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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34화 (534/1,108)

534화 얼마든지 걷어차라고 하려무나.

백작가 저택으로 돌아온 범한은 임완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범한의 이야기에 임완아는 어느새 눈가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아가 의연히 경도로 가지 않겠다고 한 대목에서는 그녀를 향한 존경심마저 생긴 상태였다.

방 밖으로 나온 범한이 허리를 쭉 펴서 뭉친 몸을 풀었다. 그리고 포만감에 찬 배를 문지르고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그림자가 복도 옆으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호위들은 범한의 성미며 실력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더 이상 옛날처럼 범한 옆에 딱 붙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그림자만 동이성의 9등급 검객들을 쫓아낸 후 다시 범한 옆에 찰거머리처럼 딱 붙어 있는 중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갸우뚱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매일 그런 식으로 따라다니면 안 지겨워요?”

그림자가 진지하게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대답했다.

“확실히 지겹긴 합니다.”

범한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설마 절름발이분을 따라다닐 때는 안 지겨웠단 말입니까?”

그러자 그림자가 곧장 대답했다.

“절름발이분 옆에는 미녀가 있습니다.”

기가 막혔던 범한이 내가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낮에 봤던 맥신아의 병세가 어떤 것 같습니까?”

“과거에 병을 앓지 않고 건강했던 몸이라면 그리 큰 병은 아닐 겁니다.”

그림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어 갔다.

“분명 외상을 입은 후 감염이 되어 생긴 병이겠지요.”

범한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림자의 판단과 자신이 진맥한 결과가 매우 비슷해서였다. 잠시 후 범한이 차분하게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연유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물어보기 뭐했어요. 동아가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여도 속은 강단이 있어서 절대 말하려 들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담주성에서 내 체면을 생각해주지 않는 사람이······ 없겠죠. 그러니 그 일은 오해한 걸 거예요. 조사해 보고, 혼 좀 내주도록 해요. ······죽이지는 말고요.”

범한은 경계선을 정해준 후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발로 걷어찬 거예요. 그러니 발로 걷어차되 3년 동안 누워서 못 일어날 정도로 만들어 놓으면 됩니다.”

그림자가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 입을 뗐다.

“지금 저보고 사람을 발로 걷어차란 말씀이십니까?”

이상한 어투였다. 확실히 이상했다. 그는 감찰원 내 자객 집단인 검수의 두령이자 천하에서 제일 뛰어난 자객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범한이 이 멀리 떨어진 작은 동네까지 와서 해결하라며 내린 명령이······ 고작 발로 걷어차는 거라니!

“살인은 당신이 천하제일이잖아요.”

범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걷어찰 때 절대 오차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고해요.”

그러자 그림자는 어이 상실한 채 도로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할머니의 침소를 찾은 범한은 과거 했던 것처럼 일단 문안 인사부터 드렸다. 그런 후 오늘 동아를 찾아갔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해 드렸다. 담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할머니를 속일 수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은근히 불편했다. 일단 할머니가 자기 속마음을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서였다.

‘한때 부리던 여종이 성안에서 지저분한 일을 겪었고 그녀의 남편도 사람들에게 곤욕을 치러 침상에만 누워 있는데 어찌 그대로 놔두신 걸까.’

범한의 표정을 보고 있던 노부인이 그의 생각을 알아채고 웃으며 물었다.

“지금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그럴 리가요.”

말만 그랬지 말투는 뻣뻣했다.

노부인은 좀처럼 보기 힘든 손자의 토라진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말해 주기 시작했다.

모든 건 전임 주수의 아들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아에게 반해서 일어난 거였다. 물론 그 공자도 바보는 아니었다. 담주성에서 그리고 백작부 앞에서 완력을 쓸 수는 없어 그저 두부 점포 앞에서 군침을 흘리며 치근덕대기만 할 뿐이었다.

한편 동아 입장에서는 그가 가장 저속한 수단까지 사용하지는 않기에 그냥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여자 입장에서는 참을 수 있어도 남자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던가 보다. 어느 날 폭발해 버린 맥 형이 결국에는 그 공자를 흠씬 패버리고 말았다.

