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화 큰 세상을 위한 작은 희생 (1)
상문이 방으로 돌아오자 한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문아, 어제 돌아왔으면서 왜 벌써 여길 온 거야?”
이 남자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 범한이 포월루를 탐색하러 왔을 때 상문을 보호하겠다고 달려들었다가 범한의 일격에 처참히 날아갔던 남자였다. 그는 상문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 포월루를 상당히 혐오했다.
상문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향한 남자의 마음이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제사 대인이 추진하려는 중요한 일을 이 남자가 알게 할 수는 없었다.
“포월루의 총관리인인 제가 여기 아니면 어딜 가겠어요?”
남자가 탁자에 놓은 큰 그릇 안에 풍기는 옅은 냄새를 맡고는 헤헤 웃었다.
“나도 국수 한 그릇 말아줘. 먹지 못한 지 오래됐어.”
상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어요.”
남자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다른 사람한테는 해줬잖아.”
상문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국수를 말아 드려도 맛있게 드시지는 못하실걸요. 전부 먹으면 괴로워서 먹은 걸 후회하셨을 거예요.”
왕희는 지금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성문 앞 상점에 앉아 크고 동그란 눈으로 국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국수가 아무리 맛이 있다 하더라도 하루에 세 끼 연달아 먹는다면 토하고 싶어지기 마련이었다.
사실 그는 국수를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옆에 있는 차만 계속 마실 뿐이었다. 한 잔, 또 한 잔 무척이나 목이 마른 듯 연신 차를 들이켰다.
옆에 찻집 종업원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점쟁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점쟁이 짓을 하고 사나 하고 생각했다. 종업원이 보기에 그는 너무 가난해서 국수를 사 먹지 못하고 차만 연신 들이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
저녁 무렵 경도에 눈발이 그치기 시작했다. 왕희가 푸른 깃발을 들고 마른기침하며 성문이 닫히기 전 성을 빠져나왔다. 그는 오늘 가장 마지막으로 성문을 나왔다.
성문을 나와 북쪽으로 7리 정도 이동한 그가 산꼭대기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큰 바윗돌 위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이 덮인 가지를 바라본 뒤 고개를 숙여 눈덩이를 손에 쥐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런 뒤 푸른 깃발을 눈이 덮인 땅에 꽂고는 멀리 진영을 바라봤다.
경도 수비 원대 진영이었다.
왕희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왝!’하는 소리를 냈다. 연신 ‘왝’ 소리를 내던 그가 오늘 먹었던 국수와 배 속에 가득 차 있던 찻물을 모두 토해냈다.
온갖 것들이 뒤섞인 토사물이 깨끗한 설원 위로 쏟아졌다. 은은하게 나는 비린내가 구역질을 더욱 강렬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왕희는 더는 토를 하지 않았다. 그가 눈덩이를 베어 물며 자신이 토한 토사물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대단한 약물이군. 체내에 있는 정기를 하루 내에 이렇게 난폭한 경지까지 치솟게 만들다니.”
그가 고개를 저으며 감탄했다. 이 약은 범한이 상문을 통해 국수에 넣은 것으로 그를 도와주려고 넣은 것일 뿐,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이 약은 과거 북제에서 범한이 랑도, 하도인 두 9품 고수와 대적했을 때 먹었던 황색의 작은 환약이었다. 나중에 탈진 증세가 나타나는 것을 제외하면 큰 부작용도 없었다.
왕희도 이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에게는 맛 좋은 꿀이 나에게는 독약이 될 수 있는 법이거늘.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다만 범한은 좋은 마음에서 왕희가 성공할 가능성을 높여주려고 도와준 것이라고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고, 그가 무슨 계획에서 이러는 것인지도 왕희가 이해하는 일도 없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왕희는 옆에 세워 둔 푸른 깃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어둠을 보호막으로 삼아 경도 수비사 원대 진영으로 걸어갔다. 그가 죽이려는 목표는 줄곧 저 진영 안에 숨어 있는 중이었다. 다만 교관 신분이었기에 주변 방어가 그리 엄격하지는 않았다.
왕희는 정말 사람을 죽이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집에서 나온 이후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아왔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사랑했고, 모든 생명을 존중했다. 범한의 강력한 압박에 여러 차례 시도해 봤지만, 정말이지 자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을 암살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투항장은 오늘까지 연장되었다.
사실 범한이 오늘 국수에 넣은 재료는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왕 십삼랑이 더욱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흥분제를 넣은 것이다. 하지만 이 흥분제는 십삼랑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왕 십삼랑은 여전히 침착하고······ 자비로웠다. 경솔하거나 대담해지지 않은 그는 덕분에 궁수가 시력이 좋다는 사실과 어둠 속에서 궁술이 가장 뛰어난 역할을 발휘한다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지금 이 시간을 선택해 움직인 것일까?
원대 진영 구석에 위치한 병사 막사에는 연소을의 친아들인 연신독이 작은 가위로 조심히 화살 끝에 붙인 깃털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의 침착한 손길에 화살 끝에 붙은 깃털이 반질반질 윤이 났다. 어떤 일이든 잘하려면 먼저 연장을 예리하게 다듬어야 하듯이 궁수의 뛰어난 궁술 실력도 화살을 수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화살을 수리하는 속도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했다.
