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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65화 (565/1,108)

565화 큰 세상을 위한 작은 희생 (2)

“정체를 말해라.”

왕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안해하며 말했다.

“저는 왕 십삼랑으로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왔지만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내키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연신독이 화살을 그의 미간에 조준했다. 활시위를 당긴 두 손이 조금도 떨리지 않는 게 얼마만큼이든 그대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카로운 화살촉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이미 상대방의 눈동자에서 비쳤다. 그는 천하에서 자신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을 받아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상대방의 말을 듣자 그는 황당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마음이 차분해졌다.

“범한이 시킨 건가?”

왕희가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 말고 이 세상에서 저에게 사람을 죽이라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진영에 눈은 이미 그쳤지만, 밤이 깊으니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휭’ 하고 바람이 일어나자 산속 맹수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한 바람 소리가 두꺼운 휘장을 뚫고 안에 있는 사람의 고막을 때렸다. 연신독이 자신의 앞에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십삼랑이란 사람의 얼굴에서 왜 긴장감이나 살의가 아닌 비통함과 부끄러움만 보이는 것일까?’

암살자가 부끄러워할 필요도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일까?

연신독은 그런 상대방의 모습을 보니 혼란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상대방이 일부러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더 승산이 있는 것이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왕희는 산에서 사냥꾼을 만나고도 자신의 두꺼운 가죽을 믿고 도망치지 않는 곰처럼 무척이나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 마치 화살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화살이 저기 서 있는 십삼랑을 죽일 수 있을까?’

연신독은 눈 내리를 밤에 푸른 깃발이 떠올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 궁술 실력에 의심이 생겼다.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왕희가 한숨을 쉬고는 이상하게 자꾸만 마르는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제가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저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더는 세상일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무공도 뽐내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끊은 채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범한의 화가 가라앉고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제가 당신을 죽일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

연신독은 우습기보다는 오히려 황당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놓았다.

연신독의 화살에 장전되어 있던 화살이 순식간에 왕희 앞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후 펼쳐진 장면은 연신독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왕희가 발을 살짝 움직여 세 걸음을 걷더니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날아간 화살을 어떻게 됐을까?

어마어마한 기세로 날아간 화살은 왕희의 뺨을 스쳐 두꺼움 장막을 뚫고는 ‘윙’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날아가더니 ‘휭’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벼운 세 걸음이었지만 연신독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처럼 짧은 거리에서 자신의 빠른 화살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반응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를 뿐만 아니라 정기를 통제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저런 고수가 어디서 나온 거지? 왜 범한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거지?’

이 세 가지 의문이 연신독의 마음속에 용솟음쳤다. 하지만 이런 의문 속에서도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화살 셋을 시위에 걸고 바로 쏘아냈다. 당장 발사한 화살 세 발이 연달아 섬광을 내뿜으며 왕희의 몸 위쪽, 가운데, 아래쪽을 향해 날아갔다. 이후 그는 곧장 몸을 돌려 작은 칼로 막사 천을 찢고 어두운 밖으로 뛰쳐나갔다.

화살을 세 발이나 연달아 쏘고 이어서 급히 움직이느라 이미 정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그는 도와달라고 외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이 사실을 알고 진영에 있는 장군들이 급히 달려온다고 하더라도 저 신비한 점쟁이에게서 자신을 구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막사 밖으로 나온 연신독이 활시위만 당긴 채 발사하지는 않고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왕희가 서 있었다. 연신독은 상대방이 무슨 수로 세 발의 화살을 모두 피했으며, 또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자신의 앞을 막고 서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연신독은 예리한 눈으로 왕희의 소매에서 피가 떨어지는 걸 발견했다. 상대방이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그의 마음속에서 용기가 샘솟았다. 그 현묘한 보법으로도 자신의 화살을 전부 피할 수는 없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하늘에서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거센 바람이 땅에 덮여 있던 눈이 일으켜 꼭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왕희가 고개를 숙여 피가 묻은 자신의 소매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말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어디서 온 사람인가?”

연신독이 눈을 가늘 게 뜨고 차갑게 물었다.

“하지만······.”

왕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는 범한을 도와야만 합니다. 이 천하의 안정을 위해서, 모든 대륙의 편안을 위해서, 내 고향과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뭘 위해서였지? 아무튼, 저는 반드시 그를 도와야 합니다.”

“천하의 안정을 한 사람에게 기대 이루겠다는 것인가? 황제도 아닌 범한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연신독은 왼쪽으로 물러선 뒤 살짝 몸을 기울여 자신의 화살통에 담긴 화살을 바라봤다. 그가 말을 하면서 공격할 시기를 가늠했다.

“저는 이미 가족이 없습니다.”

왕희가 탄식하며 말했다.

“하지만 천하의 안정을 원한다면 저는 반드시 그를 도와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큰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작은 인물의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요.”

‘작은 인물이라고?’

