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흰 눈, 붉은 숲, 검은 머리카락 (2)
사라지기 직전에 범한은 다시 한번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아직 산골짜기에서 위험에 처해 있는 부하들을 돌아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감찰원 관원들도 이미 여럿이 목숨을 잃은 터였다. 모두 방금 전 순식간에 쏟아진 공격에 당한 것이었다.
범한의 마차가 강노에 뒤집힐 때 부하들은 범한의 안위를 걱정해 그의 휘파람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억지로 마차 문을 열고 휴대하고 있던 쇠뇌로 반대 방향을 향해 화살을 날리며 범한이 타고 있는 마차에 접근할 시간을 벌려 했다.
하지만 감찰원 관원들이 휴대한 쇠뇌는 숲에 있는 자들을 맞추기에는 사정거리가 짧았다. 그러니 아무리 한밤의 살신(殺神)으로 훈련 받은 6처 검수라 할지라도 이렇게 빗발치는 화살 공격 속에서는 좀처럼 맞받아칠 기회를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마차 문을 열고 나온 관원들은 순식간에 쇠뇌의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가 되어버렸고, 눈도 감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았다.
몸놀림이 가장 빨랐던 사람은 범한이 있던 마차까지 겨우 여섯 걸음 남겨둔 곳에서 화살 세 대를 맞아 바닥에 박혀 버렸다.
범한도 부하들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도 그는 아까보다 더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창백함과 싸늘함이 섞여 있었다. 차분함을 유지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반격할 수 있어서였다.
반격!
마차에서 빠져나왔을 때 범한은 연속 세 차례나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지만 그래도 왼쪽 다리에 화살을 한 발 맞고 말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냥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불에 덴 것 같이 화끈거렸다.
다행히 여우 가죽 갖옷은 부드러워서 넓적다리에 생긴 상처를 감싸기에 적합했다.
그러니 이제는 반격을 개시해야 할 때였다.
* * *
산골짜기 양쪽으로 눈 덮인 숲이 펼쳐져 있었다. 제일 먼저 범한의 귓가에 울린 소리는 그림자의 경고였다. 그림자가 숲에 있다는 걸 알게 된 범한은 반대 방향을 택했다.
범한은 그림자의 실력을 신뢰했다. 숲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든 그림자는 저 궁수들을 죽여 버리거나,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범한은 어떻게든 자기가 선택한 쪽의 숲을 처리해야 했다.
빗발치는 화살을 막지 못하면, 골짜기에 있는 부하들이 전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저 쏟아지는 화살들을 막아 마차 안에 있는 감찰원 밀정들에게 숲으로 파고들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범한은 6처 사내들이 그들의 시커먼 검으로 저 궁수들을 처치할 거라 믿었다.
그것도 깨끗하게,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말이다.
* * *
숲에서 다급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범한이 숨에 잠입했음을 알아차린 암살자들이 인원 조정을 하고 최후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감찰원 제사이자 9등급 고수는 얕볼 수 없는 상대였다. 이에 몇 차례 들려온 휘파람 명령 소리에는 살짝 우왕좌왕하는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산골짜기 쪽으로 향하는 쇠뇌의 화살 개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목표물은 범한이었고, 범한을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란 걸 궁수들도 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다만 발사된 쇠뇌의 화살 숫자가 줄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여전히 빽빽하고 위력적이었다. 이에 감찰원 검수들은 여전히 마차 안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수색과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산 정상 부근에서 눈을 밟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쇠뇌를 든 장정 하나가 경계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눈 쌓인 바닥이 갑자기 갈라지면서 검은색 비수가 나타나 그의 아랫배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비수가 한 차례 휘젓듯 움직이고는 이내 밖으로 뽑혀 나왔다. 독소를 더 빨리 퍼지도록 만들기 위한 동작이었다.
장정은 고통이 밀려와 절망적으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새하얀 옷을 입은 젊은이를 바라보며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검은 광선이 이내 그의 목을 그어버렸다.
선혈이 ‘칙!’ 소리를 내며 치솟고 장정이 목을 부여잡고 눈밭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이 무기력하게 튕기며 들고 있던 쇠뇌의 화살이 무릎 옆 눈밭을 향해 발사되었다. 그러자 죽기 직전인 몸이 강력한 반동에 의해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 ‘으윽’ 하는 소리를 내며 눈밭으로 쓰러졌다.
장정의 목을 그어버린 후 범한은 아무 상관 않는다는 듯 앞쪽으로 날아가 나무에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장정의 마지막 몸부림을 지켜보았다. 한데 죽기 직전인데도 동료들에게 적의 동태를 알리는 걸 빼먹지 않아 범한은 살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경국은 과연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숲을 헤치고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십여 명의 사람을 죽인 범한에게 슬슬 피로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사이 범한은 명확히 알게 된 게 있었다. 이번에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매복한 궁수는 적어도 200명 이상이고, 그중에 고수도 적지 않게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손을 쓰고 데 힘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림자 쪽도 적을 제거하는 데 아직 완전히 성공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상대방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었다.
