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3인의 심사숙고 (2)
경도에 한겨울이 찾아왔다. 비록 아직 제일 추울 때는 아니지만 하늘에서 큰 눈이 여러 차례 내려 민가며 담벼락이며 할 것 없이 눈이 쌓이고 온 경도가 추위에 휩싸여 있었다. 황궁의 붉은 담벼락도 눈을 맞고 수분기를 머금어서 그런지 그 색이 더욱 진하게 변해 있었다.
원래 붉은색이었던 담벼락의 색상이 거무칙칙하게 바뀐 것처럼 위대한 경국 황제 폐하의 마음도 음울하고, 어둠침침해져 있었다. 그리고 조정 문무백관도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범한이 자객의 급습을 받은 소식이 돌자 온 경도가 술렁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세한 내용까지 알게 된 사람들은 군 내 유력 인사가 가담했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가장 엄격히 통제하는 군대에서 문제가 터졌다는 사실이 생각날 때마다 문무백관들은 감히 입도 뻥끗 못 하고 조용히 경계만 할 뿐이었다.
연일 열린 소조회(小朝會)에서 가장 많이 논의 된 건 정사(政事)를 제외하면 범한이 자객의 급습을 받은 사건이었다. 조사에 앞장을 선 건 감찰원이었고, 대리사와 추밀원의 협력도 일찌감치 시작된 터였다. 그런데 200명의 머리를 그림으로 그려 맞춰보기까지 했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감찰원에서 데려온 생존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중이라 일단 그에게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섯 개의 수성용 강노와 매복자들의 착장 상태 말고는 실마리가 없어 자객의 흠차 대인 급습 사건은 한 치도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낯빛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조회에 참석한 대신들은 다행히도 황제 폐하 눈에 깃든 노기가 갈수록 짙어지는 걸 알아챘다. 한데 그 노기가 언제 분출되어 자신들을 재로 만들어버릴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작은 범 대인은 작년에 강남로 전권 흠차로 임명된 후 급히 경도를 떠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북제 쪽에서 흘러나온 소문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와 작은 범 대인간의 은밀한 관계를 직접적으로 까발리고 있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에 경도의 정세가 출렁이는 걸 막기 위해, 황족의 체면 유지를 위해, 경국 조정을 그 난처한 비밀 속에서 빠져나오도록 하기 위해······ 황제 폐하는 작은 범 대인을 변장을 시켜 강남으로 내쫓은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강남으로 내려간 후 굉장히 많은 일들을 처리했고, 이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황실 금고를 손보고, 입찰을 주관하고, 강 제방 공사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범한은 반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리저리 조화를 부려 몇 년 동안 텅 비어 있던 경국 국고 문제를 해결해 버렸다. 그리고 할머니를 만나 뵈러 고향으로 가던 중에는 교주의 쥐새끼를 말끔히 청소해 버리기도 했다.
이에 교주 수군 부장 당효파는 일찌감치 경도로 압송되어 진술서를 썼고 꼼짝 없이 죄가 인정되어 가을에 참형에 처해졌다.
강남 국고에 있는 은전을 경도로 이송시키고, 자금 여력이 생긴 조정에서 대대적으로 제방 보수 공사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이재민 구제와 세금 감면에 나서고. 이 모든 게 범한이 경국 조정에 세운 공로였다.
대신들이 봐도 저런 인물은 강남에만 박아 둘 수 없었다. 그러니 범한은 언젠가는 경도로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더군다나 황제 폐하는 1년 정도면 소문이 흐지부지될 거라고 생각하실 게 뻔했다. 그러니 경도의 세력들은 강남으로 쫓겨 갔던 황제의 사생아가 정당하게 조정으로 돌아오는 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작은 범 대인이 경도로 업무 보고를 하러 돌아오는 도중 암살자들의 급습을 받은 것이었다.
이는 흠차 대인, 그리고 황제의 자녀를 급습한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조정이 설정해 놓은 한계선을 건든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확실하게 조사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황제 폐하의 경국 통제력이 과거만 못하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
황위 계승권 싸움이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이는 곧 신호였다. 바로 바닷속 수많은 상어들에게 거대한 고래가 피를 흘리기 시작했으니 뜯어먹을 때가 왔다고 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사건은 시종일관 오리무중이었다. 오랫동안 들여다봐도 그 속에 숨은 걸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만약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진노하신 황제 폐하께서 앞뒤 재지 않고 엄중한 처벌을 내리실 수 있었다.
조정 신하들 중 자중하고 있는 이들은 위와 같은 국면을 가장 꺼리고 있었다. 이들은 황제 폐하께서 범한을 아끼는 마음에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체면 불고하고 무차별 공격과 무제한 징벌을 내리시다 경국을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황제 폐하, 심사숙고하여 주십시오!”
문관 대열에 서 있던 나이 많은 신하가 옆으로 나와 용상 아래에 꿇어앉아 침통하게 아뢰었다.
경국 황제가 무겁게 내리깔려 있던 눈꺼풀을 들었다. 남쪽에 내린 눈이 재해 수준으로 심각해지고 있어 최근 며칠 동안 황제에게는 각로와 각주에서 보낸 상주문이 눈발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조정에 은전을 달라고 손을 내밀거나 출정에 관한 내용, 그게 아니면 내년에 세금을 감면해 달라는 앓는 소리였다.
