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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38화 (538/1,108)

538화 왕 십삼랑(王十三郎)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일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언가 전달할 내용이 있었던 그는 경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범한과 친해져야만 했는데······. 그러다 우연히 화살이 향하는 곳을 알게 되어 지금이 기회란 생각에 범한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초장부터 범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한데 범한은 자신을 그다지 의심도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상하리만치 강경한 태도로 대하며 그의 마음을 후벼 파기만 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머뭇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경도로 돌아가는 동안 이 민초가 대인을 보호해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유가 충분치 않군.”

범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나 나나 다 알다시피, 고작 작은 화살 하나를 내가 가만히 놔뒀을 리 없지 않나.”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또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인께 제가 소식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무슨 소식인가?”

“동쪽에서 온 소식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홱 치켜들며 푸른 옷을 입은 자의 두 눈을 주시했다.

그런데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범한의 행동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사실 이 자는 천하 젊은이들 가운데 최정점에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범한의 위세 앞에서도 차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범한이 손뼉을 쳤다.

대당 안에 있던 감찰원 검수와 밀정들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학당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가고, 홍상청이 몸을 돌려 살며시 나무문을 닫았다. 그러자 내부에는 범한과 푸른 옷을 입은 자 둘만 남게 되었다.

실내가 조용해지자 푸른 옷을 입은 자가 미소를 짓고는 두 손을 모아 예절 바르게 인사부터 올렸다.

“동이성에서 제사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범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몇 차례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부터 되찾았다. 범한의 동공에 순간 싸늘함이 스치더니 그가 차갑게 물었다.

“이름을 밝히거라.”

“검려 13제자 철상입니다.”

“사고검은 제자를 열둘 밖에 거두지 않았거늘.”

범한이 푸른 옷을 입은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본관은 동이성에 철상이란 젊은이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고······. 본관이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감찰원의 정보망은 천하에 깔려 있으니 범한은 자신의 말에 확신이 차 있었다.

그러자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소생의 본명은 왕희입니다. 스승님의 명에 따라 경국을 돌아다니고 있던 차라 이름을 철상으로 바꾼 것입니다.”

“왕희라고?”

범한이 저도 모르게 한마디 더 내뱉었다.

“좋은 이름이군.”

그러자 왕희란 이름의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제 이름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오나 소생이 쓸모는 좀 있지요.”

그 순간 범한은 ‘동이성과 우리 감찰원은 적이거늘 왜 나를 직접 찾아온 것이냐?’, 라고 물었어야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범한은 그걸 묻지 않았고, 그 바람에 왕희도 먼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이 두 젊은이는 또래의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지혜와 판단력이 월등했다. 그래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서로의 속마음을 훤히 간파해버렸다. 범한이 봤을 때 동이성에서는 일찌감치 사람을 보내 자신과의 접촉을 시도했어야 했다. 한데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젊은이를 보낸 건 범한에게는 너무 의외였다.

그렇다. 동이성은 줄곧 신양 쪽과 좋은 관계로 지내왔다. 그러니 군산회에서는 섭류운뿐만 아니라 사고검도 받들어 모시고 있을 수 있었다. 범한도 잘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지만, 영원한 이익은 있어서였다.

사고검이 예부터 백치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검만 가지고 동이성과 주변 제후 소국을 12년 동안 비호할 수 있었던 건 고작 그 검 덕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자는 분명 신중해야 한다. 경국의 강력한 압박 하에 동이성은 살아남으려고 했으므로 경국의 최고 권력 계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니 사고검과 장 공주 간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러다 범한의 등장으로 경국의 권력 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버렸다. 특히나 범한은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장악한 후 동이성을 위협하는 실력까지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와 상반되게 장 공주가 쥐고 있는 수단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계란은 하나의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했다. 도박판에서 돈을 걸 때에도 계속 큰 쪽에만 걸어서는 안 된다. 딸들을 시집보낼 때도 몽땅 한 집에 시집보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위험이란 균등하게 분산시켜야 하는 뜻이다.

