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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42화 (542/1,108)

542화 흰 눈, 붉은 숲, 검은 머리카락 (3)

“쏘아라!”

성곽용 쇠뇌 옆에 있던 지휘자로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큰 소리를 쳤다.

이번에 쏜 건 강노의 화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숲 왼쪽 아래편에서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분명 준비된 공격이었다. 이에 허공에 떠 있던 범한은 하늘 가득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눈과 입이 떡 벌어지게 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범한이 오른손으로 옷을 끌어 당겨 뒤집은 후 얼굴을 가렸다. 그런 후 무슨 돌멩이라도 된 듯 곧장 땅바닥에 툭 하니 떨어져버렸다.

기운을 바꾸어 강제로 몸의 형태를 변환 시킨 건 아니었고, 그냥 직접적으로 체내 정기를 흩어버린 것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몸을 마치 낙엽처럼, 그리고 돌멩이처럼 대자연의 규칙에 따라 떨어뜨린 것뿐이었다.

단순한 동작 같아 보이지만, 정기를 변환하는 사이 거대한 진동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무리 절세의 고수일지라도 경맥이 잘릴 수 있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한데 범한은 타고난 괴물 아니던가. 그러니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던 것이었다.

범한이 그냥 아래로 톡 떨어져 버린 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쇠뇌의 화살들은 허공과 숲으로 날아들어 새들이나 놀라게 했을 뿐이었다. 그중 몇 발이 범한의 몸에 명중했다. 하지만 감찰원이 특별 제작해준 관복과 극한까지 치달아 오른 체내 정기가 그 화살들을 충분히 막아 주었다.

하지만 범한 입장에서는 우레로부터 일격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뼛속까지 통증이 파고들어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범한이 느끼기에 자신은 내상을 당한 상태였고, 어쩌면 외부 출혈도 있을 수 있는 상태였다.

범한은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온 몸을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고 눈 여우처럼 눈을 타고 미끄러지듯 빠른 속도로 움직여 세 대의 강노에 다가갔다.

그 순간 쇠뇌의 화살이 범한 뒤에 있는 눈밭에 꽂혔다. 빽빽하게 꽂힌 모습은 마치 범한을 향한 환송식 같았다.

* * *

엄청나게 빠른 칼이 범한을 맞았다. 그러자 범한이 손목을 돌렸고, 이내 검은색 비수가 그림자처럼 흩어지기 시작하며 그 칼과 열네 합을 맞섰다

딩딩당당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열네 차례 울린 후 칼을 쥔 자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다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범한을 막는 데는 성공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한데 산꼭대기에는 이 정도의 고수가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그래서 지금 범한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이에 범한은 뒤로 물러났던 것이고, 뒤로 물러나 뒤쪽에서 습격해 오는 사람 품으로 들어가 그자의 손목을 비튼 후 검은색 비수로 상대의 겨드랑이를 찌른 것이었다.

뒤쪽에 있는 사람이 괴성을 지르며 칼을 버렸다. 그리고 비수에 발린 독 따위는 생각도 않고 합장 해 양 손바닥으로 비수를 잡았다.

한데 범한의 찌르는 힘이 더 컸는지 비수가 그자의 양 손바닥을 뚫고 상대방의 몸으로 살짝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지르며 한쪽 손바닥으로 범한의 머리를 냅다 갈겼다.

그러자 범한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똑같이 반격해 주었다.

그런 후 곧장 비수를 뽑아내 칼자루로 그 사람 얼굴을 공격했다. 범한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칼자루는 곧장 그 사람의 눈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사람이 왼쪽 손바닥으로 눈과 1촌 떨어진 지점에서 범한의 칼자루를 막았다.

범한이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칼자루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와 그 사람의 손바닥을 뚫고 곧바로 그자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그자는 액체를 뿜어내며 눈알을 뽑아낸다거나 비참한 비명을 지른다거나 하지 않았다. 죽게 된 마당인데도 오히려 있는 힘껏 범한을 끌어안았다.

그의 왼쪽 손바닥은 범한의 비수에 때문에 안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에 그는 오른쪽 팔로범한의 목을 단단히 감았다.

그러자 앞에 있던 사람이 칼을 집어 들고 범한을 내리쳤다. 그의 칼은 번개가 내려치듯이 빠른 속도로 곧바로 범한의 안면부를 공격했다.

* * *

범한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는 사람의 눈알에서 비수를 빼 앞에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을 찔렀다.

