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산골에 내리는 눈
왕희가 가볍게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우리 대사형께서 강남에서 다쳐서 돌아오셨더라니. 대인께서는 옆에 고수를 두고 계셨군요. 그러니 저 따위는 필요 없으셨던 거고······. 됐습니다. 대인을 대신해 몇 명 죽이죠, 뭐.”
말을 마친 왕희는 문을 열고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긴 깃대에 꽂혀 있던 깃발이 어둠을 뚫고 내리는 눈발 속에서 한동안 보였다 안 보이기를 반복했다.
* * *
눈은 쉼 없이 내리고 밤은 깊어갔다. 마을 대표는 벼슬아치 어르신들을 여러 민가로 나누어 보내 쉬게 해주었다. 범한은 홍상청과 검수들에게 숙직을 시키지 않았다. 바깥에 아직 위험 요소가 남아 있고, 6처 검수들이 아무리 암살에 능하다고는 해도 원거리 공격에는 별수 없어서였다. 넓은 학당 안에 혼자 남은 범한은 그냥 멍하니 있었다. 이에 화로에서 여전히 불빛이 깜박이고, 옆에 대나무 숯도 충분히 남아 있는데도 그가 느끼는 내부 온도는 조금 내려가 있었다.
고요함 때문이었다.
범한은 양손을 쭉 뻗어 불을 쬐고 있었다. 한데 머리를 살짝 갸우뚱한 자세로 있어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입을 뗐다.
“나는 검을 휘둘렀어.”
그가 잠시 멈칫하고는 다시 결론을 내렸다.
“한데, 허공만 벴지.”
대당 안을 비추던 광선이 살짝 변했다. 화로의 붉은 불빛이 만들어 낸 범한의 그림자가, 그 그림자가 바닥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와 자연스럽게 범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범한이 창백한 낯빛의 중년을 쓱 바라보고는 술 주머니를 건넸다.
그림자가 조용히 범한의 팔목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그가 들고 있는 술 주머니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림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은 반응을 느리게 만듭니다.”
“연소을 아들 이름이 뭐였지요?”
범한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는 술 주머니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입술을 타고 뱃속까지 맵고 화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모릅니다.”
그림자가 고개를 가로로 내젓고는 말을 이어 갔다.
“대인이 직접 별명을 붙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러자 범한이 대꾸했다.
“너무 긴장된 상태로 있을 필요 없습니다. 작은 활잡이 형은 눈 내리는 밤에 밖에서 꽁꽁 얼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감히 공격하러 다가올 수 없겠지요.”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술 주머니를 다시 그림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두 모금 드세요. 나는 진평평 대인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래도 나는 적어도 쉽게 당하지는 않아요.”
그림자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술 주머니를 받아들고 찔끔 두 모금을 마셨다. 잠시 후 그의 창백한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왔다. 연극에서 볼 수 있는 어릿광대 같았고, 정말 귀여웠다.
범한이 껄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과 내가 쉽게 함께하지 못하니까, 내가 어둠 속에서의 외로움을 참고 있는 거겠네요······. 늘 궁금한 게 있었어요. 평소에 밥도 안 드시고 물도 안 마시는 겁니까?”
진평평이든 범한이든 이들을 옆에서 보호할 때 그림자는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범한이 궁금해 하는 건 당연했다.
그림자가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범한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먼저 꺼냈던 화제로 돌아갔다.
“내가 허공을 베는 걸 봤겠군요.”
“그렇습니다, 대인.”
그림자가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 왕 십삼랑이란 자는 강했습니다.”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왕희가 강하다는 거는 당연히 범한도 알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한밤중에 아무 인기척도 없이 이곳 학당까지 접근했고, 자신과 그림자 모두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화살이 하늘을 가르는 상황에서 유령처럼 범한 앞에 나타나 그것을 막아내고, 또 범한이 검으로······ 허공을 베도록 했으니까 말이다.
