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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68화 (568/1,108)

568화 어서방에서 과거를 떠올리다

황제는 눈꺼풀을 살짝 내려뜨리고 중년 남자 특유의 매력인 눈가 주름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범한을 보지 있지도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범한의 말을 들으며 담주의 풍경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범한이 설명을 멈추자 황제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범한을 향해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서쪽 정벌을 하고 돌아온 뒤로 짐은 경도를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담주의 풍경이 그립구나.”

마지막으로 서쪽 정벌을 했을 때 경도에서는 변란이 있었다. 피로 물든 태평 별궁에서 범한은 오죽에게 안겨 도망쳤고, 이후 마차를 타고 담주에 도착했다.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과거의 일을 떠올리다가 물었다.

“폐하도 담주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가보았지.”

황제의 입가에 주름을 지면서 미소를 지었다.

“짐이 담주에 갔을 때는 네가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그곳에서 네 모친을 만났지.”

임금과 신하 두 사람 모두 깊은 침묵에 빠졌다. 모두들 이 말이 약간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처음 어머니를 만났으니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건 당연한 말이었다.

잠시 뒤 약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담주에 계셨군요.”

“진 원장과······ 범 상서가 말해주지 않은 거냐?”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짐은 당시 일을 네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범한은 지금 자신이 물어보기만 한다면 아름다운 추억 속에 깊이 빠져 있는 황제가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묻고 싶지 않았다. 마치 그 가려진 장막을 걷어내는 순간 어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숨어져 있는 괴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침착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제게 이야기를 해주셔서 조정에서 담주에 특별히 은혜를 내려 3년 동안 세금을 면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가 보니 아직도 세금이 면제되고 있더군요. 이에 담주 백성들은 평온한 삶을 살며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군주인 짐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 당연한 일에 감사할 필요가 있겠느냐?”

황제가 웃으며 범한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담주에 20년 동안 세금을 면제한 것은 첫째로 네 모친 때문이고, 둘째로 그 당시 항구에 감사해하기 위함이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었고, 게다가 그 첫사랑 상대는 자신의 친어머니였다. 마침 그의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크게 울리자 그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말했다.

“황상······ 정말 배가 고파서 그런데 제비집 죽을 하사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황제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범한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웃었다. 경국 황제는 천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있었기에 조정 대신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이에 십여 년 동안 대신 중 누구도 황제와 대화를 하던 중에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을 내려달라 요청한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황태자나 1 황자는 유모들에게 안겨 있는 어린 시절에도 배가 고프다는 투정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황제가 애써 웃음을 참고는 애정 가득한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저 뻔뻔스러움은 제 어미를 꼭 빼닮았어······ 하하.”

황제가 애써 이 말을 토해내고는 탁자에 놓아둔 반쯤 먹고 남은 제비집 죽을 가리켰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때 얼른 먹도록 해라.”

범한이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가 순백색 그릇을 넘겨받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마시기 시작했다. 몇 입 만에 탕을 다 마신 그의 얼굴에는 감격에 겨운 눈물이나 황제의 은혜에 황송해하는 표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만족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과연 안지야 말로 가장 가식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범한이 속으로 자신을 욕하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범한이 황제를 욕한 것은 그의 옹졸함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제비집 죽을 얼마 남겨두지 않아서였다.

한편 옆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요 태감은 무척이나 놀랐다. 그는 황궁에서 오랜 시간 있으면서 오늘처럼 황제와 신하가 가깝게 어울리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난번······ 서무 대학사가 북제에서 돌아왔을 때 폐하가 총애와 절대 개의치 않는다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 육포 반 조각을 하사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 서무 대학사는 육포 반 조각에 감개무량하여 폐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며 연신 황제의 은혜에 감사의 인사를 올렸었다. 오늘 작은 범 대인처럼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대신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황제는 작은 범 대인의 이런 기질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요 태감이 고개를 숙인 채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지금처럼 군신의 관계 같으면서······ 동시에 부자 관계 같은 모습은 황궁 안에서는 정말이지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폐하의 한 마디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죽 그릇을 받아서 물러났다. 황궁 처마를 따라 걸어가면서 방금 본 장면을 떠올리던 그가 깊은 두려움에 탄식했다.

어서방 안에는 황제와 범한만 남아 있었다. 잠시 뒤 황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지체가 있는 사람이니 더는 이전에 태학에서처럼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담주의 여종을 위해서 관리 집안의 공자를 때려 반년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건 정말 체통을 지키지 못한 짓이다.”

