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화 눈 오는 날 밤에 만난 푸른 깃발 (1)
경력 6년의 어느 겨울날 저녁. 침침하고 쓸쓸한 해가 저 먼 산에서 비춰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추운 날이었고 주변 민가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눈은 점점 더 많이 쌓이는 가운데 어둠도 이내 침침하고 쓸쓸한 해를 삼켜버렸다. 갈수록 거세지는 바람이 땅바닥을 휩쓸고 지나가며 바닥에 있던 눈들을 공중에 흩어버렸다. 하늘에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늘과 땅에서 온 각기 다른 색상의 눈이 바람의 힘에 한데 섞여 공중에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움직이며 여러 층의 흰색으로 추위를 드러내 보였다.
다시 눈보라가 일자 길을 재촉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말도 못 하게 고생스러웠다. 이에 너도나도 가장 가까운 민가나 객잔을 찾아 들어가 쉬었다. 올해 경국에서는 홍수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 여름에 강남 여러 군(郡)의 재난 구조 작업이 이상하리만치 순조롭게 진행돼 재해를 입은 백성들도 거주할 곳이 생겨 이번 겨울에는 얼어 죽을 가능성이 훨씬 줄어들게 되었다.
지금 이곳은 영주로 홍수 피해를 가장 심하게 입고 비적도 가장 빈번히 출현했던 지역이었다.
물론 흠차 대인 범한이 강남으로 내려온 후 영주 지역의 비적들은 많이 순해져 있었다. 하늘의 위엄이 두려웠던 건지, 아니면 말로만 듣던 작은 범 대인의 능력을 무서워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대설이 내리는 날씨인데도 여행객들이 감히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건 다 이러한 이유 덕분이었다. 단지 인재(人災)를 없애놨더니 하늘이 너무 체면을 세워주고 있지 않아 그게 문제였지. 그래서 큰 강은 나루터가 봉쇄되지 않았음에도 엄동설한 때문에 이것을 뚫고 경도 방향으로 가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온통 시커먼 색의 마차만 빼고 말이다.
* * *
마차는 창틀과 아래쪽 틈을 아교로 꽁꽁 막아 놓은 덕분에 내부로는 한기가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한데 마차 앞쪽에 달린 두툼한 면직물 가림막은 눈보라의 습격을 맞아 시도 때도 없이 ‘훕훕’ 하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마차 안에 피워둔 난로에서는 타는 냄새와 함께 열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이에 마차 안은 봄처럼 따뜻해 마차 밖의 엄동설한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조금 더웠던 범한이 오른손 손가락 두 개로 털옷에 달린 목 쪽 단추를 풀어 목을 드러내고 두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공문서를 내려놓고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밖에는 순백의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숲이 우거진 곳에 있는 민가, 겨울의 밭, 작은 연못이 모두 눈에 덮힌 모습이 마치 눈의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연초에 지나면서 보았던 홍수의 흔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홍수에 쓸려 내려가 이미 땅에 묻힌 백성들의 백골은 어쩌면 저 깊은 눈 아래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것이었다.
저 멀리 길게 늘어선 허름한 거주지는 한눈에 봐도 대충 얼기설기 지어져 있어 추위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한데 안에서 불빛이 반짝이며 온기가 있는 게 보이자 범한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로와 장작만 있다면 아무리 고단해도 저 백성들은 현 상황을 버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일단 작은 온기라도 있으면 이 추운 겨울을 무사히 버틸 테니까 말이다.
“쉴 곳을 찾아보세.”
범한이 마차 밖에 있는 감찰원 마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그가 눈사람이 되어 있자 절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길을 재촉하는 게 중요하기는 하나, 얼어 죽지는 말게나.”
“알겠습니다, 대인.”
마차가 서서히 곡선을 그리며 가장 넓은 밭두렁을 따라 인근 마을로 향했다.
