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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29화 (529/1,108)

529화 자비로움과 진중한 남성미는 본래 하나 (1)

연회가 끝나고 범한은 등 대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최근 경도 상황이며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건강 상태 등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아울러 감찰원에서는 듣기 힘든 세간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피로가 밀려오자 범한은 사람들을 물린 후 할머니께 문안 인사를 하고 임완아를 데리고 침소로 갔다.

침소는 물건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 게 옛 모습 그대로였다.

범한은 곧장 침대에 누워 곁눈질로 의자에 앉아 불꽃을 가지고 노는 임완아를 바라보면서 옆 칸에서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 있는 사사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한소리 했다.

“소보, 이리 와봐.”

그러자 임완아가 고개를 돌리고 히히 웃었다. 그리고 잠시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밖을 잠시 바라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작게 말할 것이지.”

규방 안에서의 즐거움은 남녀 간의 그런 일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왕왕 아주 섬세하고 작은 일에도 찾아볼 수 있다. 방금 말한 ‘소보’ 같은 게 그런 것이다. 이는 범한과 임완아 사이의 암호이자, 아기자기한 행동이며, 잔재주였다······.

임완아는 대보(大寶)의 누이이니 당연히 소보(小寶)였고, 이 말은 소보배(小寶貝: 작은 보배란 의미로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애칭의 의미도 사용함)를 줄인 말이기도 했다.

세수와 양치를 마치자 사사가 웃으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런 후 그녀는 과거 담주에서 했던 것처럼 옆쪽 칸막이 방에 있는 작은 침대로 가서 잠을 청했다.

붉은 촛대의 불이 꺼지고 범한 부부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임완아가 새끼 고양이처럼 범한의 품으로 쏙 들어가 남편의 옷 앞섶을 작은 두 손으로 쥐었다. 도망가려는 사람을 잡고 있기라도 한 듯 그녀의 두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16년이나 쓴 침대예요.”

범한이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그래서 낮잠을 잘 때마다 여종들이 재워줄 필요가 없었어요. 혼자서도 잘 잤거든요.”

임완아가 “응.” 하고 말하고는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고개를 숙여 임완아의 통통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그런데 지금껏 단 한 번도 잠에서 깬 적이 없는 기분이에요. 당신처럼 이렇게나 영리한 사람이 내 아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러자 임완아가 이를 다물었다. 인정사정없이 범한을 깨문 것이었다. 그녀가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얼른 해요!”

범한은 통증이 밀려와 얼굴을 찡그리고 혀를 앞으로 내밀어 벗겨진 입술을 핥았다. 그런데 순간 무언가 달달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완아가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화를 남편의 입술을 꽉 깨무는 행동으로 발산시켜버렸다는 걸 알아채서 그런 걸까.

범한은 잠시 머뭇거리며 단어 선택을 한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특별히 할 말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요 며칠 당신이 고생했다는 말을 하려던 것뿐이었어요.”

그러자 임완아가 범한의 품 안에서 뒤로 돌아누워 말했다.

“어떤 고생이요?”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같이 있어 주지 못했잖아요.”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동생들은 북제에 가 있어요. 섭령아도 시집을 갔고. 그렇다고 유가 군주가 당신과 놀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도를 나와 강남으로 왔다가 또 담주로 왔으니, 곁에서 친근하게 이야기 나누던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당신 혼자 낯선 곳에 와 있다는 말이에요.”

범한의 말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임완아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작은 소리로 한탄을 했다.

“상공은요······ 관심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걸 다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관심이 있었다면, 나한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임완아의 말에 범한은 심장이 서늘해졌다. 이에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하려던 말이 고작 그거였어요?”

임완아가 범한의 눈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완아가 싸늘하게 웃었다.

“또 뻔뻔하게 나오기 시작하는군요. 예전에 경도에 있을 때 말했잖아요. 상공이 하려는 일을 막지 않겠다고······ 아녀자가 한 말이었니 아무 힘도 없던 거겠죠. 그냥 솔직히 대해주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무슨 일이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언질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지금의 내가 아무 쓸모 없다고는 해도, 그래도 당신네 범씨 가문의 큰 손자며느리에요. 그러니 뭘 해도 나를 속여서는 안 되는 거예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범한이 은근히 화를 내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처럼 자포자기하듯 불쌍하게 굴지 마요. 내가 좋아하는 완아는 온화하지만 까불까불한 여자니까······.”

범한은 하려던 말을 절반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임완아가 예쁘게 생긋 웃고는 온화하게 말했다.

“왜 계속 혼내지 않는 거예요?”

범한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당신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별다른 말을 준비하지 않았으니까요.”

“아, 그래요?”

임완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해당타타 낭자에 관해서는 언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셈이었죠?”

범한이 잠시 침묵을 했다.

“그건 다른 문제에요. 다른 문제라고요.”

말을 마친 범한은 토라져서 돌아누워 있는 완아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 후 한 손으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임완아의 허리를 매만지며 그녀의 귓가에 바람을 불며 말했다.

“떨어져 있은 지 십여 일이나 됐는데, 무엇하러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정도면 해당타타라고 해도 그리고 범한에게 현대적인 여성이 되도록 교육을 받은 범약약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범한을 침대 아래로 냅다 걷어차 버릴 것이다.

임완아는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라 생각이 매우 세심하고 깊었다. 그리고 유달리 남녀 문제에 관해서는 가장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던 터였다. 이에 임완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낭자는 신분이 예사롭지 않으니 그자체만으로도 번거로운 일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상공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 나중에 심각한 고민거리가 될 수 있다고요.”