연신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작은 인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대도독의 아들이었고, 연문 궁술의 계승자로 앞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될 인물이었다. 이제 겨우 경묘 2 제사를 죽였을 뿐인 그는 앞으로는 자신의 위상을 천하에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자신이 죽어야 한다니?

왕희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두꺼운 구름에 가려진 별빛을 보려는 것처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가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잘못된 사람을 도운 게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그는 이미 좋은 기회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연신독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총 7발의 화살을 연달아 발사한 그가 손을 뻗어 화살통에 담긴 마지막 화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화살에 장전한 뒤 활시위를 당겨 발사했다.

일곱 발의 화살에 이어 살의가 가장 많은 농축된 마지막 화살이 날아갔다.

연신독은 오늘처럼 자신의 능력에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다. 일곱 발의 화살을 연달아 발사하는 건 그가 살면서 이룬 가장 높은 경지였고, 심지어 과거 아버지가 자신의 나이 때 이루지 못한 경지였다. 그는 설사 범한이 자신의 앞에 있더라도 이처럼 엄청난 위력을 지닌 화살을 피하지는 못할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점을 망각하고 있었다. 바로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싸움 방식이 있다는 걸 말이다. 만약 범한이 직접 그를 죽이려 했다면 분명 음흉한 방법을 동원해 독을 타고 또 타고 계속 타서 죽였거나 아니면 소리 없이 접근해 단박에 검을 찌름으로써 그에게 화살을 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범한이 직접 그를 죽이러 왔다면 연신독은 아마도 곱게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신도 온전히 거두지 못할 정도 참혹하게 죽었을 테니 말이다.

반면 왕 십삼랑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겉모습과는 다르게 선택하는 싸움 방법은 용맹하고 공포스러웠다.

그렇다. 정말이지 공포스러웠다.

왕희가 곧장 달려들더니 어둠 속에서 큰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새처럼 자신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일곱 발의 화살은 무시한 채 마지막 화살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가장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화살을 말이다.

‘푹, 푹’ 소리를 연신 내며 일곱 발의 화살이 왕희의 몸을 꿰뚫었다. 다만 공중에서 춤을 추는 그는 몸에 치명적인 부위는 다치지 않고 어깨나 팔과 같은 곳만 부상을 입었다.

‘착’ 소리와 함께 마지막 화살이 왕희의 오른손에 잡히면서 마치 마차 바퀴가 고르지 못한 길을 덜컹거리면서 가는 것처럼 듣기 힘든 마찰음이 들렸다.

어두운 밤공기에 옅은 탄내가 났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화살을 잡은 왕희의 오른손이 그 힘에 덴 것이었다. 마찰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빠른 화살을 그는 맨손으로 잡았다.

손에 잡힌 뒤에도 왕희의 눈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이 결국 1촌 정도 앞에서 멈춰 섰다. 맨손으로 화살을 막아낸 것이다.

그가 새처럼 날아 연신독의 바로 앞에 섰다.

왕희가 끙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연신독의 명치에 화살을 꽂았다. 번개처럼 빠른 속도에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연신독이 비틀거리다 땅에 쓰러졌다. 자신의 가슴에 꽂힌 화살과 연신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바라보다가 다시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는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막사 앞에 두 다리를 뻗고 앉은 그의 몸이 몇 번 힘없이 꿈틀거렸다.

사실 그는 가장 위급한 순간에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배웠던 교훈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무기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격 범위를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전장에서 생사가 결정된다는 사실 말이다. 그는 죽음을 앞둔 뒤에야 자신이 거리를 너무 가깝게 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왕희가 숨을 헐떡거리며 그의 앞에 서서 호흡이 점차 미약해지는 궁수를 바라보았다.

“작은 활잡이, 편안히 가시게.”

연신독은 숨이 멎는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 큰 시대를 열기 위해 희생당해야 하는 작은 인물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도 궁술 실력을 뽐내며 살던 그가 자신의 화살에 의해 죽다니 좋은 결말이 아니겠는가?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가 남아 있는 온 힘을 짜내 앞으로 움직였다. 그는 이 암살자를 잡고 싶었다. 그를 죽이고, 곧 자신의 앞에 들이닥칠 죽음도 죽이고 싶었다.

손가락 끝이 왕희의 허리띠에 닿자 그가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윽고 힘이 다했고, 작은 활잡이 연신독의 목에서 ‘꾸르륵’하는 소리가 나더니 고개가 옆으로 넘어갔다.

왕희가 일어나 오른손을 풀고는 손바닥에 난 상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자신의 몸에 꽂힌 화살 일곱 발과 온몸에 흐르는 피를 바라봤다. 그가 고통에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파 죽겠네······.”

그가 통증을 참으며 어둠과 바람 속에 숨어 원대 진영을 빠져나와 산 위로 돌아왔다. 푸른 깃발을 손에 쥐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몇 개월 뒤 범한은 이번 암살 과정을 알게 되고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십삼랑아, 이 용맹하면서도 바보 같은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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