범한은 이 말을 듣자 목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침착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에 같은 일이 생겨도 똑같이 때려줄 겁니다.”

“아아. 그렇단 말이냐.”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네가 정 때려야겠다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제멋대로 구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

범한은 황제의 말에 다른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채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젊은 범한의 눈가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집에서 쫓겨나 출가한 여종을 위해서 저런 짓을 저지르는 놈인데, 산골짜기에서 부하들을 십여 명이나 잃었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원한을 잊지 못하는 성격이 만큼 이 일을 그냥 넘어가라고 한들 분명 그러지 못할 것이야.’

물론 황제가 직접 범한에게 잠시 멈추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황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에 손님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범한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1년 넘게 경도를 떠나 있어 대인들과 만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모두 만나보려 합니다.”

황제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 한 말이 기억해라. 제멋대로 굴더라도 한도를 지켜야 한다.”

“네, 폐하.”

“산골짜기에서 있었던 그 일은 조정에서 조사하던 걸 자네에게 넘겨주도록 하지.”

“네, 폐하.”

“일을 볼 때는 멀리 볼 줄 알아야지 눈앞에 있는 것만 보려 해서는 안 되네.”

“네, 폐하.”

“내년에 시간을 내서 강남에 가 자네와 설청이 짐의 곡물창고인 황실 금고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나 보고 싶구나.”

“네······?”

범한이 고개를 번쩍 들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가 경도가 아닌 다른 지방을 순시하는 건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더욱이 지금은 경도에 각 세력이 힘을 발휘하려 꿈틀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황제가 황궁을 지키고 있는 이상 누구도 함부로 날뛰지는 않았지만, 산골짜기 일이나 교주에서의 일은 용상 아래 화산에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있음을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순시를 나간다니?

황제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한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신이 보기에······.”

다시 호칭이 저에서 소신으로 변한 것은 신하로서 진심으로 간언을 드린다는 의미였지만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짐이 이미 결정한 사항이다. 천하를 손에 쥐고 있는데 그깟 빈대 몇 마리가 날뛰는 걸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느냐······. 짐이 담주에 가보고 싶으니 내년에 네가 강남으로 돌아가면 준비를 해놓거라. 그리고 이 일은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황제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먼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느냐?”

범한이 먼저 했던 말 중 뭘 말하는 걸까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먼저 했던 말이란······ 제멋대로 굴더라도 한도를 지키라는 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제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에게는······ 아들이 몇 명 있지. 너희들 모두 소란을 피우길 좋아하지만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네 마음은 짐도 알고 있으니, 앞으로 이렇게 계속해나가도록 해라.”

범한은 아들과 너희들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는 황제의 두 눈이 자신의 몸을 통과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걸까? 순간 그는 작년 포월루 앞에서 2 황자와 충돌했던 것과 찻집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황제가 그 대화를 통해 범한의 마음을 추측해 냈다면 그의 추측은 어느 정도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해당이란 낭자는 북제로 돌아갔느냐?”

황제가 갑자기 묻자 범한은 또다시 흠칫 놀랐다. 그가 어쩔 방법이 없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랑도가 데리고 갔습니다.”

황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짐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꼭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 천일도와 각 지역 제묘와 관계가 깊으니 네가 만약 천일도를 통제할 수만 있다면 조정에 큰 공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범한이 뭐라 말하려 하자 황제가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고하가 죽으면 해당이 그 자리를 계승할 거다. 그 점을 분명하게 명심하고 있거라.”

범한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가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계속했다.

“북제 여인과 가깝게 지내는 건 괜찮지만 북제와는 반드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짐은 너를 의심하지 않지만, 경국은 천하에 뜻을 두고 있어. 올해 동안 네가 한 행동들은 군대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모두 행동하는 데 거리낌 없고,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를 원하고 있지······. 너도 이번에 경도로 돌아와서 추밀원이 너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느꼈을 것이다. 이것 모두 그 일과 연관이 있어.”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온건파와 강경파의 충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폐하는 피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건 분명히 범한에게 보내는 엄숙한 경고였다.

“네, 폐하.”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신 분수에 맞게 행동하겠습니다.”

그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황제가 웃으며 위로했다.

“오랜만에 경도로 돌아왔으니 황궁 안을 둘러보다 가도록 해라······.”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저 말했다.

“황태후께서도 기뻐하실 거야.”

범한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어사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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