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548화 (548/1,108)

548화 범한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범한이 다시 한번 무거운 어투로 위의 말을 반복했다.

범한은 감찰원 제사이다. 2년 동안 진평평의 고의적인 방기와 지원 덕분에 8대처 내에는 일찌감치 그의 사람이 생긴 상태였고, 계년조도 특수 부처가 되어 있었다. 1처는 범한이 수장으로 있었고, 4처에는 언빙운이, 3처에는 비개가, 5처에는 흑기의 무심이 범한의 사람으로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형과까지 자기 사람으로 두게 되었고, 6처에는 그림자가 있었으니······.

아무리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지금의 자신은 과거와 같은 외톨이가 아니었고, 감찰원의 전체 자원까지 이미 꽉 쥐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다. 감찰원에서 반역자가 나왔어도 범한 모르게 적에게 동조할 수는 없을 텐데.

그를 빼면 말이다.

바로 자신이 산골짜기에서 떠올렸던 그 사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무척이나 상냥하지 않은가. 양털 담요 위에 얹어 둔 두 손은 평온해 보이고, 비쩍 마른 불구의 몸인데도 매우 듬직하고. 그래서 자신이 어디에 있든 그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는 것 같아 무슨 일을 하든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 * *

“이 세상에는 그럴 리 없는 건 없단다.”

범건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옛날의 네 어머니를 지금의 너와 비교하면 어땠을 거 같으냐? 마찬가지였다. 왼손에는 감찰원을 오른손에는 지금의 황실 금고를 쥐고 있었고 뒤에서는 오죽이 지켜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네 어머니에게는 우리들도 있었고 남쪽으로는 천주 수군이 있었지. 지금 너와 비교해 어떤 것 같으냐? 그런데도 마지막은 어땠지?”

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갑자기 산골짜기에서의 일이 어쩌면 여러 해 전의 그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 아버지의 목을 자른 건 나다.”

범건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기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범한은 그런 말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혀 아버지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황후의 아버지를 아버지께서 직접 죽이셨다니!’

오늘 처음 듣는 말이었다.

범한은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경도 피의 밤은 섭가를 전복한 사람들을 향한 대대적인 복수였다. 과거 섭가는 튼튼한 기반을 닦은 곳이었는데도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고 말았다. 황제의 서쪽 정벌을 틈타 벌어진 일이라······ 경도의 권력자와 높은 이들이 얼마나 많이 가담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물망을 빠져나간 물고기가 분명 있을 것이고······ 심지어 원흉이 제거되지 않았어도 그다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다만······.’

범한이 침묵을 깼다. 얼굴에 결연한 기색을 담고 온화하게 말했다.

“아버지, 그만 말씀하시지요. 저는 원장 대인을 믿습니다.”

범한이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버님 말씀은, 실은 예전에 그분도 이야기해 주신 거고요······. 저도 과거 일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경도로 오기 전에 아버님과 원장 대인께서 서로 냉랭하게 지내셨고,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뭘 경계하고 계시는지 저도 잘 압니다. 다만 제가 아버지를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처럼, 저는 그분도 무조건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범한이 가볍게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동료를 의심하는 건 무서운 행동입니다. 어쩌면 아버님과 진 원장님이 서로 의심하도록 만들기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범한이 말에 무게를 실으며 계속 말했다.

“저는 제 안목을 믿습니다. 이런 안목이 있기에 저 자신을 속일 수 없는 거고요.”

범한의 눈빛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 범건이 웃으며 안도했다.

“인성에 대해 너는 그래도 믿음이 있구나······. 그 점은 네 어머니를 무척 닮았어.”

범한도 웃기 시작했다.

“몇몇 특정인에게만 그렇습니다.”

범건이 차분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

“우선 황제 폐하가 어떻게 처리하실지 그 결과를 기다리려고요.”

범한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조사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상대방은 정말 많은 걸 쏟아붓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본인에게 유리한 방법을 생각해 뒀을 것입니다.”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계속 말했다.

“가끔은 황제 폐하의 믿음이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건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군 측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계속 예전처럼 아무 걱정도 않으실까요?”

“조사를 했으니, 무언가 건지는 게 있을 게다.”

범건이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젊은 녀석이지만 젊은 혈기에 휘둘리지 않은 걸 알고는 기쁘고 위안이 되어 웃으며 말했다.

“수성용 강노에는 모두 일렬번호가 있단다.”

“한데 수성용 강노도 다른 곳에서 가져온 거라면, 엉뚱한 사람을 조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범건이 입가에 기이한 웃음을 드리우고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대로하셔서 사건 조사가 빨리 이루어졌고, 오늘 오후에 곧바로 소식을 받았단다. 산골짜기에는 모두 다섯 대의 수성용 강노가 있었다. 모두 황실 금고의 병 작업장에서 막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도로를 이용해 정주 방향으로 이동하던 건데······. 한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물건을 건네는 시기가 조금 늦어졌고, 우연히 네가 경로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발견된 거란다.”

“정주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섭씨 가문이 또 속죄양이 돼야 하는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그리 모질게 나오실 거라고요?”

“폐하께서는 이번 일이 수상쩍다는 걸 알고 계신다.”

범건이 말을 이어 갔다.

“한데······ 만일 섭가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거라면?”

“그러니 다른 증거가 필요한 거겠지요.”

범한이 자그마한 소리로 대꾸를 하고는 물었다.

“제가 추밀원으로 보낸 생존자는 나름 가치가 있을까요?”

“있단다.”

범건이 기괴하게 웃기 시작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수는 옛날에 2 황자에게 썼던 수와 같더구나. 증인을 상대방 관아로 보냈으니 말이다.”