푸른 깃발로 쉽게 막아낸 것으로 보였지만 범한은 한밤에 눈을 뚫고 날아온 검은 화살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러한 상황에서 왕희가 간단하게 대응했다는 건 그만큼 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나는 왕희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밤한이 발 옆에 있던 쇠꼬챙이를 집어 들고 화로 속을 헤집었다.
“왕 십삼랑은 정말로 강합니다. 그런데 인내력도 강하더군요. 인내력이 강한 사람은 분명 크게 도모하는 게 있는 법인데······.”
범한이 갑자기 눈썹을 한 번 씰룩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인내하는 게 아니군요. 신경을 쓰지 않는 거였어요. 왕희가 담담하게 말하는 걸로 보아 그는 많은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어요. 말로 공격도 했고, 내가 일부러 모욕도 해봤는데 전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예요······. 그가 정말로 사고검 일파라면 왜 그렇게 무관심한 걸까요? 개의치 않는 사람만 무관심할 수 있는 건데 말이죠. 나 혼자 힘으로는 왕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골치 아프네요.”
‘왕 십삼랑은 대체 뭘 원하는 걸까?’
이 질문이 점점 범한의 가슴을 짓눌렀다. 범한은 느닷없이 나타난 외부인 때문에 상황이 엉망진창이 된 게 싫었다.
가만히 있던 그림자가 홀연 입을 열었다.
“그자는······ 분명 검려 사람입니다. 하지만 검려에만 국한된 이는 아닐 겁니다.”
범한은 그림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판단을 믿었다. 사고검이 교육한 마지막 제자가 신비하기 그지없어서였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작은 활잡이 형을 죽이면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뭐.”
그림자가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림자는 그게 ‘투항장’이란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이 왕 십삼랑이란 칼을 이용해 살인을 하려는 건 그의 실력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왕 십삼랑이 정말로 사고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면, 연소을의 아들은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면 범한에게는 크게 떠벌릴 거리가 생기는 것이었다. 적어도 신양과 동이성의 관계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고 말이다.
“왕 십삼랑이 사고검의 마지막 제자란 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림자가 일러주었다.
이에 범한이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
“만약 그가 작은 활잡이 형을 죽인다면, 천하 사람에게 그가 사고검의 마지막 제자임을 알릴 겁니다.”
그러자 그림자가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
“대인, 영명하신 결정인데······ 다만 득 될 게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범한은 그림자의 뜻을 이해했다. 사고검을 가지고 장난질을 친다면 동이성은 분노할 것이다. 범한과 경국 조정이 사고검 그 백치에게 온갖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습관이 되어 있지만, 그런데도 사고검은 현재 범한에게 조금이나마 성의를 내보이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와 같은 성의를 신양 쪽과 동이성을 갈라놓는 데 이용한다면, 아까운 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천천히 말했다.
“동이성 쪽 일은 그림자의 말을 듣겠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아니까요.”
“알겠습니다, 대인.”
그림자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이후 닷새 동안은 눈이 크게 내릴 겁니다. 그러면 화살 공격을 하기가 쉬워지니, 대인은 조금 주의하셔야 합니다.”
“흑기는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지요?”
“십 리입니다.”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화살을 사용하는 고수가 멀리서 마차를 노리고 있다니. 정말 성가셨다. 한데 다행히도 흑기가 주변을 청소하며 따라오고 있으니 상대방이 군대까지 동원하는 위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거라 범한은 생각했다.
군대를 동원해 범한을 죽이려면 어떻게든 모든 목표물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황궁에 그 어떤 증거도 전달되도록 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경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 할지라도 500에 이르는 흑기를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해치워버릴 능력은 없었다.
“모를 일입니다. 왜 경도로 돌아가는 길에 습격을 했을까요? 상대방도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걸 분명 알 텐데 말입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연소을의 아들은 젊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만할 정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그에게도 손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그림자가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제가 가서 그자를 죽이겠습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자 곁에 어떤 사람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은 그냥 같이 있고, 왕 십삼랑에게 손을 쓰도록 해요······. 안전이 제일입니다. 고수라는 생물이 열에서 스무 명씩 모이는 건 쉽지 않기는 해요. 한데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니까 걱정하는 거겠지요?”