현직 주수의 아들을 패놓았으니 일은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동아의 상공은 골격은 튼실했지만 몰매에 장사 없다고, 결국에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는데, 이 일로 범한의 할머니가 직접 나섰고, 이에 담주 주수도 그를 계속 감옥에 가둬둘 수 없었다고 한다.

한데 이 일로, 그러니까 가슴을 걷어차인 것도 모자라 곧바로 냉습한 감옥에 갇혀 있던 탓에 맥 형은 몸에 골병이 들어 결국에는 침상에서 누워 지내게 된 것이라고.

할머니의 말에 범한의 얼굴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번 일의 원인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가 왜 계속 침묵하는지 알게 되어서였다. 그 일은 맥 형이 먼저 폭력을 행사해서 생긴 일이었다.

더군다나······ 담주 사람들은 범한과 동아 가족과의 관계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 눈에 비친······ 심지어 할머니 눈에 비친 동아는 일찌감치 저택에서 내쫓긴 큰 여종이자 아랫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주수의 아들이었으니, 신분 격차가 있는 이곳에서는 그와 같은 결과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담주 사람들은 모두 범씨 가문이 잘못했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동아네를 크게 도와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계층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는 생각은 없어서였다.

범한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친한 사이인가였다.

범한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자 노부인이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왜 그러니?”

“큰일이 일어나지 않겠죠?”

범한이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누군가를 시켜서 그 공자를 발로 걷어차 주라고 했거든요.”

노부인은 깜짝 놀라 멍하니 있다가 이내 웃기 시작했다.

“얼마든지 걷어차라고 하려무나. 네 좋을 대로 하렴.”

그렇게 한담을 조금 더 나눈 후 범한은 기회를 봐서 할머니를 경도에서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밤처럼 노부인은 그 제안에 대한 답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범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왜 다들 경도에 가기 싫다고 할까요?”

그러자 동아네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란 걸 알아챈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경도에서 사는 게······ 쉽지 않아서란다. 더군다나 동아와 너는 정말 가까운 사이 아니니. 네가 꼭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너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여종 몇몇은 너한테 배운 게 있어서 생각이 하늘 꼭대기에 달려 있고, 고집도 정말 세단다. 아무도 못 말릴 정도지.”

어안이 벙벙했던 범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랬다. 아직 저택에 남아 있는 소아는 자신을 따른 여종 중 제일 어렸다. 한데 입을 놀리는 걸 보면 다른 사람에게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자기네 집 남자를 저택으로 데려와 범한을 만나게 해주었던 소청도······. 소청의 남자는 이름이 난 서생이었는데 소청 앞에서 감히 큰 소리 한 번을 치지 못했었다.

소청도 소아도 그러하니, 동아 누나와 줄곧 버릇없이 굴어왔던 사사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저택 안에 있는 몇몇 큰 여종들도 모두 범한이 예뻐하는 바람에 버릇이 나빠져 있었다. 모두들 말도 못하게 당당했고, 이 세계에서 숭배하는 진리 같은 규칙은 안중에도 없었다. 모두 순해서 사람 말을 잘 따를 것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내면은 확실한 성격들을 지니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범한이 살짝 득의양양해져서 웃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 세계를 많이 바꿔 놓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몇몇 여인의 생각 방식과 인생만큼은 바꿔 놓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그들은 범한을 따랐을 때만 그와 같은 복을 누릴 수 있었다. 만약 뒤에서 돌봐주는 뒷배가 없다면, 여종 넷은 그런 고집을 부리며 산다면 이 세상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범한은 밤새도록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담주성에 소식이 날아들었다. 모 저택의 모 공자가 누군가에게 발길질을 당해 피를 한 움큼을 토해 급히 의원을 데려와 목숨은 구했지만 지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상에 누워 있다는 내용이었다.

