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배추 심는 영감님 (1)
오늘 밤 많은 이들이 추리에 빠져 버렸다. 대체 어떤 세력이기에 이리도 대담하게 나온 걸까? 그것도 감히 경도 외곽에서 천자가 총애하는 신하를 죽이려 하다니!
사람들의 시선이 장 공주에게 쏠렸다. 그 귀한 분만이 그 정도의 미친 짓을 할 만한 배포와 실력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성공하지 못했군.”
경도의 어느 그윽하고 조용한 왕부 안. 경국에서 가장 실력 있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긴 의자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의자에 놓인 바구니 난로에서는 열기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운예가 두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잔뜩 나른한 눈동자를 하고는 아랫자리에 앉은 2 황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한데 그 일은 본궁과는 무관하단다. 본궁이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거든. 범한과 맞서는 거면 쉬운 방법이 많아.”
2 황자는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사실 산골짜기에서 암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장 공주 짓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장 공주 정도만 부황의 눈치를 안 보고 그런 일을 할 패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이번 일이 할마마마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장 공주가 딱 잘라 부정하다니.
“물론, 본궁도 그 사람에게 감탄했어.”
이윤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른을 넘긴 나이건만, 이 아낙은 시들기는커녕 오히려 농염하기 이를 데 없이 활짝 핀 모습이었다. 그리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팔을 휘두를 때마다 풍류 가인다운 멋이 자연스레 배어 나왔다. 그런 그녀가 탄식했다.
“우리 사위가 죽어도 괜찮았을 텐데. 산골짜기에서의 암살이라. 간단하고, 거칠고 폭력적이고, 직접적인데다가 군인의 풍모까지 보이다니······. 마음에 들어.”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한데 2 황자가 무어라 맞받아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잡는 바람에 실내는 온통 무언의 탄성뿐이었다.
한참 후, 장 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리 해서는 사위를 못 죽이는데······. 범한의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2 황자와 장 공주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는 상대방의 눈에는 불안과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들의 눈은 범한이······ 정말 괴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운이 좋아도 그렇게 좋을 수 없는 괴물이라고. 어쩌면 모두가 범한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의 실력을 얕봤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들 높은 분들의 책상 위에는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사건의 세부 내용이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범한이 단 한 사람의 생존자만 남기로 모두를 몰살시켰고, 살아서 경도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모든 세력은 기겁한 상태였다.
심지어는 은근슬쩍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장 공주에게는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다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예전에 외양간 거리 사건이 없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저 그런 생각을 담담하게 할 뿐이었다.
* * *
“동궁과의 관계를 계속 잘 유지하거라.”
장 공주가 자기 아이를 타이르듯 2 황자를 타일렀다.
“동궁의 명의로 황태후마마를 설득할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2 황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속에 있던 강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질문을 던졌다.
“대체 누가 한 짓일까요? 진 원장이 갑자기 확 미쳐버리는 건 아니겠지요?”
“수성용 강노의 일렬번호 조사가 끝났단다.”
장 공주가 2 황자를 비웃었다.
“네 처의 친정집 물건이더구나.”
그러자 2 황자가 결연하게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섭씨 가문의 세력은 저 먼 정주에 있습니다. 그리고 2백의 강한 병사가 밤새도록 습격을 한다면 경도 수비와 감찰원을 모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수성용 강노 다섯 대는 더욱······ 황당합니다.”
“조정에서는 황당한지 여부는 상관 않는단다.”
장 공주가 비웃듯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와 감찰원은 화풀이를 한 거야. 출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섭씨 가문이 이유 없이 화풀이 대상이 된 거라고.”
2 황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고모께서 나서주세요.”
섭씨 가문은 비록 저 먼 정주에 있었지만, 현공 사당 사건 이후로 여러 번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군에서는 실력 있는 가문이다 보니, 2 황자와 일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2 황자는 범한 암살 사건으로 위기 국면이 도래하자 섭씨 가문에 다시 충격이 가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리고 장래에 있을 큰일을 위해서도 그는 섭씨 가문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신이 아니야.”
장 공주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천자의 분노잖니. 황궁 내 아낙 몇몇이 나서서 말한다고 그게 수그러들 것 같니?”
장 공주가 조용히 2 황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섭씨 가문은 일단 차치하고, 우선 너나 준비를 잘 해두렴. 우리 황제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아. 분명 화나셨을 거야. 더군다나 혹시라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시면, 어쩌면 여기저기 가랑비를 뿌려대며 모두를 불쾌하게 만드실 거야.”
2 황자가 고개를 숙였다. 많은 사람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할 테지만, 그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니까 말이다. 이에 그가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대체 누구일까요? 고모님······. 정말 중요한 일이니 부디 이 조카는 속이지 말아주시지요.”
장 공주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예쁘게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곡선 자체가 조롱기를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와 범한이 각자 다른 길을 간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야. 왜냐하면 내가 너를 보호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범한은 강남에서 이미 셋째를 보위에 올리겠다고 입장을 표명했어.”
장 공주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나 나나 산골짜기에서의 일은 우리가 한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단다. 그건 너무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왜 3 황자와 맞설 생각은 않고 범한만 죽이려 하는 걸까. 이번 습격은 그 의자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어. 오로지 범한과 관련 있다고 말할 뿐이지. 그런데 범한과 관련된 일이니, 군 측의 모 거물이 직접 나서기에 충분한 명분인 거지. 그리고 그 의자를 빼면, 옛날 그 여자 밖에 안 남는데, 그 군 측 거물이 왜 그 여자 때문에 범한을 죽이려 했을까?”
