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경도에는 별일 없었습니까? (2)
장수로 보이는 자는 침울한 표정으로 골짜기로 들어오더니 마차 옆에 앉아 있는 범한 앞에 멈추어 섰다. 멋지게 말에서 내린 그가 장검을 쥐고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었다.
“별일 없는가?”
범한이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어떤 거 같습니까?”
“대체 누구 짓이지?”
얼굴에 살의가 가득한 장수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말하기 시작했다.
“대인이 와주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경도 수비사 말고 다른 장수는 없었나 보죠? 제일 높은 지휘관께서 직접 구하러 오시다니 말이죠.”
산골짜기로 와 준 사람은 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바로 경도 수비이자 조정에서 제일 잘 나가는 군 측 실력자인 진항이었다.
범한이 살아서 농담까지 할 여유를 보이자 진항은 그가 이미 적을 다 처치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에 진항이 그제야 긴장을 놓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감찰원의 1급 위험 구조 신호이지 않나. 경도 사람이라면 자네가 곧 돌아올 거란 걸 알고 있었고. 그러니 자네란 건 금세 알 수 있었고······ 하도 놀라 직접 와봐야만 했네.”
진항이 소리를 억누르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죽었다면, 우리 경도 수비에 속한 많은 이가 자네와 함께 무덤에 묻혔을 거네.”
사실 진항이 산골짜기로 들어서는 걸 발견한 순간 범한은 마음이 놓였다. 진씨 가문이 아직 경도 수비를 맡고 있다는 건 황제 폐하께서 아직 경도 군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는 곧 경도에 아무런 변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경도에는 아무 일 없습니까?”
진항은 범한이 지금 무슨 걱정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바람조차 불지 않아 잔잔하다네.”
범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상한 일이군요.”
진항도 범한의 말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만약 경도에 바람조차 불지 않아 잔잔하다면······ 대체 누가 감히 황제 폐하의 진노를 무릅쓰고 용종(황제의 자식)을 죽이려 한 거란 말인가?
* * *
범한이 오늘 있었던 일을 진항에게 간략히 말해주었다. 너무 놀라 심장이 떨릴 지경인 진항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은 아직도 야심을 버리지 못했군.”
범한이 불쑥 진항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인은 경도 수비 책임자입니다. 그런데 경도로부터 이리 가까운 산골짜기에 이리 강력한 병력이 숨어들었는데······. 어찌 해명하실 겁니까?”
“해명할 도리가 없네.”
진항이 대놓고 말을 이어 갔다.
“그게 우리 문제거든.”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항이 말했다.
“돌아가세. 상처를 치료해야지.”
진항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 악랄하게 손을 썼군. 자네 부하들도 모조리 죽은 건가?”
“아니요.”
범한이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부하들은 모두 대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골짜기 옆 숲에서 십여 명의 감찰원 밀정들이 손에 쇠뇌를 들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진항 및 지금 골짜기에서 시체를 치우고 있는 경도 수비 부대를 차분하면서도 싸늘하게 주시했다.
진항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왜 그러지? 날 못 믿겠다는 건가?”
“지금 제가 누구든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범한이 조소하듯 말을 이어 갔다.
“제가 하마터면 조금 전에 귀신이 될 뻔했는데, 그 점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진항이 잠자코 고개만 가로로 내저었다. 그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 자그마한 쇠뇌로 나를 겨누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면, 그렇게 하게나.”
진씨 가문의 후계자가 차분하면서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정말로 자네 말대로라면, 이번 일은 군 측 세력이 개입했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우리 진씨 가문에서는 자네를 위해 나서줄 터이니 부디 믿어주게나.”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습니다. 그냥 함께 내려가시지요. 이 시체들은 그냥 여기에 내버려 둘 겁니다.”
범한의 차분한 얼굴 아래에 대체 얼마나 큰 노기가 숨어 있는지 잘 알고 있던 진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범한 발밑에 있는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인 암살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생존자인가? 황제 폐하께서 친히 심문하실 수도 있겠군.”
그러자 범한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이 골짜기에서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모두 제 겁니다.”
* * *
주군(州軍)의 주검은 일단 치우지 않았다. 순직한 감찰원 관원만 데리고 나왔을 뿐이었다. 또한 양쪽 숲에서 죽은 암살자의 시체는 일단 한 곳에 모았다.
