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3인의 심사숙고 (1)
섭경미와 범한 그리고 오죽을 빼고는 누구도 그 상자의 진면목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는 것도 이 세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거에 경국의 두 친왕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노인들은 그 상자가 얼마나 가공할만한 것인지 잘 알았다. 특히 구체적으로 아는 게 없어 오히려 그 상자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괴이할 정도로 신비하게 생각했다.
현 세계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존재이다 보니, 어찌되었든 무한한 상상력이 가미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진평평과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범한이 어렸을 적 담주에 있을 때 비개가 오죽에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범한이 경도로 온 후에도 그런 문제에 직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평평은 생각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산골짜기에서 급습 받았을 때 매우 위험했는데 범한은 대체 왜······ 그 상자를 쓸 생각을 않은 걸까?’
그리고 상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범한의 헛소리는 노련한 진평평에게는 절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진평평은 범한의 말을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은 섭씨 아가씨가 그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섭씨 아가씨는 변고를 당했을 때 그 상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상자가 태평 별궁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사건 발생 후 진평평은 태평 별궁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지만 상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한데 초월적인 경지에 있는 사물은 아무렇게나 두어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상자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오죽 뿐이었다. 그리고 범한이 자라 경도라는 험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도록 하고, 또 자신이 다쳐 범한 곁에 있을 수 없을 때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라도 오죽은 범한에게 그 상자를 휴대하도록 할 게 뻔했다.
이는 진평평이 추리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의 추리는 실제와 상황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진평평이 추리한 것 중에서 틀린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이는 그와 황제가 상자를 직접 본 적이 없어 상자의 무게며 크기를 전혀 알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 범한은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그것을 휴대할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주의로 산골짜기에서 급습을 당할 때 그 상자가 대체 어디에서 표류하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였다.
늙은 절름발이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범한이 간절해 보이게 두 손을 펼쳐들고 말했다.
“그 상자란 게 뭔지 정말로 모릅니다.”
범한은 그 비밀만큼은 어떻게든 지키려 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노인이 무언가를 눈치챘을 지라도 그는 부인해야 했다. 자신이 상자를 지니고 있다는 걸 황제가 알아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사실이 탈로난다면 황제는 고수(高手)도 죽일 수 있는 신비한 보물을 아들이 지니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 후 황제는 자신이 갖겠다고 할 것이었다. 그러니 범한은 아예 처음부터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사실을 부인해야 했다.
진평평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는 녀석이 제 몸을 지킬 보물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오죽 아저씨, 그리고 그 기묘한 상자가 대인께서 계산에 넣지 않은 두 가지였군요. 그렇다면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진평평이 범한을 비웃는 듯 바라보았다.
“세 번째는 무척 간단하단다. 감찰원 마차가 너 대신 막아줄 줄 알았다. 그리고 너와 그림자의 능력이면 눈 쌓인 숲에 들어가도 혼자서 거뜬히 도망갈 거라 생각했지. 상처는 좀 입겠지만 지금처럼 다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구나······. 감찰원에서 지낸지 꽤 되었으니 당연히 잘 알 거다. 고수와 자객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삶을 살고 있지. 고수 하나를 급습해 죽이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자객을 급습해 죽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야······. 그런데 감찰원 사람 외에 몇몇을 빼면 네가 9등급의 자객이란 걸 아는 사람이 없어. 간과했던 부분이라 한다면 네가 그렇게나 멍청한 짓을 하리란 걸 간과했다.”
진평평의 얼굴에 살짝 노기가 어렸다.
범한은 살짝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냉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눈 쌓인 숲으로 들어가 그 거대한 쇠뇌를 제거한 걸 지적하시는 건가요? 그게 멍청한 짓입니까? 제가 도망갈 수 있다 해도······ 제 수하들은 어쩌란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산골짜기에서 제 수하 중 근 스무 명이 죽었어요. 제가 대인을 냉혈한이라고 욕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대인께서는 제게 멍청한 짓을 했다고 욕하시는군요.”
“냉혈한?”
진평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설마 잊은 게냐? 우리 감찰원 관원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 차가운 피(冷血)다. 너의 그 싸늘함과 무정함은 대체 다 어디로 간 것이냐!”
범한이 살짝 주먹을 쥐고 소리를 낮추었다.
“그들은 제 사람입니다.”
“고작 부하일 뿐인데 희생시키는 걸 원치 않다니. 훗날 더 중요한 부하를 희생시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셈이냐? 너의 이번 행동은 너의 냉정한 겉모습을 걷어내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 걸 두고 멍청한 짓이라고 하는 거야. 강자는 몸만 강한 게 아니라 정신까지도 굳건하지. 나약함이란 감정은 너를 비명횡사하게만 만들 뿐이고 말이다.”
진평평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런데 그런 그의 눈빛은 매우 싸늘했다.
“그건 나약함이 아닙니다!”
범한이 곧장 반박에 나섰다.
“그건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고요!”
“너무 많이 신경 쓰면 안 되느니라.”
진평평이 하품을 했다.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는 안 된단다. 한데 네 어머니께서 분명 기뻐하시긴 하겠구나. 너를 살아가게 만드는 근원이 무엇인지 드디어 알게 되셨으니 말이다.”
범한은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느껴져 가슴이 떨렸다. 이에 바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저는 제가 신경 쓰는 사람만 신경 쓸 뿐입니다. 그래서 그 외에 사람은 아무리 많이······ 제 앞에서 죽어나간다 해도 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네 어머니는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신경을 쓰셨단다.”
