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자비로움과 진중한 남성미는 본래 하나 (2)
범한이 연거푸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 불균형 현상을 바꿀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어요. 그래서 중용의 방법으로 개선을 해나가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더라고요.”
“상공의 뜻은······.”
임완아가 상공의 속마음을 헤아려보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부자들에게서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예정인가요?”
범한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고귀한 신분의 아내가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도적의 생각을 내놓아서였다. 이에 범한은 그녀의 예쁜 코를 쓸어내리듯 톡, 하고 쳐주었다.
그러자 임완아는 혀를 날름 내밀고는 히히, 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래······ 부자들에게서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거라 할 수 있겠군요.”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 생각을 말해줄게요. 황실 금고와 관원들이 그리 많은 은전을 긁어갔으니 쓸 방도를 생각해야겠지요. 하지만 우리 집안사람들만 가지고는 그 돈을 다 쓸 수 없어요. 전에도 말했는데, 그 은전을 백성들 손에 쥐여 주려 하는데 어떻게 해야 조정을 거치지 않고 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임완아가 “응.” 하고 대답을 하고는 말했다.
“옛날에는 직접 죽을 쑤어 나눠주고, 선한 마음을 고양시키기 위한 교육을 했어요. 어렸을 때 북쪽에 큰 재난이 일어났을 때였어요. 피난을 온 백성들이 경도로 몰려들었는데 조정의 몇몇 대신들은 황제 폐하께 출병해 피난민들을 진압하고 옆에 있는 주군으로 내쫓아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지요.
하지만 외삼촌께서는 윤허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대신들을 물리신 후 곧장 황실 곡창을 여셨어요······. 그때 죽을 나눠줄 때, 황태후마마께서는 황궁에 있던 몇몇을 데려가 백성들에게 죽을 떠주는 일을 하도록 시키셨고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니 어찌 처리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을 나눠주는 건 임시방편이라 별 소용이 없어요. 교육으로 선한 마음을 고양시키려 해도 그런 건 널리 퍼뜨리기 어려운 거고요. 그래서 내가 번 은전을 전문적인 기관에 넣어서 장기간 선행에 쓰일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에요.”
얇은 이불 속에 누워 있던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공부가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못 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만든 학교로 와서 공부하도록 하는 거죠. 배고픈데 먹을 밥이 없는 사람에게 우리가 산 쌀을 내어주고요. 봄에 심을 모가 없으면 우리가······ 나눠 주는 거예요. 조정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우리가 하는 거예요.”
범한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오르자 임완아의 가슴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바보. 그러면 대체 돈이 얼마나 들어야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예요?”
“돈을 벌어들이는 건 쓰기 위해서 아닌가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조정과 상인들의 돈이에요. 조정과 상인들이 벌어들인 돈은 백성들 수중에서 가져온 것이지요. 이른바 백성을 것을 취해 백성에게 쓴다는 원리예요.”
“새로운 말이군요. 한데······ 일리가 있어요!”
임완아는 상공을 숭배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고개를 숙이고 그런 임완아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작년에 북제 상경의 황궁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북제의 젊은 황제와 해당타타가 자기를 향해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움을 쫓아야 한다.’, 라는 말을 감탄하듯 읊조린 장면으로, 범한은 저도 모르게 쑥스러워져서 얼굴에 진땀이 났다.
그런데 범한의 생각과 달리 임완아는 이내 진지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안 돼요. 밑 빠진 독일뿐만 아니라 상공이 제아무리 많은 은전을 넣는다고 해도 꽉 채울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일의 파장만 놓고 봐도, 신중해야 해요. 조정에서 해야 하는 일을 상공이 빼앗아다가 하는 거잖아요. 그건 엄격히 금기시된 거라고요.”
그러자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
“서명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요?”
임완아가 범한의 눈을 파버리겠다는 듯한 동작을 한 후 바보를 대하듯이 말했다.
“서명을 받아내지 못했는데 그리 큰 판을 어찌 깔 수 있겠습니까? 일개 현이나 주에 있는 백성만 구하려는 건 아닐 텐데······. 상공이 주재하는 선행인지 알려져야 지방 관원들이 그 기름기 반지르르한 고깃덩어리를 보고도 꿀꺽 안 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 서명은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고요.”
생각을 해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다만 서명을 받아내고 조정의 진노까지 피할 수 있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임완아가 느닷없이 말을 이어 갔다.
“상공의······ 제안을 황궁의 명의로 진행하면 어떨까요? 황태후마마의 명으로 하는 거예요. 황궁에 계신 분들이 돈을 보탤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돈은 우리가 내놓고 그분들께서는 명의를 보장해주시는 거죠. 그러면 조정의 체면도 서고, 마마님들께서도 체면이 서실 테고.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걸요.”
범한은 어안이 벙벙해져 임완아를 바라보기만 할 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황궁의 귀인께서 나서주신다면야, 분명 추진하기 쉽겠지. 그런데 그건······ 전생에 자주 보았던 자선단체인데? 한데 경국에서는 처음 시행하는 일이니 분명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 거야. 하지만 일단 시작만 된다면 백성들의 삶도 언젠가는 좋아질 거야.’
임완아가 흥이 올라 계속 말을 해나갔다.
“상공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모든 걱정을 다 해결할 수는 없어요. 내가 봤을 때는 긴급 구조 정도만 해야 해요······ 진짜 중점은 교육과 재난 구재에 둬야 하고, 평소에 해야 하는 일은······.”
임완아가 말하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범한도 뭔가 말을 꺼내려다 멈추었다. 둘은 서로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가 동시에 웃기 시작했다. 그들의 웃는 얼굴에는 창피함과 자조가 섞여 있었다.