범한은 그간의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 경도로 가는 중이었다. 조정에서 정해놓은 날짜에 도착해야 했지만 경도로 가는 길목에서 생각지도 못한 몇 년 만의 최대 폭설을 맞아 일정이 빠듯하게 되었다. 이에 감찰원은 범한의 뜻에 따라 사주성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눈보라를 맞으며 육로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마을로 들어가니 마을 대표가 부들부들 떨며 서둘러 범한 일행을 맞으러 나왔다. 두툼한 솜옷 소매에 양손을 찔러 넣고 있던 마을 대표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표정으로 검은색의 마차 대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체 어떤 대단한 분이기에 이런 눈보라를 뚫고 길을 재촉하는 거지?’
범한은 소란을 피울 생각이 없어 줄곧 잠행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감찰원 관원이 마을 대표에게 다가가 거래를 했다.
범한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찬바람을 타고 눈보라가 옷깃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지자 무의식적으로 목 쪽의 단추를 다시 채우고 은백색 호피로 된 외투를 걸치고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홍상청이 6처 검수들을 이끌고 조용히 범한의 뒤를 따랐다.
곁눈질로 그 광경을 보게 된 범한이 강남에 남아 바삐 일하고 있는 임완아 생각이 났다. 3황자 마마가 이미 한 달 전에 경도로 돌아간지라 범한은 아내의 안전을 위해 그는 고달을 포함한 일곱 호위를 모두 항주에 남겨두고 길을 나선 터였다.
담주에서 떠날 때는 초가을이었다. 범한 일행은 우선 항주로 돌아간 후 수개월 동안 군산회의 강남 잔여 세력을 없애는데 주력하는 것은 물론 다른 업무도 처리했다.
담주에서 정한 일은 황궁으로부터 허락이 떨어진 후 임완아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중이었다. 일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영남 웅씨 가문, 천주 손씨 가문이 그 일에 거액의 은전을 지원했다. 그리고 이제 곧 떨어질 해였던 명씨 가문도 참여할 의사를 드러냈다. 그런데 아직 조직의 이름이나 진짜 효용에 대해 명확히 해놓은 게 없어서 임완아는 일단 항주회란 이름을 붙여놓고 운영하는 중이었다.
은전도 확보되었고, 범한과의 관계도 있어 항주회는 북제로부터 식량을 순조롭게 앞당겨서 사두고, 각 주군의 주요 지점을 수월하게 뚫을 수 있었다. 그리고 관에서 나와 귀찮게 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천하에 깔린 범씨, 유씨, 임씨 가문의 인맥과 하서비의 강남 수채 내 민간 통로를 이용하게 되자 항주회는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이로써 강남 전 지역을 상대로 한 이재민 구제 작업 창구는 조정 말고도 하나가 더 생긴 셈이었다. 그것도 빠르고 막힘없는 통로를 가진 창구가 말이다.
다만 범한과 임완아는 줄곧 막후에서만 활동해 이들 부부가 항주회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아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았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주회가 경도의 어느 신분 높은 분께서 황실 금고 전운사 관아를 이용해 추진하는 일로만 알았다.
겨울이 되자 강남에는 큰 눈이 내렸다. 그러자 대체 얼마나 많은 집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고, 그리고 대체 얼마나 많은 농가 주택이 무너져 내리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는지 모른다. 이에 임완아는 항주에 더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적어도 눈이 내리는 한은 강남 백성들이 버텨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후 다시 말하자며 말이다. 상투적인 표현을 빌려 정리하자면,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임완아는 시종일관 바삐 움직이며 그동안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억눌렸던 지략가로서의 재능을 펼쳤다. 범한은 그다지 많은 신경 쓰지 않는 상태에서 임완아 혼자 서한을 이용해 구제 작업과 관련한 모든 걸 통솔했다. 그녀는 상황에 따라 냉혹하고, 엄격하고, 부드럽게 괴수를 다뤄가며 그들에게 천하 백성들을 위해 조심스레 밭을 갈도록 했다. 그리고 동시에 관(官)이라는 마부가 기분을 상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 일은 자질구레한 게 많이 조금 수고로운 편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일을 하는 데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하지만 임완아는 아니었다. 드디어 자기 능력을 증명해 보일 일을 찾은 임완아는 조금도 허투루 할 생각이 없었기에 고생스럽다는 말은 입에 담지도 않고 묵묵히 일에만 열중했다.
