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금의환향 (3)
그때 주인과 여종이 서로 마음을 나눌 새도 주지 않고 서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새가 잔뜩 나타나기라도 한 듯 그들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며 범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범한은 호위와 홍상청이 저 멀리 한참 떨어진 뒤쪽에서 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에 앞장서서 오고 있는 여인들이 얼마나 마음이 급한 상태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분 냄새가 코를 확 덮쳐오는 가운데 저택의 여종들이 범한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껏 기쁜 기색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예를 갖추고 천천히 인사했다.
“도련님께 인사드립니다!”
여종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동의 빛이 어리어 있었다. 그리고 2년간 떨어져 지낸 안타까움도 살짝 드리워져 있었다.
이 시각, 저택 내 집사와 종들도 서둘러 다가와 무릎을 꿇고 범한에게 절을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무릎을 꿇었다. 범한 옆에 서 있던 소홍이란 여종도 순간 어안이 벙벙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범한이 그녀의 팔뚝을 잡아 일으키며 어려서부터 함께 지낸 여종들을 향해 웃는 얼굴로 꾸짖었다.
“모두 일어나거라!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안 그러더니만, 어째 2년을 나갔다 왔더니······. 모두 감히 내 뜻을 거역할 셈이냐?”
그러자 여종들이 히히히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누구는 문안 인사를 하고, 누구는 찻잔을 가져다가 차를 따라주고, 누구는 부채를 가져다가 부채질을 해주었다. 물론 그중에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를 2년 동안 못 보아 쌓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범한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는 이도 있었다. 모두들 제각기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범한은 좌우에 하나씩 끌어안고 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길옆에서 호위(虎衛)와 홍상청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범한은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속으로 말했다.
‘이 어르신께서는 어려서부터 분첩 속에서 자라 이런 생활이 편하다오. 그런데 다 큰 어른이 되어서는 보기는 뭘 보는 거요?’
후원으로 들어서자 누군가가 느닷없이 호통을 쳤다.
“체통을 지키거라!”
그러자 범한을 부축하며 희희낙락하던 여종들이 범한에게서 떨어졌다. 오랜만에 맘 편히 즐기고 있던 범한은 순간 감정이 복받쳐 활짝 웃는 얼굴로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귀품이 넘치는 노부인께서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임완아는 방글방글 웃으며 노부인의 왼팔을 잡고 부축하고 서 있었다. 어엿한 3 황자마마께서는 노부인의 오른손을 조심스레 잡고 있었다. 사사는 커다란 차양을 들고 노부인 뒤쪽에 숨어서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은 마치 ‘도련님은 오늘 죽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 정도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노부인이라면 경국에서는 황제 폐하의 유모밖에 없었다. 황제와 왕야, 상서를 길러냈고 제사 대인을 교육한 사람은 범씨 가문의 할머니인 담주의 노마님밖에 없었다.
범한은 자상하고 차분한 노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저도 모르게 괴성을 흘리며 곧장 그녀에게 달려갔다.
한데 당신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범한을 향해 노부인이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멈춰라!”
깜짝 놀란 범한이 어안이 벙벙해 제 자리에 섰다. 그리고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노부인이 2년 만에 만난 손자를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범한의 얼굴에서 시작해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살피더니 녀석이 아직 사지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범한의 발 쪽에 시선이 꽂히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더 차갑고 엄하게 변해버렸다.
“가서 발부터 닦고 오너라. 다 큰 녀석이 어찌 그리 예절도 모르는 게냐.”
노부인이 엄하게 꾸짖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아래쪽을 보니 두 발은 진흙투성이였다. 그제야 절벽에 오를 때 신발을 일찌감치 내버렸다는 사실이 생각나 울상이 된 얼굴을 치켜들고 불쌍하게 말했다.
“할머님······.”
“먼저 닦고 오너라!”
노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던 여종들이 하하하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의자를 가져다가 범한을 앉히고 뜨거운 물을 끓여다가 범한의 발을 씻어주었다. 여종 하나는 범한이 몇 년 전에 신던 신발을 들고 나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도련님, 그동안 발이 더 자랐을 수도 있겠네요.”
범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다. 그러다 할머니 옆에 있는 완아가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고 있자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려 주었다. 그러자 임완아가 혀를 날름 내밀고는 사랑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임완아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신기했다.
‘하늘도 땅도 무서워 않는 상공이 왜 할머니는 이렇게나 무서워하는 거지?’
발도 닦고, 신발도 신자 범한은 쭈뼛거리며 계단 쪽으로 몸을 굽혔다.
노부인은 범한의 표정을 보는 순간 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내 범한이 담주에서 떠나던 날 했던 정신 나간 짓이 생각나 굳은 얼굴로 엄하게 꾸짖었다.
“······요 원숭이 같은 녀석,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원숭이?’
임완아와 3 황자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후원은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집사, 종들, 호위, 홍상청은 모두 밖에서만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원숭이란 단어가 들려오자 순간 범한이 저택 안에서 가짜 산이며 집 꼭대기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연상하고 말았다. 홍상청은 흰 돛이 활짝 펴져 있는 큰 배에서 제사 대인이 돛대를 폴짝거리며 올라갔다 내려오는 장면이 떠올라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노마님께서 딱 들어맞는 단어를 선택하셨군!’
범한은 할머니께서 겉으로만 강하게 말씀하셨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히죽거리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당황한 노부인이 범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거기 서거라! 거기 서라니까! 그만 오래두!”