싸늘하게 식은 부하들의 주검을 바라보며 범한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 다시 암살자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 형제들의 주검은 잘 보살피고, 저들은······ 저 많은 시체들을 가져다가 뭘 하려는 겐가? 그냥 수급만 잘라서 경도로 가져가세.”
그러자 홍상청이 옆에서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진항은 보일 듯 말 듯 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러한 변고가 일지 않았다면 저 시체들은 모두 군대 내 유능한 인재들이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알력 싸움 때문에 조정 흠차 대신을 암살하려다 죽은 것이니, 그다지 안타깝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범한이 죽은 자를 능욕하는 광경은 군내 소장파 장군 입장에서도 보고 있기 조금 불편했다.
범한은 옆에 있는 진항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부하들이 죽은 적의 머리를 잘라내는 광경을 살짝 즐겁다는 듯 지켜보았다.
머리를 잘라 한곳에 모았으니, 이제 산골짜기에 남아 있는 피며 사람과 말의 시체, 부서진 마차는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나중에 처리할 것이었다.
200명의 경도 수비 기마병 중 절반이 말에서 내려와 감찰원 관복을 입은 시체를 조심스레 말 위로 올렸다. 그리고 다친 감찰원 관원들도 말 위에 올라타도록 했다.
이는 모두 진항의 결정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어떻게든 범한과 감찰원의 노기를 누그러뜨릴 때란 생각에서였다.
감찰원과 군 측은 늘 서로 우의를 갖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 산골짜기에서 일어난 일전 때문에 양측 사이에 영원히 봉합되지 못할 간극이 생겨나도록 해서는 안 되었다.
범한이 말에 올라타자 진항은 그때서야 말에 올라타 옆에 있는 범한에게 차분히 말했다.
“이런 생각은 해봤는가? 군 측이 정말로 자네에게 불리하게 행동하려 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자네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 있다네.”
감찰원 관원들은 이미 중상을 입은 몸이었고 쇠뇌도 모두 거둬들인 후였다. 그러니 200에 이르는 기마병을 데리고 나타난 진항으로서는 충분히 그리 말해도 되는 입장이었다.
한데 범한은 그런 진항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범한과 진항 뒤로 감찰원 관원의 주검을 실은 말이 따랐다. 그런데 갑자기 말 한 마리에 있던 시체가 툭 튀어 올랐다.
그 시체는 말 서너 필 정도의 거리를 유령처럼 가볍게 휘리릭 날아 진항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너무나도 친밀하게 진항의 등에 가슴을 바짝 붙이고······ 그것도 진항의 그림자라도 되는 양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대경실색한 진항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잡았다. 한데 절반 밖에 뽑아들지 못했을 때 뒤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목에 가볍게 입김을 불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입김이었다.
진항은 더 이상 방어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제압을 당해 버렸다. 뒤에 있는 무서운 실력자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대종사인 섭류운도 구해주지 못하리란 걸 알아서였다.
한편 뒤에 앉은 그림자는 회백색 옷을 입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조는 척 하며 자신이 평범한 밀정인 것처럼 연기하기 시작했다.
진항은 아무 말 없이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는 범한을 쓱 바라보았다.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저 멀리 보이는 경도만 바라볼 뿐 진항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성문 쪽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걸로 모자라 스산하기까지 했다.
일찌감치 깨끗하게 비워진 성문 앞. 경도 백성들은 경계선 밖에서 남쪽에서 온 일행의 대열을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말 위에는 시체가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마병 선두에 있는 키 큰 말 위에는 젊은 대인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1년 넘게 경도를 떠나 있던 작은 범 대인이 드디어 경도로 돌아와서였다. 그런데 함께 돌아온 게 이렇게나 많은 시신과 피범벅이 된 사람들이라니. 더군다나 망가진 마차 한 대와 함께 말이다. 그들 눈에 비친 시커먼 색 일색인 마차는 분명 감찰원 마차처럼 보였지만 언제든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아 보였다.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할 광경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분명 경도로 돌아오는 도중에 작은 범 대인이 흉악한 일을 당했기 때문일 테지. 물론 백성들 중 그 누구도 그 흉악한 일이 이처럼 번화하고 안락한 경도 부근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경도 수비 군사들은 조용히 말을 이끄는 것은 물론 대열 양측에서 범한 일행을 호위했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대열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던 백성들은 작은 범 대인이 조정에 체포되어 가는 게 아님을 확인하고는 속속 현 상황에 대해 추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범한의 경천동지할 신분, 과거 1년 동안의 소문, 황실 금고라는 민감한 소재 등을 떠올렸다. 그러자 아무리 아둔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조정 내부에 있는 누군가가 작은 범 대인에게 불이익을 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남에서의 일 때문에 범한은 명성에 금이 가기는 했다. 하지만 경도에서 그는 여전히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춘시 사건, 1처 수장, 황궁에서의 시선 강림 그리고 북제행. 경도 백성들이 느끼는 범한은 그들의 긍지이자 조정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 * *
“작은 범 대인!”
