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나의 사람, 그들의 사람 (1)
범사철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미리 말했으면······ 못 돌아오게 했을 거잖아.”
그 순간 범한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왕계년은? 상경성에서 너를 보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네가 돌아오는 사실을 나한테 알리지 않을 수가 있지?”
그가 콧방귀를 뀌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우를 바라봤다.
범사철이 눈동자를 두어 번 데구루루 굴리며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왕 대인은 아직 안 돌아왔어? 그를 따라서 관문에 들어왔는데······. 형님, 왕 대인은 아무 잘못 없어.”
범한이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예정보다 앞당겨서 도착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나한테 보고하지 않은 거지? 둘 다 나를 속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이거지!”
겁을 먹은 범사철이 벌벌 떨 뿐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형님이 정말 화가 나면 말이 아니라 폭력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돌아왔으면서 왜 집에 오지 않은 거야?”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범사철이 고개를 숙였다.
“어제 경도에 들어오면서 그 일을 들었어. 그래서 이때 집에 돌아갔다가는 형님 골치만 썩일 것 같아서······. 게다가 조정은 아직도 조사하고 있지 않다면서? 나라도 포월루에 머무르면서 정보를 알아보면 형님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사실 이 말은 범한이 방 밖에서 몰래 엿들을 때 이미 들었던 내용이었지만 동생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욱더 감동이었다. 그가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골치 아플 게 뭐가 있다고? 폐하가 네 일을 모르시는 것도 아닌데 누가 뭘 할 수 있겠어? 좀 있다가 나랑 같이 집에 가자. 포월루 정보가 필요하면 내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면 되는 거야. 너는 장사 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가 눈을 부릅뜨고 아우를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아마 곧장 집으로 가지 않은 걸 내가 혼낼까 봐 내가 기분 좋아할 말들을 늘어놓는 거겠지. 하지만 부모님의 심정은 생각하지 않은 거냐. 1년여 동안 새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그리워하셨는데. 그러니까 오늘 새어머니가 혼내시면 막아주지 않을 거야.”
범사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형님이 무서워서 집 앞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한 거라고!’
“또 키가 컸구나.”
범한이 대견해하는 눈빛으로 아우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1년여 동안 못 본 아우를 보니 마음이 감격해졌다.
“북제에서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나 보네.”
긴장이 풀린 범사철이 그동안 힘들었던 점과 미래 형수에 대한 고자질을 하려 하는데 중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온화하고 조심스러운 게 마치 비통에 젖은 울음소리 같았다.
범한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농담은 해도 비통한 척하지는 마십시오.”
왕계년이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40세의 나이에도 14살 아이처럼 민첩하고 겸손하게 행동했다. 범한을 힐끔 쳐다보는 그의 떨리는 눈빛에서 두려움이 드러났다.
범한은 오랜만에 자신의 심복을 만나 더없이 기쁘기는 했지만, 그가 범사철을 경도로 데리고 왔으면서 그 사실을 숨긴 채 일절 보고하지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화가 치솟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계속 범사철을 향해 말했다.
“네가 경도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비밀로 할 수 없을 거야. 상경에서 안전하게 위화 금의위의 보호를 받지 않고 경도로 돌아왔으면 자신의 안전에 더욱 신경을 쓰고 조심해야지. 오늘처럼 길거리를 돌아다녀서 되겠니? 위장을 했더라도 경도에는 네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그리고 네가 데리고 다니는 그 수행원들이 북제 고수들인 건 알겠는데······.”
아우의 조심성 없는 모습에 화가 복받쳐 오른 그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허리에 그렇게 곡도를 차고 다니면 장님이 아닌 이상 모두가 북제 사람인 걸 알아챌걸······. 경여당 대행수들도 인정할 만큼 장사에 천부적 자질이 있는 얘가 왜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는 꼼꼼하지 못한 거니?”
옆에 있는 왕계년은 대신 뭐라고 해명을 해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입만 벙긋거릴 뿐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범사철이 그런 그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북제 상단의 신분을 이용하려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범한이 다시 큰 소리로 야단쳤다.
“제멋대로 돌아왔으니 어떻게 돌아다니든 네가 알아서 할 문제이긴 하지.”
수세에 몰린 범사철은 물끄러미 형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무슨 꾀가 생각난 듯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형님도 제멋대로인 건 마찬가지잖아. 산골짜기에서 중상을 입은 형님을 아버지께서 집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걸 허락하실 리가 없는데······ 거리에서 나를 어떻게 본 거야?”
당황한 범한이 곧바로 온화한 목소리를 꾸미며 말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1년 넘게 못 본 동생을 다시 보니 좋구나.”
그러자 범사철이 한숨을 쉬며 범한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올해 하반기에는 장사에만 신경을 쏟았어. 북제 사람들과 이익을 두고 흥정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형님은 북제에 처음 도착해서 몇 개월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범사철이 살을 에는 듯이 추웠던 눈 내리는 겨울밤과 큰 맷돌, 당나귀, 콩 등 당시의 참혹했던 장면들을 떠올리고는 진저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그건 사람의 삶이 아니었어······.”
아우의 말을 듣던 범한이 찹찹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아마 해당은 이미 상경성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범한이 피식 웃으며 범사철에게 물었다.
