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화 누가 나를 막을 수 있으리오?
감찰원에는 8대처 위에 군림한 힘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20년 전의 모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조사하고 있는 사건들은 아무 관련성도 없어 보였다. 경도 방어 전환 상황이며 과거 서쪽 정벌 당시의 후방 보급 상황, 황궁의 방어 상황, 심지어는 양식과 사료의 이동이라는 일까지 잡다하게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감님은 여러 해 동안 경계를 해왔기 때문에 곧바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공문서를 보던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가지고 누군가가 엮기 시작한다면, 결국에는 과거 태평 별궁에서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진상을 가리킬 수도 있을 터. 그때 진씨 가문은 친히 정복 활동을 나가신 황제 폐하를 위해 후방에서 경도의 안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 사건에서 진씨 가문이 맡은 불명예스러운 역할이 만천하에 공개될 수도 있었다.
그 존재는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하게 매우 조심스럽게 조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똑똑하게 조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겹겹이 쌓여 있던 거짓을 깨뜨리고 진실의 역사와 마주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과거의 일을 조사하고 다니는 건 누구일까?
8대처 위에 있는 감찰원의 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감찰원 사람들의 보고와 영감님의 판단은 그 힘 있는 존재가 범한이 친히 이끌고 있는 계년조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에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영감님은 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감님은 자신이 급습과 살인에 가담한 사실을 천하와 황제 폐하께 한동안은 감출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후 그 여인을 위해 미친 듯이 복수하러 달려드는 범한과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 그는 가장 간단하고, 거칠고 직접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살인이었다.
어쩌면 범한이 복수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에 관해 영감님이 잘못 예측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잘못된 예측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실패했다는 소식, 그리고 200명의 장정들이 참담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경국 군 측의 제1인자이자 추밀원 정사 진 영감님은 오늘 밤에 순식간에 열 몇 살은 더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20년간 말 못 할 걱정과 그 죽은 여인을 향한 경외심에 억눌려왔던 진씨 가문 영감님은 가장 직접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일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야 반백 년 동안 전장을 누비고 또 조정에서 아직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노 군인은 이제야 문제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많은 인력을 활용해 20년 전의 흔적을 찾고 있고, 동시에 감찰원 위에 군림하고 있는 자는 범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진평평이란 늙은 검둥개도 있었다.
그리고 상곤에게 섬을 도륙하게 한 건 강남을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상황을 이리저리 꼬아가며 진씨 가문을 진흙탕 속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이는 장 공주 그 미친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이었다.
바위에 앉아 있는 진 영감님이 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는 이제 일의 전후 사정이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은 범한, 황제 폐하, 동궁과는 모두 무관한 일이었다. 단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목적에서 출발해 자신의 진씨 가문을 이 일에 개입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감찰원 원장 진평평과 장 공주 이운예가 말이다.
경국, 더 나아가 온 천하에서 음모에 가장 능한 두 사람이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위해 장장 반년 동안 공을 들여 그들이 원했던 결과를 이룩해 낸 것이었다.
두 사람이 무심코 협력을 했으니, 아무리 거물이라 한들 진 영감님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버지, 날이 차니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진씨 가문의 2공자, 그러니까 현 경도 수비 진항이 아버지 곁으로 다가와 커다란 외투를 아버지에게 걸쳐주며 공손하게 아뢰었다.
진 영감님이 고개를 돌려 아들을 잠시 바라보는데 순간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자신은 늙은이고 아들은 아직 서른 살 정도인데. 자기가 죽고 나면 진씨 가문의 존엄과 지위를 저 아이가 지켜나갈 수 있을는지.
“큰 녀석이 살아 있으면 좋으련만.”
진 영감님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 충동적이었던 큰아들 생각이었다. 그 아이의 성정이 그리 거칠고 사납지 않았다면, 군에서 병사들이 병란을 일으킨 걸 틈 타 교관이 그 아이를 죽이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면······ 내가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겠지?
진 영감님이 차분하게 바위에 앉더니 웃기 시작했다. 노인의 웃음은 평온하고 온화해 보였다. 모든 격정적인 감정은 일찌감치 벗어버린 사람처럼 그에게는 세상을 통찰하는 평온함만 있었다.
솜을 넣은 도포를 입고 있는데 거기에 커다란 외투까지 걸치니 좀 부해 보였다. 한데 영감님은 몸집이 크고 키가 컸던지라 그 모습이 절대 거추장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려무나.”
영감님이 양손으로 뒷짐을 지고 눈과 물이 뒤섞여 있는 채소밭 앞에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어 이미 혼탁해진 눈으로 구름이 지나가면서 빼꼼 고개를 내민 겨울 달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늙은 얼굴에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패기가 떠올랐다.
진항이 산골짜기에서의 계획을 알게 된 건 어젯밤이었다. 그때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아버지께서 범한에게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하신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진씨 집안의 계승자로서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래도 그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족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범한이라는 버거운 적에게 도발하다니.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행동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자기 아버지께서 그런 계획을 짜셨다는 건 분명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 믿어서였다. 더군다나 그는 아버지의 아들인 동시에 군인 가문의 아들이었다. 군에서의 태도에 길들여져 있던 그로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진씨 가문에서 영감님은 통수권자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아래에 있는 장수였으니까 말이다.
