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화 경도에는 별일 없었습니까? (1)
이 난리 통을 틈타 범한은 다시 눈 덮인 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나뭇가지 위에서 바짝 엎드려 무겁게 숨을 헐떡였다. 그는 등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피가 나무 아래로 떨어지면 궁수들에게 들킬 수 있어서였다.
궁수들은 쇠뇌를 들고 있었다. 그러니 중상을 입은 범한이 다시 쇠뇌를 든 적에게 포위 된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미 임무를 완수한 터였다. 숲에서 발사되는 화살의 밀도가 많이 낮아졌고, 지휘관 세 명의 사망으로 매복하고 있던 공격자들이 당황하고 겁을 먹게 되어서였다. 지휘자가 사라지고, 수성용 강노 세 대가 발휘했던 진압 작용도 사라지자 산골짜기에 있는 검은 마차는 아까보다는 압박감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범한은 나무 위에 엎드린 채 맞은편 숲의 상황을 청각을 통해 살폈다. 그림자는 범한보다 앞서서 산꼭대기에 있는 진영을 이미 교란시켜 놓은 터였다. 이에 매복하고 있던 공격자들의 군기는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감찰원 6처 자객들이 실력 발휘를 할 시간이 온 것이었다.
감찰원 사람들은 드디어 자신들이 싸울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더 이상 휘파람 명령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에 서둘러 마차에서 튀어나와 지니고 있던 검은색 쇠꼬챙이를 꺼내들고는 분노에 찬 침묵과 함께 성글게 날아드는 쇠뇌의 화살을 피해 숲으로 잠입했다.
감찰원 자객들은 이미 마차 안에서 검은색 관복을 거꾸로 뒤집어 입은 터였다. 이에 마차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회백색의 유령처럼 숲으로 숨어들어가 자신들이 지닌 실력과 분노를 무기 삼아 그곳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오래 전부터 모의된 쇠뇌를 활용한 매복전이 범한과 그림자라는 두 강자의 몸을 사라지 않은 공격 때문에 근거리 암살전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런데 감찰원 6처 자객들은 이 세상에서 암살에 가장 통달한 자들이었다.
제아무리 천하 최강의 경국 군대라 할지라도 울창한 숲에서 펼쳐지는 근거리 암살전에서만큼은 감찰원 6처를 따라오지 못했다.
숲속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다 가끔씩 쇠뇌를 움직이는 소리, 눈[雪]이 부서지는 소리, 쇠꼬챙이가 복부를 찌르는 소리,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범한은 자기 부하들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재 매우 차분하게 보복성 도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매복해 감찰원을 공격한 2백 명의 궁수들이 감찰원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그들에게는 살아나갈 구멍은 없을 터였다.
그동안 내내 긴장하고 있던 범한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 * *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범한의 예상대로 6처 검수들은 지독하게 공격을 펼쳤고, 결과적으로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물론, 이는 6처 검수들이 악랄해서라기보다는 대립 국면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남아 있던 스무 명 정도의 궁수들이 한 줄로 서서 자살을 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범한은 눈밭에 서서 땅바닥에 있는 스무 구의 주검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주검의 면면을 살피던 범한은 그들의 얼굴에 슬픔이나 두려움은 전혀 없고 오로지 결연함과 충성심만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경국의 군대는······ 과연 세계 최강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정도로 강력한 기강과 강인함을 지닌 자들이 전투에 투입된다면 분명 가공할만한 역량을 발휘하겠지.
그런데 오늘 검은색 마차를 타고 산골짜기로 진입한 감찰원 관원의 수는 모두 서른 여 명 정도였고, 그중에서 살아남아 눈 덮인 숲으로 잠입한 건 스무 명 정도였다. 고작 그 스무 명으로 궁수 근 200명을 죽이 다니.
산골짜기 양옆으로 펼쳐진 눈 덮인 숲에, 그리고 어둡고 음침한 돌 뒤와 나무 아래에 피마저 얼어붙어 버린 시체가 수없이 누워 있을 게 뻔했다.