범건이 아까보다는 조금 차분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한데 같은 방법은 두 번 쓰는 건 좋지 않단다. 적어도 추밀원은 이번에 네 계획에 말려들지 않았으니까.”

“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범건이 아주 옅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조상님 받들어 모시듯 그 생존자를 받들어 모셨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기라도 하면 황제 폐하의 질문에 답변할 수 없을 테니까. 추밀원에서는 곧바로 그걸 핑계로 들며 감찰원에게 조사를 떠넘겼다. 그리고 군 측이 혐의에서 벗어나야 하니 그자를 감찰원으로 보냈고.”

범한은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자 범건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

“한데 그자는 네가 추밀원에 던져놓은 것 아니니. 그러니 감찰원에서는 당연히 받을 수 없어 그자를 추밀원으로 돌려보냈고······ 추밀원의 그 투박한 사람들이 이번에 뻔뻔하게 구는 방법을 배웠는지 그자를 다시 추밀원으로 끌고 갔단다.”

줄곧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던 호부 상서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오늘 오후에 감찰원과 추밀원에서 그 생존자를 놓고 힘겨루기를 한 거란다. 서로 보내고 돌려보내기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자가 뜨거운 감자라도 되는 양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았지.”

오늘 급습을 당한 것 때문에 범한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데 아버지의 말에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이 눈앞에 훤히 그려져 이내 웃음이 터져버렸다. 경국의 권력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천하대도 위에서 두 관아가 서로 돼지고기를 주었다 돌려보내기를 반복했다니······ 그 군 측 인사는 자기가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평생 모를 테지.

“결국에는 어떻게 처리됐습니까?”

“결국에는 황궁에서 말이 내려왔구나. 감찰원 대감옥에 넣으라고 말이다.”

범한이 탄식했다.

“제가 오후 내내 자는 동안 경도에서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요.”

범건이 조용히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군대에게 습격당한 일은 경도 피의 밤이 이후 제일 큰 사건이란다······. 더군다나 네가 살아 돌아왔으니, 집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 오늘 밤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잠을 설칠는지.”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손을 쓸 생각이니?”

“직접 나서지는 않을 생각예요.”

범한이 자그마한 소라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들에게 뼛속 깊은 곳까지 고통 느끼도록 해줄 겁니다.”

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처리하거라. 다만······ 모든 군 측 인사들에게 밉보이지는 말고.”

“제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범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의 침실에서 떠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거라.”

* * *

이날 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마음이 심란해 잠에 들지 못하고 조용히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범한이 자객에게 급습을 당했다는 소식은 일찌감치 온 경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오늘 관례대로 열려야 할 대조회는 돌발 사건으로 중간에 툭 멈추고 말았다. 퇴청하는 대신들이 개인적으로 전해준 바에 따르면, 황제 폐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는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하셨다고 했다. 즉각 금군 대통령인 1황자에게 직접 나가보도록 명령했고,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에게 천자의 위로를 직접 전하도록 했다고 한다.

한데 황궁의 요 태감 말에 따르면, 황제 폐하께서는 어서방으로 돌아가신 후 관요(官窑)에서 나온 귀한 자기 찻잔을 깨버리시고는 한동안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다고 한다.

이에 황제 폐하께서 진노하셨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건 아니었다. 산골짜기에서의 일을 주재한 사람, 또는 몰래 그 일을 도운 사람만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으며 각자 집에 틀어박혀 대책이나 세웠다.

그런데 경도 외곽에서 감히 살인할 정도이다 보니, 그들에게는 이미 황제 폐하의 노기와 감찰원의 복수에 대응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그리 많은 역량을 투입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는데도······ 범한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외일 뿐이었다.

“그가 죽지 않다니!”

동궁의 태자 전하가 이를 악물고 옆에 놓인 발걸이 위의 천을 손으로 꽉 움켜쥐고 말했다. 천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든지 그 위를 수놓고 있던 꽃들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버렸다.

눈썹이 연하게 그려져 있는 황후마마가 차갑지만 기품 있게 태자 맞은편에 앉아 싸늘하게 말했다.

“체통을 지키거라. 언사도 조심하고. 범한은 현 조정 대신이다. 황태자 입장에서는 안도해야 옳거늘, 어찌하여 그리 실망하는 게냐!?”

태자가 싸늘하게 두어 번 소리 내며 웃었다.

“이곳은 동궁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 있는 이들은 본궁과 범한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안다는 뜻입니다.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가 본궁이 한 짓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왕 이렇게 된 판에 무엇 하러 어질고 인자한 척해야 한단 말입니까?”

황후가 차분하게 태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후 말했다.

“걱정 말거라. 황제 폐하께서는 너를 의심하지 않으실 게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애당초 그럴만한 실력이 없으니까 말이다.”

태자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제야 조정 내 세력 중 자기가 가장 약하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태자가 이 지경이 된 건 요 몇 년 동안 2 황자와 싸우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장 공주의 강력한 지원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꼽자면, 바로 범한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태자가 씁쓸하게 웃기 시작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군요. 모후의 말씀이 옳습니다. 본궁에게는 군대를 동원해 사람을 죽일 힘이 없습니다.”

“다만······.”

태자의 눈에 질투가 잠시 스쳤다.

“범한은 죽어야 했습니다.”

‘범한 이놈! 강남에서 명씨 가문과 재판장에서 싸울 때 하필이면 적장자가 천부적인 승계권을 갖지 않는다며 크게 떠들어대다니.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본궁이 모를 줄 아느냐? 황태후께서도 모르실 줄 알았느냐? 황태후께서는 벌써 화가 나셨구나.’

태자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세력을 향해 고마워했다. 범한을 암살하는 건 경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감히 못하는 일인데 그 일을 대신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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