명령이 떨어졌지만 범한은 이미 할머니 곁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9등급 고수답게 어느새 노부인을 끌어안고 ‘쪽’ 소리를 내며 그녀 얼굴에 사납게 뽀뽀를 날려주었다.
후원 안팎에서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할머님, 제가 죽도록 보고 싶으셨죠?”
범한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데 2년 전보다 할머니가 더 마르시고 얼굴 주름도 더 깊어지셔서 범한은 저도 모르게 슬퍼졌다.
범한은 할머니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간 후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머리를 세 번 조아리며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듣자 하니, 소주에도 낭자가 있다던데?”
할머니와 손자는 친근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화제 전환을 했다. 범한이 말을 돌릴 새도 없이 말이다.
범한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임완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셨는지 임완아도 모르는 눈치였다. 사사의 경우는 자신은 노마님께 절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며, 자신은 무고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주요?”
범한이 껄껄껄 웃으며 할머니에게 계속 말했다.
“어떤 낭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소주에 포월루를 열어서 제게 아가씨라면 넘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자 노부인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건 다른 일이지 않니. 멀쩡한 벼슬 내버려 두고 그런 풍류를 파는 장사나 하다니.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범한은 창피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빙그레 웃었다.
“그건 사철이가 하는 일입니다. 저는 그저 동생을 돌봐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말을 마친 범한은 노부인을 잠시 바라본 후 시선을 옆에 앉아 있는 3 황자에게 향했다. 그러자 3 황자의 자그마한 얼굴에 잠시 불편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애당초 포월루는 요 녀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서였다.
노부인이 탄식을 했다.
“요리조리 빠져나갈 생각 말거라. 내가 누구를 두고 말하는 건지 잘 알지 않느냐.”
범한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말한 사람은 당연히 해당타타였다. 자신과 해당타타와의 일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할머니는 세상일에 아예 관심도 없는 순진한 노마님이 아니시니 당연히 그 일을 알고 계실 수밖에.
다만······ 그 일에는 문제가 좀 있었다. 더군다나 아내 임완아가 바로 앞에 있지 않은가.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범한이 고개를 들고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할머니, 바깥에서 떠도는 말도 안 되는 말은 듣지 마세요. 해당타타 낭자는 강남에서 저의 이런저런 일들을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노부인은 범한의 말을 믿어주기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러워했다.
“북제 사람이 네 곁에서 딱 붙어서 대체 무얼 했단 말이냐? 그 낭자가 평범한 여인도 아닌데 말이다.”
범한은 말문이 턱 막혀 슬쩍 임완아의 눈치를 봤다. 아내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그녀의 작은 손은 소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에 범한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고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라고?”
노부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청 안에 아직 여러 사람이 있어 대놓고 이러쿵저러쿵하기가 뭐해 다음과 같이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일들은 닥쳤을 때 바로 해결해야 하는 법인데······. 나는 숨기는 게 제일 싫구나. 만약 네가 떳떳하다면 그 여인을 데려와서 보여다오. 그런데 그럴 의향이 없다면 주의해서 행동하거라. 우리 경국 사람은 아니어도 어찌 되었든 여인이란다. 그런데 어찌 여인에게 그런 오명을 뒤집어씌울 수 있느냐!”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 말을 잘 들고 있느냐?”
노부인이 범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일은 그렇다, 아니다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후안무치함이 할머니께 간파당해 버렸고 해당타타는······ 랑도가 이미 소주로 갔으니 해당타타의 성격 상 자신의 사문과 맞서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북제로 돌아가면 다시는 만나기 힘들 텐데. 그러면 뒷일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게 되겠지.
“할머니······.”
범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2년 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만나자마자 혼내시기부터 하십니까? 나중에 다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노부인이 싸늘하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2년 동안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은 건 알고 있던 거니?”
노부인이 범한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얼굴의 주름이 점점 펴지기 시작하더니 웃으며 꾸짖었다.
“담주에 왔으면서 서둘러 돌아오지 않고, 제일 먼저 들판으로 뛰어가다니! 다 큰 녀석이 어쩜 그리 철딱서니가 없누.”
범한은 이제야 깨달았다. 할머니께서는 질투하고 계셨던 거다. 이에 범한이 하하하 웃었다.
“도중에 배에서 내려 좀 돌아다니고 왔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은 할머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우선 눈빛을 날려드렸다. 할머니와 손자, 이 두 사람은 16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니 상대가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는가. 노부인이 가볍게 두 번 헛기침을 했다.
“늦었구나. 가서들 연회 준비들 하거라. 나는 안지와 더 할 얘기가 있단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몸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3 황자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려 했다. 노부인은 황족의 유모로 황가의 가노(家奴) 중 신분이 제일 높은 사람이었고, 이에 윗사람에게 예절을 지키는 걸 유난히 중시했다. 임완아는 범한의 아내이니 조모인 노부인은 임완아의 신분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저택에 머물고 있는 3 황자에 대해서만큼은 한결같이 삼가고 예절 바르게 행동했다.
한데 3 황자는 노부인의 지위가 매우 독특하기도 했고, 자신이 줄곧 범한을 스승으로 불렀던 터라 가만히 그녀의 인사를 받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어린아이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엉덩이에 불이라도 난 듯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범한이 앞으로 나아가 임완아의 손을 부드럽게 이끌더니 그녀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그러자 임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분부에 따라 사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