대체 어떤 걸 해야 경국, 더 나아가 천하 백성들을 더 잘 살도록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 부부가 어찌 구체적이고 자잘한 사정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지금껏 나눈 이야기는 단순히 깊이 없는 정치적 견해일 뿐이었다. 정말로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면, 이 부부는 교육과 죽을 나누어 주는 문제에 대해서만 반복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웃은 후 범한이 진지하게 입을 뗐다.
“그래도 해야 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양만리는 가난한 집 출신이니 제방 공사가 완료되면 천천히 경도로 불러들여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에요.”
범한의 머릿속에 전생에 있었던 변법(變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새싹 어쩌고 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신선했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에게는 국면을 크게 전환시킬 능력이 같은 건 없다고 알고 있던 터라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는 선에서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파편적으로 진행할 뿐이고, 너무 많은 걸 바꿀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백성들을 조금은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무섭기는 해도 그래도 해 볼 만한 일이었다.
이건 범한이 신경 써야 한다기보다는 돈을 좀 써야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당신한테 맡길까 해요.”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임완아가 깜짝 놀랐다.
“그리 큰일을 어째서 나에게 맡기는 건데요?”
“당신이 해줘야 내가 마음이 놓이니까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황궁에 계신 귀한 마마님들께서 동참해 주시려면 당신 없이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부녀자들끼리 하는 일이니 내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 위험이 좀 줄어들 테고······ 그러니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할래요!”
범한의 제안에 임완아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자기에게 할 일이 겨우 생겼는데 이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부부는 잠시 몇 마디 더 나누며 시간을 내서 그 일을 시작하자고 했다. 그간 범한은 ‘물고기를 잡아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와 같은 멋진 말들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자 임완아는 또 감동해 그 말을 연달아 되뇌어 보다가 아예 잠이 달아나 버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에요?”
임완아가 범한의 품에 머리를 묻으며 웅얼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순간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반년이 채 안 돼요.”
임완아는 범한의 잘생긴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상공이 그 일을 계획한 게 다 자신을 위해서였음을 알게 되어서였다.
사실은 범한이 입장에서······ 이 일을 하는 건 온전히 완아를 위해서였다.
한데 지금 이 순간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부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이렇게 영감을 받아 탄생한 조직이 훗날 범한의 수중에서 통제되는 자원이 너무 늘어난 것 때문에, 또 임완아의 능력 때문에 점점 처음의 모습을 벗고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조직으로 거듭날 거란 점을 말이다. 그 조직이 천하를 위해, 범한을 위해 수없이 많은 이득을 주게 될 것이란 점도 말이다.
“그 많은 은전을 한곳에 쏟아부어서는 안 돼요.”
임완아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경제니 세상사니 하는 건 잘 몰라요. 그래도 상공과 사철 도련님이 하는 일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돈은 돈을 번다는 걸 말이지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런 일을 하는 건 당연히 자기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게 아니었다. 사철이가 북쪽에서 돈을 벌고 있고, 사천립과 상문이 남쪽에서 기생집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니, 나중에 전장 같은 거대 사업을 시작하면 자연스레 마르지 않는 돈의 원천을 얻게 되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임완아가 도로 명랑해진 걸 보니, 요 녀석은 할 일이 생기면 흥분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이에 범한도 속으로는 매우 기뻤다.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일이 소기의 효과를 보아서였다. 그리고 가장 기뻤던 건 이번 일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 하나가 어쩌면 조금 줄어들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에서 늘 십중팔구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 않던가.
임완아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말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일에 대해서는 답을 안 해주는군요.”
범한이 놀라 헤헤 웃으며 품 안의 아내를 조몰락거리며 말했다.
“염려 마요.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또 똑같은 말이라니. 그러니 남자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과연 임완아도 남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바깥쪽을 향해 눈짓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사를 들여놓고도 제대로 된 예식도 치러주지 않았잖아요. 사사에게는 굴욕적일 거예요. 그래서 벌써 할머니께 말씀드려 놨고, 며칠 후에 예식을 거행할 거예요.”
그러자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다 맡길게요. 사사는 나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사이라 그런 거에는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요.”
부부의 말소리가 최대한으로 작아졌다. 바깥쪽 칸막이 방 침상에서 사사의 기침 소리가 들려와서였다. 그녀의 기침 소리에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임완아가 범한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들었죠? 누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러던가요?”
난처했던 범한이 임완아의 엉덩이를 툭 쳤다.
“평소에는 돼지처럼 씩씩 잘만 자더니만, 오늘은 어째서 자다가 깬 건지 원.”
돼지처럼 잘 잔다는 말에 임완아는 자기가 시집올 때 데려온 사기 생각이 났다.
사기는 임완아의 몸종으로 별궁에서 지낼 때 매번 범한에 의해 몽롱하게 취해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사기는 공을 세운 것도 없었고 고생을 한 것도 없었다. 그래도 조금이지만 보답해야한다는 생각에 임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기는 어떻게 하죠?”
임완아의 표정에서 정말로 사기를 상공의 첩으로 들이고 싶어 하는 게 보이자 범한은 덜컥 겁을 집어먹고 아내에게 애원했다.
“그건 그만둡시다. 내가 밤마다 이 방 저 방을 전전하는 남편이 되어야겠습니까?”
그러자 임완아가 원망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쓱 쳐다보았다.
한 차례 엎치락뒤치락하자 부부도 이제는 피곤해졌다. 범한이 만족스러운 듯 처를 품에 안으며 그녀의 입가에 대고 말했다.
“내일 당신을 데려갈 데가 있어요.”
임완아가 몽롱하게 말했다.
“담주성은 별로 크지 않아서 일찌감치 한 번 둘러봤는데······ 어디 갈 데가 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