짧게 정리하자면, 명령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설명 따위는 필요 없던 것이었다.
진항도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아버지께서 산골짜기에서 패했음에도 전혀 걱정하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범한은 조정에 너무 많은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경도로 돌아오는 길에 암살을 시도할 수 있는 세력은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세력 중에서도 진씨 가문은 범한을 암살하러 나설 가능성이 가장 적은 쪽이었다.
진항조차도 자기 아버지께서 왜 범한을 죽이려 하시는 건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 조사하러 나선 조정 관원들은 오죽할까.
더군다나 자신은 진씨 가문 사람이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의심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아무 증거가 없으면 의심만으로는 자신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 * *
“조정 내 대군 다섯 중에 우리 진씨 가문이 하나를, 섭씨 가문이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영감님이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만약 네가 제왕이라면 이런 상황을 그대로 놔두겠느냐?”
진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발아래에 있는 질척해진 흙만 주시했다.
영감님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황제 폐하께서는 용납하실 게다. 황제 폐하께서는 야심이 있으시거든. 그래서 조용히 십여 년을 기다리셨어. 북쪽의 대머리가, 동쪽의 백치가 죽을 때만을······ 아니면 늙을 때만을 기다리고 계셨지. 그러니 우리 진씨와 섭씨 가문도 잠시 그대로 두신 거란다. 훗날 천하 정복에 나섰을 때 그들과 싸울 장수들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영감님이 미소를 지었다.
“이 아비도 과거에는 최고의 명장수라 불렸지만, 지금은 이렇게 늙어버렸구나. 지금 최고의 명장수는 당연히 북제에 있는 상삼호다. 우리 경국에는 1황자 마마와 소을이가 있군. 섭중은 나보다는 나이가 한참 어리다만 오랫동안 경도 수비를 지낸 탓에 일찌감치 과거의 기세를 잃어버렸지. 하지만 아무도 생각 못 하는 게 있는데······ 천하에서 가장 대단한 장군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황제 폐하시란다.”
진항은 계속 침묵했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의 말에 십분 동의했다. 그도 군인이니 경국의 모든 군인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황궁 깊숙한 곳에서 칩거 중이신 황제 폐하를 진심으로 경외하고 숭배했다. 비록 황제 폐하께서 십여 년 동안 군을 이끌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황제 폐하는 세 차례의 북벌에서 대륙을 호령하던 북위를 산산조각내신 분이었다. 비록 아직 천하 통일을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신의 용병술’이라는 말은 그분을 위해 있는 수식어였다.
“섭씨 가문이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영감님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섭류운 그 늙은 놈 덕분이지. 그런데 우리 진씨 가문은 섭류운 같은 이가 없는데도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이유가 뭘까?”
진항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계셔서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정성스러운 찬사였다. 한데 진 영감님은 잠시 침묵만 할뿐 아들의 말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문하생들이 조정과 군 내부에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섭류운이 그의 절세 무공으로 섭씨 가문의 명줄을 유지시켜 주었다고 한다면, 진씨 가문은 자신의 은폐 덕분에 경국에서 행복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그 모든 게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영감님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비록 이미 나이를 많이 먹고 병약한 몸이 되었을지라도 그래도 계속 살아 나가야 했다.
“나는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경국에 충성했다.”
진 영감님이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지금껏 황제 폐하께 죄송한 일은 한 적이 없어.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절대 나를 홀대하시지는 못할 것이다.”
진항은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오늘 대낮에 산골짜기에서 흠차 대신 범한을 습격하셨는데······ 그는 황제 폐하의 사생아입니다. 설마 그게 황제 폐하께 죄송한 일을 하지 않은 거란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진항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진 영감님의 눈에는 군에서 50년 동안 쌓은 패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아비가 왜 지금 와서 손을 썼는지 너로서는 모를 게다. 너에게는 옛날 일을 말해주고 싶지 않구나. 한데 손을 써야 할 때가 언제인지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기는 했단다. 모두가 네가 손을 쓸 거라 예상하지 못할 때 손을 쓰거라.”
진 영감님이 고개를 돌려 자기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모두가 손을 쓸 가능성이 있을 때 손을 쓰란 말이다. 이곳 물은 너무 혼탁해서 우리 하나 더 끼어든다고 신경도 쓰지 않을 거다. 혼탁한 물 아래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우리는 안전할 수 있는 게지. 황제 폐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영명하시기는 하나, 그래도 깊고 깊은 황궁 안에 계시기 때문에 여러 일들에 대해 제일 먼저 정보를 얻기는 힘드시다.”
진 영감님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현 세상에서 나와 산골짜기의 일이 관련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은 딱 둘 뿐이란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두 사람은 황제 폐하께 그 말을 할 리 없지. 그래서 이번 행동이 실패로 끝나기는 했어도 누구 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한 차례 성공을 거둔 거란다.”
한동안 참고 있던 진항이 드디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두 사람은 왜 황제 폐하께 말하지 않는 겁니까?”
“늙은 절름발이가 처음부터 침묵했기 때문이란다.”
진 영감님의 입가에 조롱기가 담겼다.
“그가 침묵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번 산골짜기에서의 암살은 감찰원도 협조한 게 있어. 그런데도 그가 이번 사건을 밝혀낸다면, 황제 폐하께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