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천자의 근심
“짐은 운예에게 기회를 주었네.”
뒤에서 황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진평평이 아무 말 없이 생각했다.
‘아마······ 폐하가 내게 기회를 주셨다면 황태후를 설득하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설득했을 텐데.’
다만 지금까지도 진평평은 황제의 강렬한 자신감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비록 그는 줄곧 진실에 가장 가까워지려 노력했지만 현공묘에서 범한의 끼어드는 바람에 오죽에게 보여주려 한 그 장면을 완전히 끝맺지 못했다.
“폐하.”
“말하거라.”
“폐하께서 앞으로 일들에 대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진평평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절대 물어보지 않을 문제에 대해 물어봤다.
황제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턱수염이 밤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혼자 세상의 모든 걸 통찰했다는 듯한 중년 남자의 눈빛이 살짝 부드럽게 변했다. 황제가 이처럼 감정적 변화를 보인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진평평이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이 일에 대해 물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지금까지 이 일에 관여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는가?”
황제가 비웃는 말투로 물었다.
“이전에 짐이 자네에게 의견을 구했을 때도 자네는 늙은 토끼처럼 멀리 도망가려고만 했었지.”
진평평이 쪼글쪼글한 입을 오므리며 대답했다.
“아이들의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폐하의 자식들입니다.”
황제가 그 말뜻을 이해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그가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짐은 아직 깊이 생각해보질 않았네.”
그 말을 들은 진평평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농촌에 사는 노인처럼 힘겹게 한숨을 내쉬자 황제가 말했다.
“승건이는 너무 유약하고, 첫째는 지나칠 정도로 순박한 면이 있어. 그리고 둘째는······.”
그가 미간을 찌푸린 뒤 말을 마무리 지었다.
“셋째는 너무 어리네.”
진평평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황제가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바퀴 달린 의자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는 뒷짐을 지고 진편평의 앞으로 걸어갔다. 한백옥 난간 너머 깊고 그윽한 황궁의 광장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마치 천군만마와 천하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짐이 아이들을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네.”
황제의 뒷모습은 약간 쓸쓸해 보였다.
“서무는 어느 날 술을 마시고는 직접 짐 앞에서 이야기하더군.”
이 말을 내뱉는 황제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인가?”
황제가 고개를 돌려 연로한 진평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질문은 진평평에게 하는 것이자 자신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었으며, 또 황궁 안과 밖에 있는 자신의 불안전한 아들들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멀리 떨어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궁녀와 태감들은 폐하와 진 원장의 대화가 들리지 않아 이 두 사람이 이후 용상을 누구에게 물려줄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황제가 될 사람은 무정해서도 안 되지만 정이 많아서도 안 되네.”
황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주위 사람들을 무정하게만 대하면 세상이 각박해지고 큰 혼란이 생기게 되지. 반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정이 많으면 해를 입게 되어 천하의 주인이 사라지게 되니 또한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네.”
“짐은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지만, 짐이 천고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려면 후세에서 계승해 이뤄줘야만 하네. 그러니 황제를 고르는 일은 개인적인 호감으로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황제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를 10년 동안 지켜본 결과 그 애는 무정하면서도 정이 많은 사람이라 일을 계승해나갈 가능성이 있네. 하지만 짐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천하가 막 통일되었을 때일 테니 아직 세상이 혼란스러울 게야. 과연 그런 상황에서 그 애가 모진 마음을 먹고 강인한 방법을 사용해 짐이 통일한 천하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둘째는 또 어떠한가?”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짐은 처음에는 그 애를 높이 평가했네. 요 몇 년 동안 승건이와 싸움에서 단 한 번도 불리한 위치에 있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후 정이 많은 척하며 그처럼 무정하게 행동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네. 그 애가 만약 용상에 앉게 된다면 역사에는 어진 황제로 기록되겠지만 다른 아들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진평평이 조용히 황제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 준수한 소년이었던 2 황자에게 폐하가 지금의 역할을 강요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큰 압력과 유혹을 주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겠는가? 폐하의······ 사자를 기르는 방식이 어찌 제왕의 후계자를 기르는 데 적합하다 할 수 있겠는가?’
몇 년 동안 경국 황제가 아들들이 황위를 두고 싸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툼을 방임한 이유는 간단했다. 천하를 통치하는 건 어려운 일인 만큼 그에 걸맞은 인재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천하를 누가 책임질 것인지에 관해 그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젊은이가 그처럼 먹물과 같이 시커먼 강물에 서서 강변 풍경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아들들의 많은 부분을 바꾸면서도 그 결과가 자신의 바람과 다를까 봐 걱정스러웠다.
“1 황자는 어떠하십니까?”
진평평은 오늘 저녁에 한 말은 이미 그가 평상시에 가지고 있던 이념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놀란 황제는 진평평이 이전에 생각난 대로 말하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짐은 자네가 그 애를 언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황제가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 모자의 목숨을 자네와 그녀가 구해줬으니 그 애에게 정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 짐도 그 애를 좋아하지만······ 너무 감정적이야. 마음이 여린 사람은 치열한 싸움을 견딜 수 없네.”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그 애는 어쨌든 동이족의 피가 섞여 있어 모두에게 신망을 받기 힘드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후에 만약 동이성을 공격해야 한다면 그 애가 모진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진평평이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 황궁 안에서 진평평은 그 어느 때보다 한숨을 많이 쉬고 있었다.
