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화 홍문의 연회 (1)
사실 자리에 앉은 손님은 대략 십여 명 정도로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모든 사람 옆에 기생들이 앉아 있고 뒤에는 시중드는 종들이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어 응접실이 가득 찼다.
그리고 범한의 시중을 드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포월루의 관리자인 상문 낭자였다.
오늘 이 자리는 잡설을 늘어놓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거나 벌주 놀이를 하거나 기생들의 가슴과 엉덩이를 주무르며 놀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더욱이 이 자리에는 설청과 추밀원 부사 두 명이 자리해 있고, 젊은 귀공자들도 모두 지체 높은 신분이었기에 함부로 입을 놀릴 수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만 돌다가 이따금 조정에 대한 가벼운 농담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서무 대학사가 술에 취해 눈이 덮인 거리에서 넘어져 굴렀다는 등의 말이었다.
서무 대학사는 성격이 소탈했기 때문에 후배들이 자신을 상대로 농담을 해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감히 황제들과 범한을 가지고 농담을 할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범한에 대해서는 사람들 모두 오늘 연회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추측하느라 분주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설청은 혼자 술을 마시며 옆에 있는 기생의 작은 손을 잡고 희롱했다. 조정 관리의 기품을 벗어 던지고 평범한 중년 남자들처럼 노는 것이 서각 학사인 그도 과거에는 기생집을 많이 쏘다닌 경험이 있는 모양이었다.
2 황자가 술을 홀짝이며 범한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안지, 1년 만에 포월루에 와보니 기생들이 이전보다 훨씬 예뻐졌군.”
분위기가 가벼워지려면 범한과 2 황자 중에서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럴 리가요.”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포월루에서 여러분을 성대히 모시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귀빈 분들에게 제가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열세 명의 기생들은 포월루에 있는 기생들뿐만 아니라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들을 모두 끌어다 모은 것입니다······. 유정강 꽃놀이 배에서 노는 기생들과 관기들까지 오늘 밤에는 모두 이곳에 모였습니다. 제가 장담하던데 오늘은 다른 곳에서 인기가 있는 기생을 찾아내시기 어려우실 겁니다.”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야 최고 기생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사실 돈이 많이 드는 것도 드는 것이지만 단 하루 만에 경도 풍류계에서 자신들의 가장 유명한 기생을 제공해 주기로 결정했다는 건 범한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케 했다.
그제야 사람들이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옆에서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생을 바라봤다. 유심히 살펴보던 사람들이 웃으며 ‘유정강에 있는 누구였구나.’, ‘교방사에 있는 누구구나’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범한의 말대로 이곳에 있는 기생들은 풍류계에서 놀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최고 기생들이었다.
2 황자만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술을 들이켰다.
‘오늘 이곳에 있는 십여 명의 기생 중에서 네 명은 세자 홍성이 유정강 일을 맡았을 때 데리고 있던 기생들이 아닌가. 원몽이 강남에서 죽고, 석청아가 범한에게 투항하고 이홍성은 정왕에게 외출 금지령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범한을 바라봤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의 눈동자에 은은한 웃음기가 어려 있는 게 단순히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려고 오늘 연회를 계획한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2 황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포월루가 이렇게 잘 운영되는 건 상문 낭자의 세심함과 안목 덕분인 것 같군. 소생 이 잔으로 자네의 노고를 위로하고 싶네.”
이 말을 하며 그가 손에 있는 술잔을 범한 옆에 있는 상문을 향해 들어 올렸다.
황자인 그가 자신을 소생이라 낮춰 말하는 것은 평소 그의 온화한 성품과 들어맞았고, 또 풍류장에서 신분은 존귀함과 비천함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기에 모두들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연회의 주인인 범한이 버젓이 있는 데도 첫 번째 경배를 상문에게 올렸냐는 것이었다.
이때 상문은 범한 옆에 붙어 음식을 먹여주려 하던 중이었다.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범한의 입가로 가져가던 상문이 이 말을 듣고는 당황해하며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상문이 일어나 2 황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잔에 든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2 황자가 말을 하기 전에 잔에 술을 따른 뒤 상석에 앉은 황태자와 1 황자를 향해 올렸다.
오늘 자리가 어색해 그저 품에 안긴 기생과 노는 데 집중하던 황태자는 기생의 입에서 황위를 계승할 분이라는 말까지 들으니 온몸이 나른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득의양양해진 황태자는 연회에서 2 황자와 범한이 부딪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1 황자는 달랐다. 그가 상문이 올린 술을 들이마신 뒤 탄식했다.
2 황자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 어려운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흥취를 돋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상문 낭자가 포월루를 관리하게 되면서 경도 사람들은 귀를 즐길 기회를 좀처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상문 낭자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상문 낭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일어나 거문고를 들어 올리려 하자 갑자기 범한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상문의 손을 잡은 범한이 2 황자를 바라보며 정중히 말했다.
“상문 낭자는 이제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상문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 일로 인해서 연회가 분위기가 나빠지면 어떡하나 하고 생각을 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부르며 살아왔기에 연회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익숙했다. 그래서 그녀는 범한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드는 것이라는 걸 잊어먹고 말았다.