사고검은 아직 장 공주 쪽에 붙어 있었고, 동이성과 신양의 친밀한 정도는 범한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였다. 더욱이 관료 사회로 들어온 범한은 동이성과 풀 수 없는 원한 관계를 맺고 말았다. 예를 들어, 외양간 길에서 여자 자객 둘을 죽인 일, 서호 근처에서 운지란을 갑자기 습격하기도 한 일처럼 말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동이성에서는 어떻게든 범한과 접촉해야 했다.

장 공주가 무너지는 날에는 범한이 동이성을 제일 먼저 공격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하기 전에 동이성은 어떻게든 먼저 자신들의 선의를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정치란 건 과연 기묘했다. 분명 범한과 동이성은 아직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양측 모두 간보기 식 접촉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오늘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싸워도 내일은 같이 즐겁게 술판을 벌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거대한 이익 앞에서는 그 어떤 원한도 다 깨끗이 닦아낼 수 있다니. 물론 범한은 그리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사고검은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범한도 잘 알다시피, 동이성과 자신은 이런 식으로 몰래 만나야만 했다. 사고검 그 백치는 현재 장 공주 쪽에 더 많은 걸 걸고 있었다. 전임 재상 임약보가 오주에서 분석했듯이,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동이성은 수십 년 동안 평화와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므로 굳이 범한을 찾아올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오늘 왕희라는 푸른 옷을 입은 자가 자신을 만나러 온 건 그저 미리 안면을 터놓기 위한 사전 포석일 뿐일 터.

“그건 자네 사부의 뜻인가, 아니면 동이성의 뜻인가?”

범한이 물었다.

그러자 왕희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스승님의 뜻입니다.”

질문과 답이 오가자 양측에게 더 확실해진 게 있었다. 이러한 만남은 아직까지는 수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사고검이 둔 과감하고 은밀한 한 수였으므로 다른 사람은 몰라야 했다.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가?”

범한이 이번에는 더 대놓고 말했다.

“동이성 검려에 있는 9등급 고수들은 강호에서 나를 죽이려 하고 있네. 그런데 그대의 그 한마디에 내가 모든 걸 없는 셈 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득 같은 건 없습니다. 오로지 입장만 있을 뿐이지요.”

왕희가 온화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동이성과 대인은 여전히 서로가 적입니다. 하오나 저는 아니지요······. 저는 스승님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동이성을 포함해 제 존재를 아는 이는 몇 안 됩니다.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이런 제가 대인 곁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네 대사형도 나를 암살하려 하지 않았는가!”

범한이 쇠꼬챙이를 들고 화로 안에 있는 숯을 뒤적이며 되는대로 말을 이어 갔다.

“자네가 내 곁에 선다면, 동이성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습니다.”

왕희가 매우 진지하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대인을 불리하게 만드는 자는 제 적이니까요.”

참다못한 범한이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고검아, 사고검아. 그 바보의 생각은 과연 재미있군.”

말을 하는 동안 범한은 곁눈질로 왕희의 반응을 살폈다. 직접 바보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때, 그러니까 동이성의 최대 금기어를 내뱉었을 때 왕희는 차분히 있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검려의 13번째 제자라······.”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천하에는 4대 종사와 오죽 아저씨라는 고수가 있다. 한데 해당타타는 고하의 마지막 제자이고, 범한은 오죽 아저씨의 마지막 제자였다. 그런데 이 앞에 있는 푸른 옷을 입은 자가 사고검의 마지막 제자라면, 상당히 대단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대를 왕 십삼랑(王十三郎)이라고 부르겠네.”

범한이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왕 십삼랑······. 본관은 원한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지. 그래서 자네 동이성에서는 그 미친 여인의 뜻에 따라 나를 대적하러 올 걸세. 그런데 내 어찌하여 자네 하나만 믿고 동이성을 놓아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합치면 두 가지 이익이 있어서지요.”

