.
“자네의 손에 들린 권력은 모두 부황께서 자네에게 주신 것이니 조서 한 장이면 언제든 모든 걸 다 잃고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네······. 부황이 비록 자네를 총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네를 경계하지 않으시는 건 아니니까. 최근 몇 년 동안 부황께서는 자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시면서도 군대 쪽에 손을 뻗는 것만큼은 절대 못 하게 하셨지.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2 황자가 말을 마무리 지었다.
“자네는 겁을 먹어서······ 내가 가진 권력을 빼앗은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