범인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담주는 치안이 잘 된 곳이었고, 백성들은 기풍이 소박하고 도적 기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제 본분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권세가의 공자가 구타당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이에 담주 전체가 깜짝 놀라고, 대로한 지주 대인도 그 안건을 제대로 조사해 전임 스승의 체면을 세워주려 했다. 하지만 고문에게 몇 마디 건네 들은 지주는 곧장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나 마셨다.

담주 사람 중 똑똑한 이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차츰 알아채기 시작했지만 감히 그것을 함부로 입에 담지는 못했다. 그리고 걷어차인 공자네 집에서도 속으로는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을지언정 세상을 향해 억울하다고 당당하게 소리치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동아네 집으로 사람을 보내 2년 치의 약값, 치료비, 보상액을 공손하게 건넸다.

이에 사건은 금세 흐지부지되었다. 담주 사람들이 범씨 가문의 도련님이 말썽꾸러기라기보다는 잘못을 감싸주길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던 터라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서였다.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났다. 경도에서 보낸 밀지와 강남 감찰원의 보고서가 담주 백작가 저택으로 동시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얇은 종이를 바라보고 있던 범한은 자신에게 드디어 담주행을 끝낼 때가 왔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문득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범한은 감찰원 제사이자 강남로 전권 흠차였다. 더군다나 아직 젊고 신체까지 건강했다. 그러니 진평평처럼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들어앉아 그대로 늙어갈 수는 없었다.

담주가 좋기는 해도 떠나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등자경이 임대보와 3 황자를 데리고 다시 바다로 낚시를 갔다. 그리고 드디어 임완아의 승낙을 받아낸 범한은 그녀의 작은 손을 이끌고 천천히 담주 땅을 밟고 이곳의 분위기를 느끼며 느긋하고 풍요로운 담주에서의 여행에 들어갔다.

부부는 변장을 한 후 시끌벅적한 시장도 가보았다. 그리고 부둣가 모래사장에도 가서 홍상청이 극도로 증오하는 아름다운 흰 새도 보았다. 그리고 백작가 저택 뒷문에 웅크리고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고요하기 그지없는 잡화점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임완아는 온화하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가끔은 뛰기도 하고 가끔은 천천히 걷기도 하면서 부군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그녀는 그 모든 게 범한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이 자신을 데리고 나온 건 그가 간직하고 있던 가장 아름답고 따스했던 순간을 공유해주기를 바라서라고 생각했다.

잡화점 안은 고요했고, 먼지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게으름뱅이인 범한 부부가 이곳을 청소할 리는 만무했다. 부부는 그냥 가게 안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이야기나 나누었다.

범한이 감개무량해하며 어릴 적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 임완아는 차분하게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임완아는 자신이 황궁에서 긴장되고 위험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상공도 어렸을 적에 마냥 즐겁기만 한 게 아니라 험난하고 힘든 일을 겪었다니.

임안와가 조심스레 식칼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

“그 아저씨가 이 식칼로 무채를 썰게 한 후 그걸 안주로 주셨다고요?”

범한이 즐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완아가 눈을 잠시 부릅떴다.

“어린 나이에 고량주를 마시다니! 술에 취해서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자 범한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임완아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무공을 연마한 절벽은 어디에 있나요? 창산의 가파른 절벽처럼 생겼어요? 나 좀 데려가 줄래요?”

그러자 범한은 황당했다.

“거기는 당신에게는 위험해요. 게다가 당신은 올라가지도 못한다고요.”

임완아는 “네!”라고 한마디 했지만 그녀의 매끄럽고 동글동글한 얼굴은 매우 강하게 유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임완아의 표정에 범한이 느닷없이 이상한 말을 했다.

“꼭 껴안아 줘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순간 멍하니 있던 임완아가 이내 헤헤헤 웃었다. 그런 후 양손으로 범한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범한을 꼭 끌어안았다. 그날 밤 침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범한이 사라질까 두려웠던 것처럼. 범한이 담주의 향기 속에 묻혀버리는 게 두려웠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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