그러자 그림자가 이상하게 범한을 쓱 쳐다보기만 하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시커멓게 거미줄이 걸린 들보 사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눈보라가 치는 밤에 자기 사람들을 투입해 가장 효과적인 반격을 할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최근 3년간 그를 정신적으로 제일 공허하게 만들었던 게 바로 연소을의 활과 화살이었기 때문이다.
2년이 지난 오늘도 범한은 황궁 담벼락에서 목숨이 간당간당했던 순간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그 화살에 실린 거센 기운은 지금 생각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두려웠다.
앞서 학당 밖에서의 화살 공격도 너무 갑작스럽고 말도 안 되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조금 전 일은 자신과 그림자를 눈 덮인 숲으로 유인해 급습하려 놓은 덫이라고 생각했다.
연소을은 올해 천자의 명령으로 경도로 돌아온 것이었다. 감찰원 보고에 따르면 그는 아직 경도에 도착하지 않았고 이동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가······ 지금 어느 길을 통과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범한이 경도로 돌아가고 있는 길에 와 있을 수도 있었다.
범한이 화로에 있는 불씨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그의 마음은 일찌감치 마을 밖의 눈 덮인 숲에 가 있었다. 화로의 불꽃이 점점 사그라져 곧 꺼지기 직전이 되었다.
“일찍 가서 자도록 해요.”
범한이 어둠 속에서 탄식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후 여우 가죽으로 만든 외투의 옷깃을 단단히 여민 후 학당 대문을 열었다. 눈보라가 학당 안으로 날아 들어와 범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데 화실이 날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범한은 오히려 살짝 실망해 버렸다.
* * *
다음날, 마차는 영주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경도로 향했다. 어젯밤 일 때문에 마차 호위는 더 삼엄해져 있었다. 일단 6처 검수들은 3인씩 조를 나누어 상인으로 변장했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 눈을 헤치고 이동하며 의심스러운 이들을 살폈다.
또 멀찌감치 쫓아오던 흑기에게는 말발굽 소리가 은근히 들릴 정도로 마차와의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마차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가는 내내 강호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여럿 보이기는 했다. 그들은 찻집에서, 술집에서, 객잔에서, 역참에서 범한의 마차 행렬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에 감찰원의 밀정 검수들은 경계하는 차원에서 이 사실을 범한에게 보고했다. 한데 범한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영주를 막 벗어났을 때였다. 한쪽 팔목이 없는 아낙이 공손한 자세로 길가에서 서 있다가 마차를 막고 대인을 만나 뵙게 해달라고 청했다.
범한은 관무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외모만은 착실해 보이면서도 살짝 미색까지 갖춘 아낙을 흥미롭게 주시했다.
마차 안에서 아낙이 무릎을 꿇고 경외심과 공포심이 담긴 모습으로 말했다.
“이 부하, 대인을 뵈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휘 내저으며 말했다.
“관무미는 일어나 말을 하거라.”
“알겠습니다.”
관무미는 과거 영주에서 유명했던 여자 도적이면서 하서비의 사촌 누이였다. 그녀가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마차 지붕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뭐 찾아낸 거라도 있느냐?”
범한이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감찰원의 정보망이 천하 각지에 퍼져 있기는 했지만, 시정 조사는 강남 수채가 민간에 심어 둔 소규모 집단을 이용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니 어느 객잔에서 어떤 손님을 받았는지, 어디에서 어떤 사람을 배웅했는지와 같은 정보는 강남 수채가 훨씬 상세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관무미가 그간의 상황부터 보고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연히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있는 자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형제들이 그를 놓쳤습니다. 그저께 부씨 가문의 언덕에서 종적을 감춘 걸로 보아 분명 경도로 갔을 것입니다.”
범한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활잡이 형이 나를 죽이러 용감하게도 혼자 온 거였군.’
범한은 몇 마디 더 나눈 후 관무미를 마차에서 내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