장 공주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범한이 나중에 보위에 오르거나, 아니면 셋째가 보위에 오르도록 도우면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있다는 건데······. 일단 뭔가를 아니까, 그 여인을 위해 그들 가족을 끝내버리려 하는 거겠지.”
그녀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보니, 그 군 측 거물은 과거 그 여자의 사망과 관련이 있었군.”
하나씩 분석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장 공주는 그저 천천히 말을 내뱉은 것뿐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원초적인 진상에 대단히 가깝게 다가가고 있었다.
“하온데······ 경도 피의 밤이라니.”
2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섭가 일에 참여했던 사람은 모두 죽지 않았던가요?”
장 공주가 활짝 웃고는 잠시 후 되물었다.
“황태후마마, 황후마마께서 돌아가셨니?”
장 공주의 미간에 갑자기 광기가 살짝 어렸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그 군 측 거물이 지금까지 광명을 누리며 살기는 했어도 과거 그 여인의 죽음이 그에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이런, 그에게 다시 탄복하고 말았네. 어렸을 때 느꼈던 것보다 더.”
2 황자는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는 고모가 탄복한 게 누구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속으로는 고모의 추리력에 경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사건의 진상이라면, 그가 봤을 때 고모는 대단히 민감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한데 2 황자는 그 점만큼은 확신할 수 없어 잠시 후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뗐다.
“하오나······ 소식에서는 범한이 경도로 돌아오는 길에 대도독의 아들이 이미 활을 한 발 쏘았다고 합니다.”
장 공주가 가볍게 웃었다.
“너도 잘 알다시피, 그 군 측 거물은 매일 집에 숨어 있어도 손만큼은 바깥으로 뻗고 있어. 연소을의 아들은 줄곧 그자의 숨겨진 수하였지. 그 거물도 황제 폐하께서 자신을 찾아낼까 두려워하고 있었어. 그러니 억지로라도 우리를 끌고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던 거고.”
2 황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범한이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군요. 부황께서 어찌 처리하실지 모르겠네요.”
“네 부황께 감사하렴.”
장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을 외로운 신하로 만들고 계시니까. 아울러 알게 모르게 모든 사람들을 우리 곁으로 밀어주고 계셔. 섭씨 가문만 해도 그래. 그 군 측 거물도 그렇고. 세상에나! 황제 폐하께서 내 것을 하나씩 하나씩 뺏어 내 사위에게 주셨는데. 더 좋은 걸로 하나, 둘 돌려주고 계셨었네. 세상 이치란 게 어쩜 이리 사랑스러울까!”
황실 금고, 최씨 가문, 명씨 가문, 심지어는 자신의 딸까지······ . 장 공주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살짝 비웃듯 말했다.
“나는 항상 그분을 경외해왔어. 그래서 그분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지.”
2 황자는 감히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분은 의심이 너무 많아.”
장 공주가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의심이 많은 사람이 필패하는 법이지.”
정국에 대한 판단, 명예와 이익에 숨은 함정을 파악하는데 있어 장 공주의 지혜는 남달랐고,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산골짜기에서의 습격 사건과 관련해 그녀도 표면적인 것만 맞추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가장 심층적인 원인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는 이번 습격을 주재한 군 측 거물도 모르고 있었다.
* * *
경도성 어느 곳에 자리 잡은 조용한 대저택 안.
이 대저택은 거리 절반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넓고 호화로웠다. 그리고 모든 게 의례에 따라 왕의 거처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의 정원 안과 밖에는 각양각색의 나무가 잡다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한밤에 그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거인에게서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나 고독하고 적막한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솜을 넣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자기 채소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노인은 솜을 넣은 신을 신고 있었는데 뒤축이 좀 닳아 있었다. 솜을 넣은 도포와 신발은 그의 소박하고 단출한 성정을 잘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오랜 시간 동안 군인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는 채소 가꾸는 걸 좋아했다. 특히 노년이 된 후에는 일터에 나가 앉아 있기보다는 집에서 채소밭을 가꾸는 걸 더 좋아했다. 이에 그의 취미 생활을 알고 있는 아들과 손자들은 희귀한 채소 종자를 많이 구해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은 심지 않았다. 오로지 배추와 무만 심었다. 배추와 무는 군에서 가장 많이 먹는 양대 채소이다. 그러니 그는 어리석은 정왕야와는 달랐고, 전원(田園)을 자신의 슬픔을 달래는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채소를 심는 건 단순히 습관이었다. 즉 그는 습관적으로 채소를 심고, 그 습관을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영감님은 들고 있던 국자를 채소밭 옆 돌 위에 내려놓은 후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앉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모습은 조금 힘에 부치는 듯했다.
눈이 내리고 난 후라 날씨가 추웠고, 채소밭에는 눈과 흙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 싹이 난 채소가 있을까? 그리고 또 굳이 물을 밭에 물을 줄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오늘 저녁, 그는 무의식적으로 또 나무 국자를 들고 밭에 깨끗한 물을 뿌려주었다. 마치 무언가를 씻어내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