순간 마음이 요동친 범한은 기침을 두어 번 해 목에 있던 피를 토해 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피범벅이 된 사람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온통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한쪽 눈이 비수에 찔려 파열 되 오그라든 술 주머니처럼 변해 있어 정말 끔찍한 몰골이었다. 양쪽 팔은 일부가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고, 잘려나간 왼손에는 찔려서 생긴 핏 자국이, 잘려나간 오른손에는 패도 정기 때문에 나무처럼 파열된 흔적이 있었다.
아까 강노 앞에 있던 세 명의 고수 중 한 명이었다. 뒤쪽에서 범한을 습격했던 자로, 죽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범한을 끌어안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암살자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범한이 옆으로 다가가 천천히 다리를 들어 그자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이 같은 행동을 두 번 반복해 그자를 깨웠다.
피칠갑을 한 사람이 천천히 정신을 되찾더니 초점 없는 눈으로 주변부터 훑어보았다. 보이는 건 범한 주변에 있는 감찰원 밀정들과 숲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형제들의 주검뿐이었다.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는 다시 의연함을 되찾았다. 그런 그가 돌연 동정을 구하는 눈빛을 하고는 고통을 참고 벌벌 떨며 말했다.
“대인, 살려주십시오. 저는 뭐든······.”
그런데 ‘든’을 발음할 때 이가 맞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범한이 전광석화처럼 손을 뻗어 그자의 입속에 손을 넣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가 몇 개 빠지고 아래턱에 피가 가득 고였으며, 다시는 입을 다물지 못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범한이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눈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자살할 생각은 말거라. 너는 내게는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니······. 손도 없고 입도 다물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 죽음으로 충성을 증명할 방법은 없겠구나!”
“지혈 해주고, 어떻게든 살려 두게.”
범한이 옆에 있는 부하에게 분부를 내린 후 천천히 눈 덮인 골짜기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걸어가는 동안 범한은 계속 기침을 해댔고, 등줄기에서는 핏물이 흘러 내렸다.
범한의 뒤를 따르고 있던 홍상청이 부축을 하려 했다. 하지만 범한은 고집스레 그의 손을 뿌리쳤다.
홍상청은 운이 나쁘지 않았다. 쇠뇌의 화살이 빗발치는 가운데 죽지 않고 오른쪽 팔만 살짝 다친 정도였다.
하지만 감찰원의 다른 관원들은 운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범한을 따라 경도로 돌아가던 측근은 모두 서른 여 명. 그중 근 절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다쳐서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줄곧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던 감찰원 관원들이 어느 순간부터 살짝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기 시작했다. 제사 대인을 향한 진심 어린 존경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제사 대인이 없었다면 산골짜기에서 맞닥뜨린 무서운 습격에 자신들은 모두 전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감찰원 관원이 하나 둘 범한 뒤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생존자 한 사람을 질질 끌며 산골짜기에 있는 부서진 마차로 향했다.
* * *
범한은 자기가 타고 있던 전복된 마차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깨진 마차 바퀴를 밀어보았다. 그러다 마차 안에서 죽어 있는 마부를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리고 부상을 치료해주겠다는 감찰원 부하들의 요청도 거절했다.
‘왜지?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산골짜기에는 주군(州君)의 시신이 가득했다.
‘대체 어느 세력이기에 이렇게 대담하게 경도로부터 가까운 산골짜기에 사람을 매복시킨 걸까?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자이기에 이리 많은 군 측 고수들을 동원하고, 또 수성용 강노까지 옮겨온 거냔 말이다!’
수성용 강노는 이번 습격 사건의 두 번째 의문점이었다.
‘저 거대한 쇠뇌를 배치하려면 암살자에게는 분명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더군다나 움직임도 커야 하고 말이야. 그런데 왜 경도 주변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도 수비군은 이런 움직임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걸까?’
그중에서도 범한이 가장 오싹했던 건 상대방이 어떻게 자신이 경도로 들어가는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느냐는 점이었다.
