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금의환향 (2)
그런 과거를 떠올리던 젊은 청년들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 그중 한 청년이 말했다.
“흠차 대인이 해준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어.”
목소리도 작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자 청년이 괴로워하며 다시 말했다.
“정말이야. 그······ 보물 캐는 이야기도 기억하고 있는걸.”
여전히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가운데 달걀 바구니를 안고 있는 아줌마가 다시 말했다.
“우리 범씨 도련님은 정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어.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도 알고 이상한 일들도 많이 했었지······. 범씨 가문 저택 여종들하고 나왔을 때는 여종들 물건을 대신 들어주기도 했잖아? 집안의 재산일 뿐인 종들에게도 다정한 분이셨지.”
이처럼 여러 이야기로 항구가 시끌벅적할 무렵 담주 지주가 관리들을 이끌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관복을 재빨리 정리하던 관리들은 정박한 배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늦지 않았으니 죽어라 뛰어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배 안에 흠차 대인이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다리에서 내려온 전리는 지주 대인의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울먹이며 말했다.
“대인은 도중에 배에서 내리셔서 이미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지주는 당장 범씨 가문 저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섣불리 항구를 떠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흠차 대인이 떠난 배 위에서 관리 한 사람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한의 심복이 분명한 이상 지주도 그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항구에 둘러서서 범한을 기다리고 있던 담주 백성들도 소식을 듣고는 놀라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쉬며 섣불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감찰원 관복을 입은 홍상청이 감찰원 밀정을 데리고 배에서 내려 항구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감찰원 관리의 매서운 눈빛이 겁을 먹은 사람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모두의 걱정과 달리 홍상청은 목소리를 다정했다.
“제사 대인께서는 고향 분들이 뜨거운 햇볕을 견디며 항구에 서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다른 방법으로 배에서 내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시간을 내어 고향 친지분들을 만나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지주 대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제사 대인께서는 모두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하시며 마음만 받을 테니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 * *
담주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절벽 위를 힘껏 기어오르는 흰색 그림자가 보였다. 사실 힘껏 기어오른다는 표현은 이 장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절벽에 붙은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은 발끝과 손가락을 사용해 너무나도 손쉽게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 전체가 미끌미끌한 절벽에 붙어서는 흐르는 곡선처럼 부드럽게 위로 오르고 있었다.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오지 않을 새 둥지와 이끼만 가득한 절벽 위를 제집처럼 편하게 오르고 있었다. 방향을 선택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었고, 손과 발도 망설임 없이 정확하게 내디뎠다. 마치 어느 부분에 돌이 돌출되어 있고 어느 부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틈이 있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열여섯 살 때까지 족히 10년 동안 오죽의 보호를 받으며 절벽을 기어올랐기에 이곳 어디에 풀과 나무가 있는지 자기 손금처럼 훤히 알고 있었다.
2년 동안 기어오르지 않았지만 범한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이곳 절벽의 바닷새와 진흙의 느낌을 떠올리며 절벽을 기어올랐다.
얼마 뒤 절벽 꼭대기에 선 그가 아래 바위와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와 멀리 보이는 담주성을 바라봤다.
몸을 돌린 그의 눈에 무리를 지어 피어 있는 작은 국화꽃이 보였다. 활짝 핀 꽃뿐만 아니라 절벽 위에 모든 것들이 2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범한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앉았다. 이전처럼 벼랑 끝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흔들던 그의 마음속에 걱정과 그리움이 샘솟았다.
모든 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지만 오죽 아저씨는 이곳에 없었다.
바닷바람이 범한의 얼굴에 불어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그를 깨웠다. 범한은 절벽에 조용히 앉아 환생 후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쭉 되뇌어 보던 중이었다. 오죽 아저씨와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익숙한 절벽 꼭대기에 올라와 보니 감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바로 이 절벽에서 소년 범한은 오죽에게 세 가지 소원을 이야기 했었다.
아이를 많이 낳겠다고 했다.
책을 여러 권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정말로 잘 살 거라고 했다.
범한의 소원에 오죽 아저씨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 주었다.
——범한에게는 여자가 많아야 한다. 또한 범한은 병사를 모아야 하고, 종을 많이 부려야 한다. 그러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는 권력이 있어야 가능하니, 두 사람은 경도로 가야만 한다.
* * *
인생 2회차를 사는 동안 범한은 많은 이성을 만나보았다. 비록 그중 곁에 남은 이는 얼마 안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직 자식이 없었지만 범한은 서두르지 않았다. 병사는 아직 모으지 않았다. 하지만 《홍루몽》은 곧 결말을 낼 수 있을 정도까지는 썼다. 범한은 황궁에서 시를 짓고, 미인을 만나고 글을 썼으며, 의심할 여지없는 이 세계 최고의 명사수가 되어 있었다.
금전과 권력도 이미 넘칠 만큼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정말로 정말로 잘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이란 원래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이켜보고 총결산을 하기까지 범한은 그리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다. 절벽에 오죽 아저씨가 없는 것도 확인했겠다, 범한은 곧장 바짓단을 걷어붙였다. 그런 후 절벽 위 돌들을 새가 스치고 지나가듯 빠르게 디디며 아래로 내려왔다.