범한은 공격선 두 개를 뚫고 산 정상 부근에 왔다. 강하고 위력적인 수성용 강노가 설치될 곳이 이 지점 밖에 없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목적물에 가까이 다가온 터라 범한은 조금 전 사람이 죽으면서 보낸 경고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행과 암살이 정면 대결보다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훨씬 더 많은 소모가 따랐던 탓에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조밀하게 눈을 밟는 소리가 숲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쇠뇌를 들고 있는 한 무리의 이들이 긴장한 상태에서 주위를 살피며 걷고 있었다. 궁수 중 절반은 범한을 추격을 위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산골짜기의 마차를 제압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쥐도 새도 모르게 순식간에 방어선 두 개를 뚫고 산 정상까지 올라오리란 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범한은 어려서부터 암살과 방어 방법을 교육받았다. 그래서 그의 핏속에는 잠행 능력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었으며, 이 세상에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땅에 마치 갑작스레 설선(雪線: 눈이 녹은 곳과 녹지 않은 곳의 경계선을 이름)이 나타나 버렸다. 나무 위에 있던 눈송이가 떨어져 눈발이 되어 날릴 때 눈처럼 생긴 그림자가 나무 뒤에서 샤샤샥 나타나 직선을 그리며 재빨리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였다.
쇠뇌를 들고 있는 궁수들은 순간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동시에 목 앞쪽이 싸늘해지는 걸 느껴야만 했다. 그러자 쇠뇌에 장전 되어 있던 화살들이 긴장 속에서 이곳저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타타타타.
범한은 이리저리 무섭게 날리는 화살을 종으로 횡으로 요리조리 피했다. 그리고 동시에 왼손에 쥐고 있는 검은색의 가는 비도로는 궁수들의 목에 줄을 긋고 허리 뒤춤에 차고 있던 장검으로는 곧장 궁수들을 베어버렸다.
왼손으로는 섬세한 공격을 오른손으로는 종횡무진 거친 공격을 퍼부은 것이었다.
이에 왼쪽으로는 검은색의 선이, 오른쪽으로는 번쩍이는 다채로운 형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천지 사방으로 쏟아진 쇠뇌의 화살이 다시 눈 덮인 빽빽한 숲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사이 검은색 선이 밑그림을 그리고 다채로운 빛이 면을 채워나가는 가운데 궁수들이 줄기차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엎어져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런데 맨 마지막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범한의 오른 손에 쥐고 있던 검이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범한은 땅을 밟지도 않고 재빨리 뒤로 물러나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상대방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양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조금 두려워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범한의 두 눈을 강렬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러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알렸다.
그런데 범한은 가만히 서서 상대방을 싸늘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글자를 내뱉었다.
“탕!”
범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색 비수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범한도 매우 빠르게 그 검은색 비수를 따라······ 앞으로 튀어 나왔다. 그런 그의 모습은 검은 비수 뒤에 딸린 그림자라도 된 듯 했다.
눈 깜짝할 사이 범한은 상대방 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 검은 비수 역시 그자의 얼굴 앞에 와 있었다.
‘탕’, 하는 소리에 살짝 집중력이 흐트러진 상태였지만 상대방은 기합 소리와 함께 두 칼을 아래로 휘둘러 검은색 비수를 눈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 순간 범한은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위로 두 척 정도 위로 띄웠다. 그리고 오른 손을 뒤집어 장검을 거꾸로 들고는 허공에서 상대방의 빈틈을 찾아 찔렀다.
조금 전 검은 비수의 공격에서 살아남았으니 상대방은 이미 자기 실력을 검증한 셈이었다. 그는 어느새 재빨리 세 발자국 뒤로 물러나 양손에 들고 있던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범한이 펼친 검의 세(勢)를 전광석화처럼 막아냈다.
그러자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이 부러졌다. 상대방은 순간 가슴이 답답한 걸 느끼고 이내 피를 토하고 말았다. 범한의 검에 실려 있던 패도의 정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그로서도 성공한 게 있었다. 바로 범한의 검을 걷어 올려 나름 살아 도망칠 기회를 확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범한이 이미 붙어버린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검을 버린 것이었다.
범한이 두 팔을 모으고 상대방을 향해 유령처럼 몸을 날렸다. 그리고 매우 단조롭지만 기이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대방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쩍쩍’ 하는 소리가 여러 차례 울렸다. 상대방은 흉골이 조각조각 나고 두 눈이 돌출된 처참한 모습으로 눈밭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이후 범한은 뒤로 돌아 눈밭에 떨어져 있던 장검과 비수를 주워들었다. 그런 후 발끝으로 눈을 밟으며 기러기처럼 날아올라 숲 속 나뭇가지 사이로 숨어든 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 대결에서는 ‘팍팍팍’, 하는 소리가 단 세 번 들렸을 정도였다. 이른바 전광석화란 게 이런 거구나 할 정도의 진행이었다.
* * *
나무 위에서 세 대의 강노를 바라보고 있던 범한은 과연······ 수성용 쇠뇌란 생각과 함께 절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수많은 의구심과 불안감이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산골짜기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자기 사람들을 생각하니 범한은 더 이상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생긴 것마저 기괴하고 무섭게 생긴 수성용 강노는 산꼭대기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래쪽에 있는 목판과 철로 된 부분에 의해 작동되고 있었고, 줄을 당겨 팽팽하게 만들려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만 했다. 강노 용 거대한 화살은 바로 옆에 높여 있었다.
범한은 눈 덮인 숲에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타고 있던 마차가 받은 강한 충격과 골짜기에서 죽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수성용 쇠뇌는 여전히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발사 되고 있었다. 이에 산골짜기에 있는 마차 두 대가 산산 조각이 나고, 감찰원 부하들도 심각할 정도로 다치고 죽게 되었다.
이에 범한은 저들 사이에 7등급 이상의 고수가 있는 걸 알아챘음에도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한 마리의 거대한 하얀 새가 되어 성곽용 쇠뇌인 강노 세 대를 향해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