“그래서 짐은 그 애는 고려하고 있지 않네.”
황제가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셋째는······ 아직 어려서 몇 년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그때 진평평이 갑자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천하가 놀라 진동할 만한 말을 꺼내 놓았다.
“범한은······ 어떠하십니까?”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진평평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던 황제가 갑자기 허리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태극전 앞 넓은 복도에 울려 퍼지자 복도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녀와 태감들이 놀라 몸을 떨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웃음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황제가 미소를 거두고는 조금의 의구심도 없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 애가 가장 적합하긴 하네.”
이 세계에서 범한이 보여준 정이 많으면서도 무정하게 행동할 줄 아는 기질은 경국 황제가 요구하는 후계자의 자질에 가장 부합했다. 온화하고 정이 많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서슴없이 잔인한 방법을 사용할 줄 알며, 마음속 깊이 백성을 아낄 줄 아는 사람 말이다.
범한의 성격을 떠올려 보던 황제가 속으로 생각했다.
‘백성을 아낄 줄 아는 어진 심성은 어미에게서 물려받은 거겠지?’
만약 황제의 이 말이 밖에 알려졌다면 경국 조정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천하 전체에 어떤 강렬한 변화가 생길 것이었다.
“하지만 명분이 없습니다.”
진평평이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황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분이라······ 짐의 말 한마디에······ 그때 사람들은 모두 숙청을 당했네.”
진평평은 폐하가 말하는 사람들이 황후 가족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마른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제가 봤을 때는 내버려 두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러는가? 짐은 줄곧 자네가 범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지켜보니 자네는 범한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더군.”
“제가 그 애를 아끼고 신경 쓰는 건 일 때문입니다.”
진평평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와 범건은 항상 의견이 충돌해 왔지만······ 제가 봤을 때 범한의 성격상 범씨와 유씨 집안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땅속 백골이 되는 건 원치 않을 겁니다.”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진평평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만약 황제가 정말 범한에게 용상을 물려주려 한다면 황제는 자신이 죽기 전에 범씨와 유씨 집안사람들을 모두 숙청할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 때문에 범씨와 유씨 집안이 숙청당하는 걸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할 것이었다.
진평평은 황제가 범한을 황위 계승자 후보에 올려놓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더욱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에야 진평평은 자신이 가려는 길이 막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그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폐하가 병에 들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길 말이다.
“짐이 첫째와 안지를 좋아하는 건 그 아이들의 심성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네.”
황제가 황궁 야경을 바라보며 용상을 물려줄 후계자에 대한 결정적인 선택을 내리고 있었다.
“짐이 아들들의 마음을 봤을 때······ 만약 이 일이 없었다면 그만이지만 생긴다면 짐은 황태자와 둘째 중에서 누가 짐을 보살필 마음을 품고 있는지 보려고 하네.”
진평평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아비가 자식에게 보살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
* * *
‘황제의 시야는 항상 자신의 주변 사람들보다 더 멀리 있는 법이지.’
이런 생각을 하는 범한은 지금 원숭이처럼 높은 돛대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오른쪽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 그가 짠 내가 나는 습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상쾌한 함성을 질렀다.
바다를 나가는 건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경도에 있는 그 연못물이 얼마나 더러운지나 관료 사회의 골치 아픈 일들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교주에 쌓여 있는 죽은 사람의 머리도 더는 볼 필요가 없었다. 범한은 담주에서의 어린 시절처럼 매일 배 위를 기어오르고 내려오고 하더니 마침내 가장 높은 돛대에 올랐다.
그가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따뜻하고 붉은 덩어리를 바라보며 자신은 이미 충분히 멀리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황제도 그걸 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할 뿐이었다.
교주에서 출발한 배는 경국 동쪽 꼬불꼬불한 해안선을 따라 북쪽 범한의 고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시 태어난 이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담주에서 경도로 온 이후 범한은 검은색 마차를 타고 검은색 연의를 입고, 가늘고 긴 검은색 비수를 찬 채 암흑 사이를 걸어왔다. 한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에서부터 밖까지 모두 검은색이었다.
오늘 드넓은 바다는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랬고, 높이 솟은 돛대에 걸린 하얀 돛은 구름을 향해 날갯짓하는 거대한 새처럼 펄럭였다.
영화<포레스트 검프>에서 댄 중위는 돛대에 매달려 폭풍과 거친 파도를 맞으며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외쳤지만 범한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흰색 평상복을 입고 바다 위 일출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즐거움만 가득했다.
하늘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건 이기적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범한과 같은 사람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주어진 삶의 매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그는 부귀영화를 원했고, 미녀들과 세상이 놀랄만한 권력을 가지길 원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는 정신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즐겼다.
담주를 떠난 뒤 비록 즐거운 일들을 많이 누리기는 했지만, 평상시에는 권력다툼이나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고 여유를 만끽하는 건 오랫동안 누려보지 못한 즐거움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범한은 경국에서 첫 번째 소부르주아였고, 그의 어머니는 분명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주인공, 빠벨 쪽에 기울여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다로 나가 바람을 쐬는 기회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무협 소설 《초류향전기》의 주인공 초류향처럼 맛있는 술을 마시고 쇠고기를 뜯으며, 허 공자처럼 이 배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비키니를 입은 미녀들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