그런데 앞쪽에 있던 이는 자기 목숨은 돌보지도 않고 커다란 기합 소리와 함께 칼을 휘둘러댔다. 그리고 범한의 비수가 자기 오른쪽 가슴에 꽂혀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제 보니, 군 측 고수는 경도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골짜기에 범한의 시체를 남겨두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편 방금 전 공격을 개시한 범한의 왼쪽 팔은 아직 쭉 뻗어 있는 상태였다. 그의 왼 팔에는 앞쪽으로 비수가 들려 있는 것은 물론 손목에는······ 암살용 쇠뇌가 있었다.

쇠뇌를 작동 시키는 소리가 자그마하게 울렸다. 오늘 쇠뇌의 화살로 범한의 부하 여럿을 죽인 자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두 눈에 쇠뇌의 화살이 박혀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느다란 검은색 화살 두 발이 칼을 들고 있던 자의 양 눈에 박혀버린 것이었다.

범한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뒤쪽에서 강하게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매단 채로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그리고 앞에 있던 자가 휘두른 칼이 빗맞도록 하는 동시에 자신의 단단한 어깨로 상대방의 오른 손을 막았다. 그러자 ‘쩌걱!’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을 든 자의 손목이 부러져버렸다.

범한이 발길질로 그를 차버렸다.

그러자 ‘끙’ 소리와 함께 앞쪽에서 칼로 공격했던 사람이 범한의 원망 섞인 거친 발차기에 열 장(丈) 정도 날아가 나무 몸통에 부딪혔다. 한데 어찌나 험악하게 부딪혔던지 복부가 터지고 내장이 쏟아지는 처참한 꼴을 당해 버렸다.

* * *

바로 그때 제3의 사람이 나타났다.

범한이 발길질을 마치고 아직 발도 거둬들이지 않았을 때였다.

한데 범한은 줄곧 그 사람이 나타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뒤에서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도 않은 채 어깨를 내밀어 토막을 낸 검의 검자루를 여전히 쥐고 있던 터였다.

그러자 ‘촥!’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두 팔이 모두 잘려버렸다.

그런 후 범한은 매화꽃이 눈보라에도 피어나듯, 작은 배가 바다 위에서 바다와 싸우 듯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검 놀림으로 싸늘하고 냉정하게 상대방을 공격했다.

검 끝이 가볍게 흔들려 유약하고 부드러워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강인했으며, 검은 앞뒤 좌우를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이는 범한이 꽁꽁 숨겨 두었던 일격이었고, 그에게는 정면 대결 시 가장 강력한 일격이었으며, 가장 위험한 순간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을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고검의 검법이기 때문이었다.

* * *

검 끝이 군 측 강자의 목을 뚫었다. 그러자 허공에 붕 뜬 그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범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무기력하게 축 쳐진 양손에서 곡도 한 쌍을 눈밭으로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군 측 강자는 두 눈으로 자신이 느낀 공포감과 방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방금 전 검으로 한 공격은 어떻게 기척도 없이 이뤄질 수 있었던 거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다시 기이한 변화가 일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범한이 검으로 뚫어 버린 한 사람, 그리고 뒤쪽에서 그를 잡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눈밭 아래에서 갑자기 사람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회색의 그림자가 눈밭을 뚫고 나왔다. 그는 아주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으며, 손에 가느다란 검을 쥔 채 범한 뒤에 있는 사람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진짜 살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범한은 이 눈밭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강자 셋의 연속적인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지친 탓에 눈밭 안에 숨은 이상한 점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승리를 눈앞에 둔 이 때, 적진에서 최후의 살수가 이제야 나타나다니.

* * *

범한이 앞으로 겨우 한 발 내딛었을 때였다. 그런데 뒤쪽에서 허리에서부터 뒷목 부위까지 불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올라왔다.

유령 같았던 칼부림이 일반적 공격은 충분히 막아주던 관복을 뚫은 것이었다. 그리고 범한의 등 쪽에 기다랗게 처참한 상처를 남긴 것이었다.

검의 공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라 정수리에 묶어 놓았던 범한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버렸다.

줄곧 범한을 뒤에서 잡고 있던 사람은 일찌감치 검의 기운에 밀려 눈밭에 고꾸라져 있었다.

그러니 이제 범한 뒤쪽에 있는 사람은 줄곧 눈밭에 숨어 있다가 나온 자객이었다.

등에 입은 중상, 무기력하게 산발이 되어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곧 범한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검. 한데 이 순간 범한은 정신력이며 체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순식간에 체내 패도의 정기를 동원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범한이 할 수 있는 건 제때 뒤를 돌아보는 것뿐이었다.