“설마 그녀가 상경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도망친 건 아니지? 담이 그렇게 작아서 되겠어?”
범사철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댔다.
“형님, 이 세상 모든 남자가 형님처럼 대담한 건 아니라고······ 해당타타처럼 성질 사나운 여자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아.”
진저리를 치는 아우의 모습에 범한이 큰 소리로 웃으며 그동안 북제 생활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두 사람은 일 때문에 쉴 새 없이 편지를 주고받아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우의 입으로 직접 상경성 안에서의 생활과 어린 나이에 상경성 왕부에 손님으로 초대된 배경을 들으니 상당히 재미있었다.
더구나 범사철이 장영후 집을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 듯이 드나들며 그와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범한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자신을 이어서 아우까지 술고래인 장영후를 상대해 주다가 술독에 빠져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상경에 있는 술고래를 떠올리던 그는 문득 지금 자신의 옆에서 숨죽인 채 있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떠올랐다.
이미 기분이 많이 좋아진 범한이 왕계년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물었다.
“왕 대인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하지만 범한을 아는 사람이라면 작은 범 대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을 때가 바로 가장 화가 복받쳐 올랐을 때인 만큼 절대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범한의 심복 중의 심복인 왕계년은 그의 성격과 버릇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만큼 그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를 보자마자 마음이 쿵 내려앉으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인,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
“언제 도착했습니까?”
질문하면서 범한이 옆에 있는 찻잔을 들어 차를 두 모금 들이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찻잔에서 옅은 연지 향기가 나는 걸 맡고는 석청아가 이미 마신 잔이라는 걸 알고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슬며시 동생의 잔과 바꾸며 물었다.
“그리고 네가 데리고 간 여자는 어떻게 됐어?”
범사철이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상경성에서 매일 같이 있으니까 싫증이 나더라고.”
범한이 아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16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이미 혼인한 중년 남자처럼 말하는군.’
하지만 범사철이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기생집을 열어 여자애들을 기생으로 만들어 손님을 받게 한 경력이 있었다. 그런 걸 보면 그는 여자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어서 왕계년도 범한의 질문에 대답했다.
“도착한 건 어제 도착했습니다. 감찰원에 계시는 언 대인에게 미리 보고했더니, 대인께서 부상을 당해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급히 찾아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왕계년에게 물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계시겠지요?”
왕계년이 허리를 숙이며 빙그레 웃었다.
“대인의 자리를 물려받아 1처의 수장이 되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저는 못 합니다.”
당황한 범한이 소리쳤다.
“원장 대인께서도 왕 대인이 그렇게 말할 거라 그러시더군요. 하지만 여덟 처 중에서 한 곳의 수장이 되는 건 좋은 일입니다. 대인이 맡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안심을 하겠습니까? 북제에서 1년 반 동안 있으면서 1처를 맡을 만한 경력을 쌓은 대인이 맡지 않는다면 감찰원 내부에서 다른 말들이 나올 겁니다.”
왕계년이 잠시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목 대인이 1처에서 잘하고 계시니 저는······.”
그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 아내와 딸을 부양해야 하는 저는 평생 감찰원 안에서 그럭저럭 연명하며 사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대인을 만나 예상치 못한 위험한 일들을 몇 년 겪다 보니 이제는 대인 옆에서 일하는 게 가장 편합니다.”
“계속 내 옆에 붙어 있겠다니······.”
범한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사실 그도 왕계년이 계년조를 관리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근 2년 동안 계년조는 등자월이 담당하다가 이후 소문무가 관리했고, 최근 6개월 동안은 홍상청이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 세 사람 모두 능력이 출중하고 충성심이 깊었지만······ 범한은 과거 경도에 맨 처음 왔을 때처럼 즐겁지 않았다.
그가 왕계년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제 옆에 있으면 위험한 일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번 산골짜기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는걸요.”
방안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왕계년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대인을 보좌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코도 예민하고 달리기도 빠릅니다. 6처 검수들의 능력도 출중하긴 하지만 사건이 생기기 전에 미리 감지하고 방지하는 건 제가 더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을 손가락으로 돌리면서 앞으로 계획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왕계년은 겉으로는 허술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제 일을 처리할 때만큼은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는 1여 년 동안 북제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범한이 신경 쓸 만한 일을 만든 적이 없었다. 알아서 북제 황실, 금의위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었고, 과거 언빙운의 신분이 노출되면서 침체 상태에 있었던 6처 북제 첩보망에도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강남 황실 금고와 북제의 밀수에서 범한이 북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훤히 알고 있는 건 전부 지금 앞에 있는 빼빼 마른 남자 덕분이었다.
이와 같은 결과들은 왕계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증명해 주었다. 이처럼 묵묵히 최선을 다해 일하는 그는 범한이 경도로 와서 처음 발굴해낸 보석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그에게 1처를 맡겨 자신을 대신해 경도 백관들을 몰래 조사하게 함으로써 절체절명의 순간에 믿을 수 있는 심복들을 찾아내 주기를 바랐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맡을 능력을 가진 왕계년이 그저 자신의 옆에서 계년조를 관리한다는 것은 범한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왕계년의 입장도 단호한 만큼 무턱대고 강요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