연 대도독은 아이를 발전시키려면 부모와 멀리 떨어뜨려놔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은 그는 산에서 사냥을 하며 목숨을 연명했고, 덕분에 강인하고 잔인한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산에 놀러 온 어린 장 공주를 만났고, 그녀의 눈에 들어 함께 산에 내려온 뒤 군대에 들어가 무수한 공을 세워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이와 같은 성장 배경을 지닌 그는 아이가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아야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연소을은 아들 연신독이 채 12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그를 집에서 쫓아낸 뒤 장 공주에게 부탁했다. 장 공주는 자신의 용맹한 부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연신독에게 다정하게 대하면서 혹독한 수련을 시켰고, 능력이 무르익자 몰래 경도 수비사로 보냈다.
경도 수비사.
그리고 그 경도 수비사는 지금 진씨 집안이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몇몇 고위 장군들과 장 공주의 심복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대도독의 아들 연신독이 경도 수비사에서 볼품없는 교관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연신독은 사람과 교류하는 것보다는 화살을 만지며 노는 걸 더 좋아했기 때문에 군대에서도 동료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직접 훈련한 부하들과 장 공주의 부하들과만 어울릴 뿐이었다.
그날 경도 교외에서 경묘 2제사 삼석 대사를 죽인 것이 연신독이 수행한 첫 임무였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후 발생한 일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에 줄곧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 두었던 자신감을 드러내며 아버지를 제외한 누구도 자신의 원거리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거라고 자부했다.
설사 9품 고수라 할지라도 불가능했다. 무기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격 범위를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전장에서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을 연소을은 계속해서 잊지 않고 아들에게 상기시켰다.
자신감 때문에 자만해지고 경거망동해진 그는 아버지가 강남로 흠차 범한과 함께 경도로 소환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양측이 여러 해 동안 이어온 싸움을 중단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는 연신독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숭배했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작은 범 대인을 남몰래 숭배하고 질투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천하의 젊은이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연신독도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작은 범 대인이 도대체 어떤 신통한 면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상대방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동시에 범한의 신통한 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범한에게 화살을 쏘는 건 정말이지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아버지나 장 공주가 뭐라 말하든 범한을 죽인다는 건 억누르기 힘든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는 군인이었기에 혼자서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큰 정세를 어지럽힐 수 있는 행동은 독단적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어른들의 분부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분부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분부를 내린 사람은 바로 그의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으며 그가 경외하는 군대 원로였다.
연신독은 군대 원로가 내린 분부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의심스러웠지만, 장 공주에게 알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이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홀로 나와 눈 내리는 밤에 화살을 쐈고, 그걸 푸른 깃발이 막았다.
이후 얼마간의 밤 동안 그는 범한의 수비가 물샐틈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눈이 내린 숲에서 몰래 주시했지만, 조금의 틈도 발견할 수가 없었고, 더욱이 살기를 내뿜는 흑기가 감찰원 마차 행렬 부근에서 언제든지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범한을 얕잡아 봤다는 걸, 감찰원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인정했다. 함부로 움직일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 선 순간 그는 곧바로 물러났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화살 한 발 날린 뒤 물러나서 산골짜기에서 경도로, 진씨 집안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아무런 꾸짖음도 듣지 않았다.
막사에 돌아와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군대 안 어른들은 암암리에 서로서로 돌보고 있었고, 자신이 경도 수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진 장군이 동의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진 장군이······ 어째서 자신에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을 시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 산골짜기에서 습격이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군인이었기에 정치 냄새를 민감하게 맡을 줄을 몰랐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진 장군이 끌어들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다르게 보면 장 공주가 진 장군을 끌어들인 것과 같은 셈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른들이 마침내 하나로 똘똘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르신들이 서로 말을 하지 않지만,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인질이었다.
연신독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런 역할을 맡은 게 싫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무리 잘난 작은 범 대인이라도 이런 강력한 압력 앞에서라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탁자에 내려놓고는 화살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옆에서 큰 활을 꺼내 손질을 마친 화살을 장전하고는 활시위를 당겨 막사 빈 곳을 향해 조준했다.
그가 팔을 살짝 오른쪽으로 이동해 화살 끝으로 막사 정문에 달린 두꺼운 휘장을 조준했다.
연신독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라.”
휘장이 살짝 열리더니 왕희가 겸연쩍은 얼굴로 들어왔다. 활의 위협에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연신독의 동공의 수축하였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신과 동년배로 보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본 그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앞에 있는 청년은 바로 눈 내리는 날 밤에 범한을 대신해 자신의 신출귀몰한 화살을 막아낸 푸른 깃발의 나그네였다.
더구나 놀라운 일은 그가 여기까지 아무도 모르게 왔다는 점이었다. 수비사에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지 않아서 보호하는 호위병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깊은 밤 원대 진영의 수비망을 뚫고 아무런 기척도 없이 자신의 막사까지 접근했다는 건 상대방이 상당한 고수라는 의미였다.
만약 이전에 연신독이었다면 지금 이미 화살을 상대방에게 쐈을 거였다.
자신의 공격하러 온 사람이라면 연신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앞에 기묘한 인물을 보고 있으니 연신독은 쉽사리 활시위를 놓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