2 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범한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회가 시작된 이후 2 황자는 범한의 태도를 예의주시하며 그가 경도로 돌아와서 뭘 하려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범한의 반응에 분위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범한이 2 황자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내가 이런 자리를 만든 건······ 살벌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인데, 노래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
이런 생각을 하는데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태상사 소경 임소안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주의를 시키자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추밀원 부사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작은 범 대인은 말씀은······ 황자께서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라 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까?”
범한이 그날 추밀원 앞에서 대치하기 훨씬 전에 이미 군대 쪽과 갈등이 있었던데다가 산골짜기 습격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으면서 양측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사이가 위태로웠다.
경국 군인답게 성격이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우악스러운 추밀원 부사의 성은 곡(曲) 이름은 향동(向東)이었다. 과거 마지막 북벌에서 선봉장을 맡으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범한의 권세도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 범한의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히 대치했다.
범한은 화를 내기보다는 웃으며 응수했다.
“상 낭자는 진원에서만 노래를 부릅니다. 곡 부사께서 그렇게 간절히 상문의 노래가 듣고 싶으시다면 제게 허락을 받지 마시고 직접 경도 밖 진원에 가서 진 원장께 물어보십시오.”
진 원장이라는 무서운 호칭이 튀어나오자 2 황자는 웃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추밀원 곡 부사도 튀어나오려 하는 욕을 애써 삼켰다.
“마십시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 침묵하고 있던 1 황자가 갑자기 술잔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래 군인 출신인 그는 성격이 호탕한데다가 오늘 범한과 군대 쪽의 관계도 풀어주고 형제들 사이에 있는 갈등도 다독여줄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하지만 연회 분위기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큰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추밀원의 두 부사도 군인 출신으로 누구 못지않게 호탕한 성격이었기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3량 정도 되는 술 단지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은은히 웃으며 술 단지에 입술을 갔다 대고는 천천히 기울였다. 속도는 느리지만 쉴 새 없이 마시더니 결국 단지 안에 든 술을 모두 마셔버렸다.
상석에 앉은 황태자가 그 모습을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1 황자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형님, 술을 마시다가 형님의 호통 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술을 쏟을 뻔했습니다.”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황태자가 다시 추밀원 두 부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도 군대 일을 포월루에 가져올 생각은 하지 말게. 본궁도 자네들과 안지 사이에 서로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아네만 아직 명확하게 조사가 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신하들 사이에서 서로를 원망해서 되겠는가?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술 싸움을 해서는 안 되네.”
그리고는 그가 범한을 가리키며 추밀원 두 부사를 향해 말했다.
“잊었는가? 과거 작은 범 대인이 3천 잔의 술을 다 마셔서 함께 마시던 북제 장영후를 고꾸라트렸던 일 말이네. 주량으로만 보자면 안지는 자네 군대 쪽 어르신들과 대적해도 뒤지지 않을 거네.”
동궁 사람인 신기물은 황태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소신이 보기에 두 장군께서 작은 범 대인과 술 싸움을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더는 시를 짓지 않으시는 작은 범 대인께서 다시 시 삼백 수를 지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반한재 시집의 속편이 나온다면 추밀원이 천하에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니······ 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이 말에 모두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설청은 한 발 더 나가 범한에게 술을 마시라고 권하면서 추밀원 두 부사에게 범한과 술 싸움을 벌이라고 재촉했다.
술잔이 다시 채워지자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범한이 호탕하게 술잔을 들이켰고 추밀원 두 부사도 질세라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때 2 황자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안지가 그날 밤 이후로 시를 더는 짓지 않는 건 정말이지 천하에 큰 손실이라 할 수 있네······. 하지만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알 수 없지만, 안지가 북제에 갔을 때 북제 성녀에게 문장을 지어줬다는 말이 있더군.”
작년에 천하를 가장 들썩이게 했던 이 소문으로 북제 사람들은 불쾌함에 진저리를 쳐야 했고 경국 사람들은 통쾌해하며 미소를 지었었다. 그 소문이 다시 언급되자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면서 범한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추궁했다.
난처한 미소를 지은 범한이 대충 둘러대면서 은근슬쩍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봤다. 황태자는 실권을 약간 잃긴 했지만 분명 2년 전보다는 성장한 모습이었다.
‘나와 2 황자의 싸움을 지켜보다가······ 잇속을 챙길 속셈인 건가? 하지만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뭘 믿고 있는 거야?’
연회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자 1 황자가 일어나 사람들을 잡고는 억지로 술을 먹이기 시작했다. 범한이 몰래 미소 지으며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왕부에서 큰 공주에서 잡혀 사느라 한동안 놀지 못한 1 황자가 오늘을 마음껏 놀 작정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범한가 시선을 돌려 약간은 취해 보이는 황태자와 여전히 맑은 눈빛을 하고 있는 2 황자를 바라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경도를 떠나 있는 1년여 동안 여러분이 참 그리웠습니다.”
그가 갑자기 정색하며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게도 경도에 들어오는 와중에 도적의 습격을 받아 제 부하 십여 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감찰원 소속 관리들로 조정의 인재들입니다. 조정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한 끝에 마침내 경도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고 기뻐하다가 경도성을 십여 리 앞두고 죽임을 당했지요······. 아마 집안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와 자식들도 지금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그가 독주가 담긴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고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떠들썩하던 포월루 3층 응접실이 다시 무거운 침묵에 휩싸이는 순간 오늘 밤 놀이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