이런 이유로 범한은 항주를 떠날 때 아내가 자기 몸을 제대로 돌볼 수는 있는지 걱정이 되어 아예 사사를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 시중을 들어 주는 등 대가의 아내가 있었지만 그녀는 아씨 마님의 말을 쉬이 거역하지 못해서, 완아가 몸을 해쳐가면서 일한다고 해도 그녀를 말릴 수 없기 때문이다.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서둘러 마을 안으로 걸어갔다. 마차는 이미 적당한 곳에 정차해 돌볼 사람을 붙여놓은 상태였다. 범한을 따라온 서른여 명의 부하가 모두 범한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고, 이들은 부랴부랴 비운 마을 내 가문 학당으로 들어갔다.
마을 대표도 맨 뒤에서 조심스레 따랐다. 한데 이 귀한 여우 가죽 외투를 걸친 신분 높은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묻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계속 추측을 해보았다.
텅 빈 마을 내 가문 학당에 들어서자 누군가가 벌써 화로를 피워 놓았다. 그리고 생강에 설탕을 넣은 물이 다 끓자 마을 아낙들이 서둘러 그것을 그릇에 따라 관료 어르신들에게 공손히 대령했다.
범한은 그것을 받쳐 들고 일단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후 맑고 생기 있는 눈동자로 대문 밖에 늘어선 집들을 그냥 조용히 바라보며 정신을 팔았다. 그러던 범한이 갑자기 물었다.
“눈이 더 많이 내리면 저 집들은 눈 무게를 견딜 수 있습니까?”
이 마을은 영주 지역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작년에 참혹한 홍수 피해를 입고 1년 내내 집수리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얼핏 봐도 허술해 보이는 가옥 상태에 범한은 걱정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 대표는 순간 어리둥절해서 일단 가만히 있었다. 이 대인이 자기에게 물은 것인지 도무지 종을 잡지 못해서였다. 그러자 홍상청이 헛기침으로 마을 대표에게 눈짓을 해주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마을 대표가 몸을 굽힌 채 두 발자국 정도 범한 쪽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르신, 한 이틀간 눈이 더 많이 내릴 것 같습니다. 한데 그 무게를 버틸 수 있을지는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범한이 의외라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을 대표인데도 허풍은 안 떠는군. 참 보기 드문 경우야.’
이에 범한이 온화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매일 돌아보기는 하는 겁니까?”
그러자 마을 대표가 껄껄 웃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눈이 많이 내렸을 때의 문제는 이 소인이 분에 넘치게 마을 대표가 되었으니 당연히 매일 더 신경을 써서 둘러볼 것입니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제가 보기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 가옥들이 별 볼 일 없어 보인다고 얕보시면 안 됩니다. 황실 금고의 장인 어르신들이 만든 거니까요. 듣자 하니 3대 작업장도 저런 식으로 생겼다더군요. 그러니 눈 무게 정도는 끄떡없을 겁니다.”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부하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 대표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어 ‘이게 뭐 그리 웃을 일이야?’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장작이며, 알탄 같은 것들에 대해 잠시 더 물어 본 후 마을 대표와의 대화를 마쳤다. 범한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경국의 국력이 강대하기는 하나 그래도 백성들에게 평범한 삶을 아무 문제없이 지속하게 하려면 나라가 제대로 운영되어야 해서였다.
한데 자신은······ 권신(權臣)으로 지내는 데 점점 더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단순히 길을 지나가는 중인데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많은 걸 물어보는 것이다.
‘권신이라······.’
범한이 연신 한숨을 내쉬며 학당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후 눈을 가늘게 뜨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점점 차가워지는 눈을, 점점 깊어가는 추위를 바라보았다. 한데 어느덧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권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부친 대인 앞에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북제 상경에서 술에 취한 후 해당타타에게 털어놓았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