왕희가 시원하게 웃었다. 하지만 뒤따라온 말은 웃음처럼 시원하지 않았다.

“대인에게 잘못한 사람을 대인은 어떻게든 죽이셔도 됩니다. 한데 스승님께서 저를 경국으로 보내셨고, 제게는 악감정 같은 건 숨어 있지 않으니, 저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입니다.”

“제가 살아남는다면 말이지요.”

왕희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면 동이성 역시 계속 지금 이대로 지내게 되겠지요.”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심상치 않은 말이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자네도 경도로 들어갈 거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왕희가 차분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두루 돌아다니는 거, 당연히 경국의 경도도 가봐야겠지요. 듣기로는 경도 포월루라는 곳에······ 미녀가 수두룩하다던데. 가서 제대로 즐겨볼 생각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들지 않은 상태에서 말했다.

“절대 안 깎아 줄 거네.”

왕희가 웃으며 받아쳤다.

“점을 쳐주고 은전을 두둑하게 벌어놨습니다.”

“아까 내게는 점쟁이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범한이 물었다.

그러자 왕희가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대인······ 운명은 기이한 것이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흐르고 별이 반짝이는 게 다 다르거늘. 범인(凡人)이 어찌 그런 걸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살짝 동한 게 있던 범한이 잠시 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화제로 돌아가 보지. 그래야 대화를 좀 하는 것 같으니······. 자네는 사고검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했네. 그렇다면 세부적인 일부의 태도만 대변할 테니, 동이성의 큰 취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겠지?”

“그리 말할 수 있겠군요.”

왕희가 매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좋아!”

범한이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한 손을 비비고는 손을 화로 위로 가져가 댔다. 그리고 화로 속 재 속에서 붉게 깜빡이는 불빛을 보며 말했다.

“경도로 돌아가는 게 싫군. 실력이 좋은 궁수가 어둠 속에서 나를 노리고 있을 테고. 어쩌면 갑자기 화살을 쏘아댈 수도 있겠지.”

왕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그 작은 활잡이를 꺾어버리게.”

범한이 고개를 들고 왕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가 사고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면, 자네의 입장도 보아야겠어. 경도로 돌아가기 전에 그 작은 화살의 목을 보고 싶군.”

왕희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러다 한참 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옆에 내려두었던 푸른색 기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나무문을 여는 순간 느닷없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제가 살인을 좋아하지는 않아 그러는데, 다른 방법으로 처리해도 될까요?”

범한은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에 고개도 들지 않고 싸늘하게 물었다.

“살인도 하지 않는 자네를 내가 무슨 쓸모가 있어서 곁에 남겨 두겠는가?”

“저는 실력이 꽤 괜찮습니다.”

왕희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한데 그의 말 속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함이 숨어 있었다.

“그러니 제가 대인을 보호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나를 보호해 준다고?”

범한이 입꼬리를 올리고 웃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러자 왕희가 웃으며 대꾸했다.

“저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시험해 보셔도 좋습니다.”

범한의 현 경지를 두고 왕희가 감히 그렇게 말했다는 건 본인의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않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본관 앞에서 허풍 떨지 말게. 여기는 동이성이 아니야. 그러니 자대는 언제든 저 밖에서 죽을 수 있어.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자네 목을 졸라버릴 끈이 내려올 수도 있지.”

범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별안간 학당 안의 불빛이 모두 꺼졌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바람이 불어 화로에 있던 재가 새하얗게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력하면서도 은밀하며, 또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는 치명적인 기운이 문 앞에 서 있는 왕희를 감쌌다.

푸른 깃발을 잡고 있던 왕희의 손이 살며시 떨렸다. 그리고 줄곧 푸른 깃대에 꽂혀 있던 검은색 화살이 조각조각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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