진평평이 눈을 감고 계속 말했다.
“그 점에서는 네가 너의 어머니보다 총명하고 강하구나.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기껏해야 네 어머니보다 며칠 더 살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니까.”
범한이 손뼉을 치고는 온화하게 말했다.
“그런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일 좋은 건 모두가 백세까지 장수하는 거니까요.”
범한이 의자의 바퀴를 굴려 분위기를 전환에 나섰다. 그리고 발이 놓인 곳을 위로 들어 올리고 진평평 주위를 반 바퀴 돌았다.
범한의 그런 모습에 진평평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리 재밌느냐?”
“재미있습니다.”
범한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바퀴 달린 의자에 그리 오래 앉아 계셨으면서 어찌 지루함을 떨쳐낼 놀이 같은 것도 생각해 내지 않으셨던 겁니까? 이 점만 봐도 대인은 진지하기만 할 뿐 재미없는 분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두컴컴한 세계에 푹 절어 사시잖아요. 그렇게 한평생을 살면 무슨 재미가 있답니까?”
범한의 생각대로라면, 진평평은 일과 아예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 목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몇 년 동안은 깊고 큰 산으로 찾아 들어가 데리고 있는 아름다운 첩들과 함께 밀월기 인가 뭔가 하는 걸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그가 평생 몸 바쳐 온 재미없는 정치적 음모 짜기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평평에게는 그 일들이, 어쩌면 그 자체가 일이 아닌 놀이, 예술 행위 일 수 있다는 걸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내가 죽을 때······.”
진평평이 말라붙은 손가락을 치켜들고는 정원 공중에 대고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이 진원을 너에게 주마. 여기 있는 미인들은 데리고 있고 싶으면 데리고 있고, 싫으면 내보내거라.”
아마 이 노인은 이 미인들 때문에 생명이 어떻게 될 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장기간 함께 지내다 보니 원장 대인에게도 감정이란 게 조금 생겼을 수도. 이에 범한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씨 가문 문제는 어찌 처리하실 건가요?”
한동안 가만히 있던 범한이 갑자기 물었다. 진평평은 범한에게 전반적인 판세가 중요하니 지금은 무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범한 입장에서는 무언가 되돌려줘야만 했다.
진평평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모두가 너를 죽이고 싶어 해. 그러니 진씨 가문이라고 해서 절대 특별히 좋다거나 나쁜 건 아니란다. 네가 지금 움직이면 내가 만들어 둔 판세를 무너뜨릴 수 있어. 일단은 잠시 참거라. 그리고 나중에 그들이 어떻게 멸문을 당하는지 보거라. 그런 거야말로 정말로 즐거운 일이란다.”
범한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잘생긴 얼굴에 살짝 유감이라는 기색이 어리었다.
“또 참으란 말씀이십니까?”
“그 점은 네 아버지에게 배워야겠구나.”
진평평이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천하 사람이 모두 죽는다 해도 네 아버지만큼은 살아남았을 거다······. 그게 능력이 아니란 말은 꺼내지도 말거라. 살아남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능력이니까.”
범한이 문득 눈썹을 추켜세우고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젊은 사람이니 그 일과 관련해서는 제 태도를 밝혀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개와 고양이가 저를 죽이겠다고 덤빌 텐데, 그러면 귀찮잖아요.”
진평평은 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노인의 냉혹하고 매서운 눈빛을 느끼지 못했는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인 체면은 세워드릴게요. 진씨 가문은 건드리지 않고 대인이 원하시는 대로 덮어드리겠습니다. 대대적으로 모든 게 터져 나올 때까지 기다리죠 뭐. 하지만 제 수하들과 함께 묻게 다른 몇몇을 좀 죽여야겠습니다.”
진평평 얼굴에 있던 주름이 더 깊어지더니 그가 탄식했다.
“산골짜기 습격 사건과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느냐?”
“아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그들이 저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말이죠.”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왕 그렇다면, 그들과 이번 암살 사건이 아무 관련이 없어도 우선 그냥 몇몇을 죽여서 제 위신을 좀 세워야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저를 너무 질책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진평평이 반대의 의미로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연소을은 이번 일에 아예 개입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그와 원수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거냐?”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연소을의 아들이요? 반년 전에 그에게 아들이 있는데 정말 대단하다는 말씀만 해주시고, 그가 삼석 대사를 죽였다는 건 쏙 빼셨지요. 그리고 그 작은 활잡이 형이 경도 수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말 안 해주셨고요.”
진평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한에게 모든 걸 상세히 말해준 적 없는데 알고 있는 걸 보니 직접 조사해서 알아낸 것 같았다. 이에 뭘 더 말하기 뭐해 그냥 다음과 같이 천천히 말했다.
“네가 복수를 하려 해도······ 진씨 가문을 동원할 수는 없을 텐데, 설마 마구잡이로 죽일 생각이니?”
“진씨 가문은 이미 대인께서 장 공주 쪽으로 밀어 놓으셨잖아요.”
범한이 무례하게 지적했다.
“그러니 장모님께 칼을 휘둘러서 그쪽에서 진씨 가문을 대신해 화풀이를 감당하도록 할 겁니다. 뭐 문제 있습니까?”
“문제랄 건 없다.”
진평평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다만 그 방법은······ 이치에 안 맞는 행동 같구나.”
범한이 소리 내어 코웃음을 쳤다.
“대인처럼 이치를 따지시는 분 때문에 제가 더 긴말을 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젊은 사람은 원래 이치 같은 거 따지지 않고 막무가내인데, 설마 모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