‘영주에서 위주까지 범한은 줄곧 교란작전을 펼치며 이동했다. 강남 수채를 시켜 가짜 소문을 퍼뜨리도록 해 놓고 자신은 곧장······. 만약 자신을 암살할 생각이었다면 경도 부근에 저 정도의 군대를 오랫동안 매복시켜 놓지 못할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저렇게 시간을 정확하게 맞춘 걸까?’
더 무서운 건 경도와 가까워졌어도 범한은 자문자답을 반복하며 절대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3리 밖에서도 밀정을 풀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왜 맨 처음 돌아온 밀정은 모든 게 정상적이라고 보고를 한 거지? 설마 그 밀정은 산골짜기에 수상한 점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던 건가? 어떻게 그림자가 먼저 경고를 하기 전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어떤 의문이 일어 범한은 온몸에 오한이 드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발생한 국면과 현공 사당에서의 국면이 완전히 똑같았다.
오늘 국면은 사국(死局: 바둑 등에서 만회할 수 없는 국면을 이른다)이었다. 그러니 상대방이 강력한 힘을 동원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건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만약 장 공주가 연소을에게 손을 쓰도록 만든 거라면, 이는 분명 경도에 큰 변고가 일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상대가 이렇게나 거리낌 없이 행동한 것이었다.
‘황제 폐하를 이 정도로 업신여기다니······. 경도에서 정말로 동란이 일어 황궁이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당신만큼은······!’
범한은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당신만큼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얼어 죽어도 당신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내게 알릴 방법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이는 서로 모순된 명제였다. 그러니 경도에서 큰 변고가 생긴 게 아니라면, 장 공주와 연소을이 왜 감히······ 이리도 큰일을 저질렀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경도에서 정말로 난이 일었다면, 나는 왜 아무런 예고도 전해 듣지 못한 걸까?’
* * *
“대인,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계년조의 구성원으로 얼굴에 피떡이 져 있는 이가 범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계년조 사람은 범한을 가장 오랫동안 따른 터라 말하는 게 매우 직접적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깔고 말을 이어 갔다.
“일단 위주로 퇴각하셔야 합니다. 그런 후 경도와 연락부터 취할지 아니면 곧장 경도로 들어갈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이 다친 부하들을 둘러보며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경도에서 정말로 큰 동란이 일었다면, 범한 일행이 경도로 돌아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범한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산골짜기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한 경도 성곽을 바라보며 싸늘하고 사납게 말했다.
“연화령(烟火令)을 쏘아 올리게.”
“네.”
그러자 폭죽이 달린 화살 하나가 산골짜기에서 하늘 높이 솟아올라 날카로운 소리를 내뿜었다. 그리고 눈이 많이 내린 날 벌어진 암담한 일들을 화려한 불꽃으로 가려주었다.
이는 감찰원의 1급 위험 구조 신호로 경국의 모든 군대와 감찰원 체계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잠시 후 산골짜기로 들어갔을 때 자신을 맞아 줄 사람이 군 측 인사인지 아니면 감찰원 인사인지 아직은 명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한데 범한은 전자이기를 바랐다.
* * *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말발굽 소리와 말들의 울음소리가 산골짜기 밖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한 대대에 약 200여 명가량 되는 기마병이 산골짜기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 기마병은 반짝이는 갑옷과 투구를 쓰고 칼과 창을 들고 있어 매우 숙연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깃발까지 들고 있는 건 아직 아니었다.
깃발을 들지 않은 기마병의 모습이 범한에게는 괴이하게 여겨졌다. 방금 전까지 피비린내 나는 암살전을 벌인 터라 섣불리 아무나 믿을 수 없어서였다.
앞장을 선 사람은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이었다. 엄숙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짧은 턱수염이 바람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허리에 보검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엄숙한 얼굴에는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산과 계곡에 가득 깔린 사람과 말의 시체, 아무렇게나 뒤집혀 있는 마차, 바위 틈 사이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쇠뇌의 화살들. 이것들을 마주한 장수의 얼굴에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 말고도 놀라움과 분노도 숨어 있었다.
장수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위로 들어 휘 흔들며 크게 외쳤다.
“경계하라.”
그러자 뒤에 있던 2백의 기마병이 잠시 경계를 취하며 산골짜기 안에 있는 것들에 모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