범한이 담주로 돌아오자마자 할머니부터 뵈러 가지 않고 절벽부터 와본 건 줄곧 오죽을 걱정하고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근 반년 동안 오죽이 없다는 이유로 그가 사람들 앞에서 초조함 같은 걸 드러낸 건 아니었다. 물론, 오죽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 안 된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범한은 속으로 오죽을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범한이 경도를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거울처럼 얼어붙은 감찰원 내 작은 연못 앞에서 진평평은 오죽이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세계에서 오죽 아저씨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인데. 작년 여름에 아무도 모르게 일전을 치른 후 오죽 아저씨와 고하는 상처 치료에 수개월을 썼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오죽 아저씨는 상처 치료를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맹인 아저씨의 신출귀몰함에 범한은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오죽 아저씨가 부상을 당했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걱정을 멈출 수 없었고, 무언가 다른 게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장장 반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다니. 이 사실은 범한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이에 그는 담주로 돌아오자마자 오죽 아저씨 흔적 찾기에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오죽 아저씨는 이곳에 없었다. 대체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다친 건지.
* * *
노을이 질 무렵 범한은 혼자서 차분하게 담주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자라면서 맡아 온 공기 중의 짭조름한 냄새를 탐닉하듯 들이마셨다. 물론 탐닉했다고 해서 야릇한 감정이 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튼 범한은 기분이 좋아졌다.
성문, 면포 가게, 술집 앞을 지나치는 동안 하늘은 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에 담주 백성들 중 그 누구도 이 젊은이가 자신들이 그토록 목을 빼고 기다리던 흠차 대인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계속 길을 걷던 범한은 어느새 잡화점 앞에 와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소리를 들어보고는 옆쪽에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푸른 이끼를 밟고 서서 먼지 가득한 문 옆을 손으로 더듬어 열쇠를 찾아낸 후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잡화점 안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선반 위의 물건들은 일찌감치 도둑들이 훔쳐가고 없었지만 뒤쪽에 놓인 도마만큼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그 위에 새겨진 가는 칼자국들은 옛날에 한 소년이 이곳에서 무채를 썰었다고 이야기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껄껄껄 웃으며 도마 위에 놓인 칼을 집어 들고 두어 번 휘둘렀다. 오죽 아저씨가 자신에게 ‘헌납’한 칼이었다.
‘오죽 아저씨는 도마 위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채를 썰었는데. 나는 한참 후에야 겨우 그걸 해낼 수 있었지. 무채와 함께 먹는 고량주의 맛이 꽤 괜찮았는데.’
* * *
범한은 그곳에서 너무 시간을 지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가 담주 백작가 저택 앞에 와 섰을 때 태양은 등 뒤에 산 아래로 아직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채 따사로운 햇살로 떠들썩한 저택 안팎을 비춰주고 있었다.
오늘은 흠차 대인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요한 날이다. 그래서 저택 내 종들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자랑스러워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저택 밖에 내걸린 붉은 등처럼 발그레하니 의기양양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담주성의 관원들도 위아래 할 것 없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모두 공손히 돌려보냈다. 이에 지금 이 시각 저택 앞을 오가는 건 종들과 집사뿐이었다.
범한이 저택 문 앞에 서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낯익은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에게 몇몇 낯선 얼굴들이 들어왔다. 요 몇 년 사이 새로 들인 사람인가 보다.
“젊은이, 여기에 서 있으면 안 돼요.”
집사 하나가 흰옷의 젊은이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험악한 말투는 아니었다. 백작가 저택의 노부인이 가풍을 엄격하게 관리하는지라 이곳 사람들은 밖에서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할 때를 놓치고 말았다. 저택 안에서 나온 사람 하나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서였다.
“아······!”
비명을 지른 건 어린 여종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여종이 범한만 바라보며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다가 하마터면 높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깜짝 놀란 범한이 얼른 그녀를 잡아주었다.
어린 여종은 감전이라도 된 듯 얼른 범한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범한을 바라보며 팔만 비비꼬았다. 그사이 문밖 상황이 궁금해 나온 노인들이 노을 속에 서 있는 범한을 발견하고는 “아!”, 하고 소리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어린 여종이 얼굴이 발갛게 상기 된 채 저택 내부를 향해 소리쳤다.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라고?”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얼른 노마님께 알려!”
“도련님!”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껏 즐거운 분위기였던 저택 내부가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많은 사람이 범한을 맞이하러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범한은 집사들의 조심스러운 안내를 받으며 앞장을 선 어린 여종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옆에서 황송해 하고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한소리 했다.
“이 길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어디가 위험한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군. 돌아가 보게.”
그러자 그들은 “이런.”, 하고 한숨을 내뱉고 찜찜한 마음으로 물러갔다.
범한은 옆에 있는 어린 여종이 눈에 익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알고 있던 이름 중에는 없는 것 같아 이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청과 소아는 아직도 잘 지내느냐?”
어린 여종은 순간 기분이 상해 생각했다.
‘집을 떠난 지 2년도 안 되셨는데. 도련님께서는 벌써 내 이름을 잊어버리신 거야? 언니들 말로는 도련님은 어려서부터 여종들을 아껴주는 좋은 주인님이라고 했는데. 제일 부드럽고 가장 다정하게 대해주신다고.’
여종이 참다못해 눈을 슬쩍 흘기고 작은 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도련님, 소청 언니는 이미 시집을 갔습니다. 소아 언니는 아직 저택에 남아 있고······ 소녀의 이름은 소홍입니다.”
“소홍이라고?”
여종의 원망 담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범한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발을 접지를 뻔했다. 그가 어린 낭자의 맑고 수려한 용모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겨우 2년 동안 어째 이리 많이 자랐느냐!”
여자는 자라면서 18번 변한다 했다. 범한이 담주를 떠날 때 소홍은 겨우 12살밖에 안 되는 어린 여종이었다. 차를 따라주던 작은 여종이 벌써 이렇게 다 큰 여인이 되었다니. 몸도 얼굴도 이렇게나 다 자란 티가 나니 범한이 못 알아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