‘감면이야 해줄 수 있지. 그자 말도 일리가 있어. 토지를 가지고 은전을 거둬들인다 해도, 땅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경작해도 은전 부스러기조차 얻을 수 없잖아. 은전이란 건 그나마 물건을 팔아야 챙기기가 쉬워. 안지가 강남에서 조정으로 많은 은전을 많이 보냈으니, 조정도 각 군의 농지 생산물에서 나온 소득에 대해 급히 은전을 거둬들이지 않아도 돼. 그런데 설청이 항주에서 구원 요청을 보내다니, 설마 올해는 강남에서도 대설로 피해를 보게 되는 건가?’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재작년 가을에 홍수가 들어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고 백성들의 가옥과 논밭이 훼손되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1년 남짓 지나서야 조정도 한숨을 돌리고 다시 힘을 비축할 수 있게 된 건데. 그런데 또 갑자기 대설로 인한 재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천자의 체면을 이리도 살려주지 않으시다니.
‘한데 듣자 하니, 강남 항주회가 겨울 폭설로 인한 재해를 미리 예측해 적지 않은 준비를 해놨다고 했어. 필경 민간 조직이 관(官)보다 훨씬 신속하게 재난 지원에 들어간 것이야. 매번 이 일이 거론될 때마다 모후의 미간에도 웃음꽃이 피잖아. 모후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니 백성들이 처참한 상황에 처하는 걸 원치 않으셔서 그래. 항주회는 어찌 되었든 황궁 귀인들이 돈을 추렴해서 만든 걸로 되어 있으니, 황궁 내 아낙들도 자랑스러워하는 걸 테고.’
황제가 기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신아가 이번 일에 참으로 많이 신경을 써 놓아서였다. 그리고 황궁은 그 아이에게는 좁은 곳이었다. 상공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나쁜 쪽으로 물들 줄 알았는데, 어엿한 군주로서 그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니.
황제는 정신이 확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데 생각 중이던 내용이······ 그 젊은이와 관련 있는 것이기는 했어도, 황제는 일단 얼떨떨했다. 그래서 웃으며 되물었다.
“심사숙고라니?”
* * *
대전에 꿇어 앉아 있는 이는 문하중서의 서무 대학사였다. 서 대학사는 연장자라 황제로부터 제법 존중을 받고 있었고, 또한 간신(諫臣)의 모습으로 벼슬 생활을 해온 터였다. 이에 앞서 흠차 자객 사건을 조사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자 그만 홀로 앞으로 나와 황제의 의견에 반박을 한 것이었다.
대신들은 황제 폐하께서 지금 화가 나 계실 거란 생각에 모두 겁을 집어 먹고 있었다. 그래서 과감히 직언하는 서 대학사도 말을 꺼내기 전에 평소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예를 올리는 대신 아예 무릎부터 꿇고 본 것이었다.
그런데 용좌에 앉아 계시는 황제 폐하께서 자기가 한 말을 제대로 못 들으신 게 아니라 그냥 정신이 딴 데 팔려 계셨다니! 그로서도 의외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황제는 입가에 살며시 웃음까지 짓고 있었고, 그 모습은 신하들의 눈에도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이에 대신들은 속으로 구시렁댔다.
‘황제 폐하께서 대체 무슨 생각 중이시기에 저리 즐거워하실까? 설마 문무백관들의 짐작만큼 진노하신 건 아니었던 거야?’
그럴 리가. 대신들이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사생아인 범한을 제일 총애하신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대신들은 황제의 웃음에 저 나름의 신비하고 알 수 없는 의미를 부여하고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부디 심사숙고하여 주십시오. 수성용 강노의 일련번호는 정주에 속한 것이기는 해도······ 실마리가 너무······.”
서무 대학사가 순간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진짜 범인인 첩자가 일부러 뒤집어씌운 기미가 역력하옵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 부디 심사숙고하시어 앞서 내린 황명을 거두어 주옵소서.”
황제가 잠시 웃었다. 그제야 서무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챈 황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어나서 이야기하시오. 그리고 나이도 지긋한데 걸핏하면 꿇어 앉아 간언하지 좀 마시오.”
황제가 온화하게 말했다. 그 온화함에서는 마치 이번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은 자신감과 안정감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황제 폐하께서 조정의 통제력을 걱정하시는 줄 생각했던 대신들은 방금 전 장면에 말문이 막혀버려 자책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용좌에 계신 저 분이 누구였지? 경국 개국 이래로 가장 강한 군주시잖아!’
“짐이 섭중에게 경도로 돌아오도록 했네. 물론 업무 보고 같이 간단한 일 때문은 아니라오.”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턱수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흠차가 자객에게 공격당한 일에 그가 연루되어 있으니, 당연히 해명을 해야 하지 않겠나. 섭씨 가문은 대대로 나라를 위해 변방을 수호해 천하에서 공을 세우고 있지. 그러니 짐이 그를 의심하는 일은 없네. 다만 이번 일은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하니, 명확히 해명할 할 필요는 있겠지.”
서무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고는 곤란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호 대학사의 부축을 받으며 대열 안으로 돌아갔다. 서무는 조금 전 황제 폐하께서 섭중을 경도로 돌아오도록 했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 화가 너무 많이 나셔서 섭중을 잡아다 하옥하고 자기 사생아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려는 거라고 말이다. 이에 너무 놀라 간언을 하려다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자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서무는 문신이었지만 조정에 있은 지 오래되어 건국한 지 100년도 안 되는 나라에게 군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산골짜기에서의 급습 사건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함부로 군을 모욕하면 조정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기에 두려웠다.
이렇듯 서무 대학사는 오로지 경국 생각뿐이라 황제의 말에 마음을 놓았다. 한편 황제의 이번 말은 다른 신하들 귀에는 곱씹어볼 만한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황제 폐하, 섭씨 가문에게 왜 갑자기 이리도 온화하신 것입니까?”
지난 2년 동안 황제는 섭씨 가문을 그다지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와 갑자기 따뜻해진 황제의 태도에 많은 대신들은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른바 제왕의 위엄이란 생각을 통제하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신하들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고, 모두 바닥에 바짝 엎드려 ‘황제 폐하 영명하시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등 운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