아니, 눈만 돌려서 보는 것뿐이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가운데 연약하고 무기력한 공격이 마지막 자객의 얼굴로 향했다.

* * *

머리카락 끝에 있던 가느다란 바늘이 자객 얼굴의 태양혈로 향했다. 작고 가느다란 것이 부들부들 떨리며 날아가는데 바람이라도 불면 곧장 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객은 순간 몸이 뻣뻣하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범한의 심장을 겨누고 있던 검으로 제때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범한이 손바닥으로 자객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목에서 솟구친 핏물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자객의 머리가 뒤쪽으로 꺾이더니 가느다란 척추 한 줄기에 의지해 등 뒤쪽에서 달랑거렸다. 그리고 시뻘겋고 토 나올 것 같은 구멍은 눈이 멎은 파란 하늘과 마주하고 있었다.

범한은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손을 돌려 눈밭에 꽂혀 있는 장검을 뽑았다. 그리고 양 발을 모은 후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이상한 모양새로 뒤쪽으로 물러났다. 범한은 몸을 있는 힘껏 웅크린 터라 외부에는 아주 적은 면만 노출되어 있을 뿐이었고, 이에 회백색의 감찰원 관복은 그의 전신을 꼼꼼하게 감싸줄 수 있었다.

쇠뇌의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챙챙’ 하며 울렸다. 마치 서호(西胡)의 철로 만든 쟁(箏)이 내는 소슬한 연주 소리처럼 들렸지만 실은 범한을 향하고 있는 화살들의 소리였다. 한데 범한은 몸놀림이 빨랐다. 하도 빨라 쇠뇌가 그를 정확히 겨누지 못할 정도였다.

가끔씩 몇 발이 범한에게 정면으로 날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찰원 관복을 뚫을 수는 없었다.

수성용 강노가 설치되어 있는 위쪽까지 올라간 범한은 체내에 남은 패도의 정기를 끌어 올린 후 손을 뒤집어 높이 쳐들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 걸까?

수성용 거대 강노 한 대가 허공에서 몇 번 빙글 돌더니 옆에 있던 두 대의 강노를 부수어 버렸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범한은 어느새 또 손을 뒤집어 검 끝을 치켜들었다. 공중에 붕 뜬 쇠뇌는 장전이 되어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터라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고, 범한은 그것을 막아야 했다.

왕계년이 천 리 길을 마다하고 보내준 천자의 검은 과연 예리함이 예사롭지 않았다. 검 끝이 스쳤을 뿐인데도 강노의 활시위가 곧장 끊어져 버릴 정도였다.

주변에 있던 당황한 궁수들은 포효하며 범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거대한 쇠뇌에 생긴 문제점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삐걱삐걱. 심장을 오싹하게 하는 소리가 설산 정상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어 세 차례에 걸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강노가 한꺼번에 부서지면서 순간 한쪽으로 쏠리었다. 그중 하나는 범한이 활시위를 끊어 놓은 상태였다. 이에 팽팽히 당겨진 시위에 올라가 있던 온통 쇠로 된 화살은 결국 발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데 화살은 골짜기 쪽이 아닌 지면을 향해 발사되었다.

그러자 강력한 반동으로 수성(守城) 용 강노가 이리 튀고 저리 튀기 시작했다. 사람 허리 높이까지 튀어 오른 강노들은 곧장 범한을 추격해오던 이들을 덮쳐버렸다.

강노가 뒹굴고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잘리고 뭉개진 사지와 그로부터 나온 피와 살점뿐이었다.

한편 나머지 두 대의 수성용 강노도 부서지면서 더 이상 활시위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그 위에 장전이 되어 있던 화살 두 발도 ‘슉, 슉’ 소리를 내며 발사되었다. 그것도 정해진 방향 없이 아무데로나 말이다.

날카로운 금속의 빛 두 개가 번쩍 했다. 그중 하나는 오래 묵은 나무로 향했고, 나무 기둥은 온통 쇠로 된 화살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화살이 꽂히는 순간 나무는 무슨 두부라도 된 것만 같았다. 수피도 튀지 않았을 뿐더러 쑥 하고 지나가는 화살에 쉽게 뚫려 버렸다. 결국 나무는 기둥 가운데에 난 거대한 구멍을 중심으로 갈라지기 시작해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나머지 한 발은 더욱 사나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곧장 궁수 세 명의 몸을 꿰뚫어 버린 후 그들을 눈밭에 박아버렸다.

무시무시한 화살대를 타고 선혈이 눈밭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꼬치처럼 꿰어진 궁수 셋은 즉사하지 않은 터라 계속해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성용 강노가 있던 자리는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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