해당타타를 인정해주는 듯한 말이었지만 범한은 마음이 홀가분해 지기는커녕 오히려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 특히 남자가 어느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고 말하면 대개 거짓말처럼 들린다.

물론 애초에 평생 한 여인만을 사랑해서 절대 한눈팔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더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동쪽 산에서는 옥을 감상했고, 서쪽 산에서는 일몰을 감상했고,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걸 감상했는데, 자신을 속이고 세상까지 세뇌하려 한들 소용이 있을까.

“그런데 같이 마작할 사람도 없이 매일 혼자 집에만 있으면 정말 무료하겠어요.”

범한은 그 문제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범한이 보기에 해당타타가 범씨 가문으로 시집을 오리라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문득 깨달은 거지만, 범한에게 해당타타는 친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범한은 진작부터 그 일을 가지고 골치를 썩을 필요가 없었고, 아내도 그 일 때문에 번뇌하고 이런저런 일로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

“황궁에 계신 마마님들께서는······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그리 사시는 거겠지요.”

범한의 말이 가슴 깊은 곳에 있던 제일 취약한 곳을 건드리자 임완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현 왕조의 공주, 아버지는 어엿한 재상이었지만 폐쇄된 궁궐 안에서 지내며 부모의 얼굴은 몇 번 본 적 없었고, 황궁 내 마마님들의 집단 양육을 통해 자라다시피 했다. 그래서 임완아는 타고나게 총명한 것 외에도 그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때문에 냉철하게 총명한 것은 물론, 권력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일들을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본인 정도의 능력이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데 임완아는 장 공주와의 관계 때문에 음모란 것에 살짝 반감이 있어 조용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상공과 어머니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바람에 자신의 능력을 빛나게 할 적당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범한과 임완아가 아주 오래전에 함께 논의했던 사항이기도 했다.

누구든 사람으로 태어나 자신의 환경 안에서 있을 곳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상실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만약 임완아가 가정만 돌보는 평범한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의 수발을 들고, 자녀를 키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임완아는 그런 식의 평범한 여인으로 살면 언젠가는 회의감이 들도록 태어난 사람이었다. 특히나 임완아가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범한 곁에서는 빛나고 있으니,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임완아는 어느 순간 자기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버렸다. 과거 범한이 담을 넘나들던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한 채 범한을 위해 아이를 가질 준비를 했다. 그리고 상공의 마음을 자기에게 묶어 두면 된다는 생각으로 비개가 조재해 준 약을 먹지 않는 모험을 감행했다.

범한은 섬세하고 민감한 사람이다. 그래서 처의 행동에 무슨 깊은 뜻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요 몇 달 동안 처의 미간에 옅게 근심을 드리우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썩 훌륭한 해결책을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범사철은 삶의 이상을 장사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그를 북쪽으로 보내 밀무역을 하도록 했다. 범약약의 삶의 이상은 범한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고하 문하로 들여보냈고, 만리타향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보도록 했다.

하지만 임완아는······ 그녀는 앞의 두 사람과 달랐다. 자신의 아내였으니, 그녀의 삶의 이상은······ 어쩌면 더 속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임완아의 가치를 실현시켜 주려면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 걸까?

춘시 사건을 비롯해 다른 일만 봐도 범한은 아내가 황궁과 관련한 문제에서 강점을 지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범한이 계획을 세울 때 그녀가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범한과 신양 쪽이 물과 불처럼 대치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범한으로서는 임완아를 중간에서 난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훗날 서로 칼끝을 겨눠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몰라요.”

사실 이 부부가 이렇게 대놓고 말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에게 그 일은 조심하고 회피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임완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공도 알다시피, 나는 내 어머니께 감정이 깊지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내 어머니인걸요.”

“나도 알아요.”

범한이 임완아의 머리카락에 나는 향기를 맡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어 갔다.

“믿어 줘요. 적어도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과연 믿을 수 있는 말일까?

범한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완아, 집에만 있으면 무료할 테니······. 내가 하는 일 중 일부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힘들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거예요.”

그러자 임완아가 궁금하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몸을 돌려 범한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예요?”

범한은 품 안의 보드라운 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풍만한 두 곳을 주무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돈 많은 사람이란 건 당신도 알잖아요.”

“그야 그렇죠.”

임완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둑놈 같은 손을 소리가 나게 한 대 쳤다.

그러자 범한이 정색하며 말했다.

“연초에 강남에 처음 내려갔을 때였어요. 강남은 부유한 곳인데도 수많은 백성이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있더군요. 강남이 그 모양인데 강북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큰 강 일대에서 수재를 당한 백성들은 어찌 살아야 할이지 더더욱 난감할 거예요.”

임완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황실 금고에서 찾아낸 은전은 벌써 하운 총독 관아로 보냈다 하지 않았던가요?”

“그거는 일부일 뿐이죠.”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 말했다.

“조정에서의 일은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조정에서는 믿을 만한 관원이 별로 없으니, 내가 아무리 감찰원과 양만리를 시켜 조정으로 보낸 은전을 지켜보고 있도록 해도 없어질 돈은 없어지겠지요······. 다른 사람 언급할 필요 없이, 적어도 범씨와 류씨 가문, 심지어는 황궁도 그 은전을 가지고 재미를 봤을 거예요. 그래서 내 생각에는······ 어떤 일들은 우리가 직접 하는 게 더 쉬워졌어요.”

“그게 무슨 일인데요?”

“강남에는 정말로 돈이 있어요. 그래서 거부를 이룬 상인들은 천만 냥에 달하는 은전 정도는 척척 내놓을 수 있어요.”

범한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반면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도 많아요······. 이건 불균형에 관련된 문제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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