“작은 범 대인!”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다친 범한에게 자신들의 지지와 걱정, 그리고 문안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소리치는 것뿐이었고, 범한을 외치는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진항이 곁눈질로 범한을 쓱 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에는 은근슬쩍 부러움이 섞여 있었지만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바글바글 모여 있는 군중들을 향해 범한이 가볍게 인사를 해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어느새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군중의 환대에 감동을 금치 못한 범한은 스스로 인생을 돌아보았다.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 진심으로 저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생각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어쩌다가 자그마하게 좋은 일을 하게 되었는데 저들 백성들에게는 평생 기억될 일이 되어 있던 것뿐이었다.
경도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백성들의 마음만큼은 빛을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일부 담력이 작았던 백성이 범한 일행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고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범한 입장에서는 고개를 돌려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놀랐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말 뒤쪽으로 뜯어낸 문짝이 바닥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문짝 위에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피칠갑을 한 자가 묶여 있었다. 피는 멎은 상태였지만 앞서 흘린 피 때문에 온통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옷이며 몸이며 하나 같이 시커먼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끔찍한 건 그자의 몰골이었다. 양팔목이 잘려 있었고, 입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안구는 피떡이 뭉친 채 쪼그라들어 있었다.
팔목이 잘려나간 부위는 천으로 대충 둘둘 말린 상태에서 문짝 가장자리에 묶여 있었다.
산골짜기 암살전에서의 유일한 생존자도 감찰원과 함께 경도로 돌아온 것이었다. 한데 문짝에 묶인 채 덜컹거리는 길 위를 끌려와서 그런지 그의 몰골은 더욱 처참해 보였다.
범한이 무표정하게 채찍을 휘익 내젓고는 먼저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길게 난 어두컴컴한 성문을 지나고 나니 한겨울을 맞은 경도의 설경이 눈에 들어왔다. 범한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감찰원 관복인 연의(蓮衣)를 입은 몇십 명의 감찰원 관원들이 범한을 맞으러 나와 있었다. 먼저 한 사람이 조용히 앞으로 나가 범한이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잡자 나머지 사람들이 뒤쪽으로 가 중상을 입은 동료들을 맞아 주었다.
말의 고삐를 잡은 얼굴이 거무스레한 관원이 침통해 하며 말했다.
“하관이 잘못했습니다.”
그가 범한 옆에 있는 진항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연화령이 쏘아 올려진 후 성문이 잠시 닫히는 바람에 제때 성 밖으로 모시러 가지 못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피곤한 듯 말했다.
“목철, 자책하지 말아요. 이번 일은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다시 한마디 했다.
“목풍아!”
그러자 목풍아가 서둘러 뒤쪽에서 뛰어나와 정자세로 말 옆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불안한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목풍아 대령했습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을 데려다가 형제들부터 치료해주거라. 장례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논의하자꾸나.”
“알겠습니다.”
목풍아가 명령을 이행하러 자리를 떠났다.
범한이 목철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데려와요. 그리고 나와 어디 좀 함께 갑시다.”
목철은 순간 의아해하며 생각했다.
‘대인께서 심하게 다치셨으니 황궁에서도 급히 불러들이지 않을 텐데. 그런데 어디를 이렇게 급히 가시려는 걸까?’
물론 지금은 그걸 물어서는 안 되는 때라 목철은 고개를 숙여 범한의 명령을 이행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리고 동시에 거리에 있는 관원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