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신하를 위하는 임금의 마음 (2)
언약해가 아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언빙운이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오늘 감찰원에서 진 원장에게 들은 말을 모두 털어놓았다.
“작은 범 대인이 원장 자리에 오르는 거야 당연하지.”
언약해가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작은 범 대인은 훗날 조정 일에 집중해야 할 테니 감찰원의 구체적인 일은 다른 사람이 처리할 필요가 있어. 너는 몇 년 동안 고생을 많이 했고, 조정을 위해 여러 일을 처리해 오지 않았느냐. 나이가 젊은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만······ 작은 범 대인께서 너를 신뢰하고 계시니 네가 제사가 되어 도와드려야 한다.”
언약해는 퇴직했음에도 여전히 감찰원의 상황이나 범한의 이후 계획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범한이 감찰원에서 계년조를 제외하고 가장 믿는 사람이 바로 언빙운이었으므로, 범한이 언빙운을 제사로 만들려는 건 의외의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약해가 말을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제사직을 맡기려 하는 것인지······. 네가 가진 경력이나 능력을 보면 한참 부족한데 말이야.”
그리고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향해 말했다.
“너는 오 대인이 아니지 않느냐.”
“아버님도······ 오 대인을 아십니까?”
언약해가 불안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감찰원에서 오래 있지 않았느냐.”
언약해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아무튼 이 일은······ 가문을 빛낼 좋은 일임이 틀림없는데, 왜 그리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냐?”
“그 비석······ 뒤에 말이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언빙운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맞아.”
언약해가 나지막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대역무도한 말이라서······ 누구든 그 말을 입 밖에 꺼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어.”
언약해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먼 곳을 응시했다.
“과거 누군가가 그 말을 입 밖에 꺼냈고, 그분도······ 죽었지.”
잠시 뒤 언약해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었다.
“너무 깊이 생각할 것 없다. 폐하에 대한 진 원장의 충심은 의심할 필요가 없지 않니. 그러니 내가 봤을 때 진 원장이 걱정하는 건 폐하 이후의 일을 게야. 임무를 위해 치욕을 참고 견디라는 말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감찰원의 기능을 유지하며 훗날을 기약하라는 뜻이겠지.”
그가 아들의 두 눈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물었다.
“설마······ 부귀영화를 위해 배신하는 파렴치한 놈이 될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언빙운은 아버지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만약에······ 제 말은 만약에 말입니다. 황실과 감찰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무엇은 선택할 거냐니?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언약해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자기 아들을 바라보며 한숨 쉬었다.
“멍청한 녀석. 나는 당연히 감찰원을 선택할 거다. 만약 원장 대인께서 나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네게 그런 말을 하지도 않으셨겠지.”
아버지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언빙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니······ 같은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겠습니다.”
“그래, 힘들겠구나.”
언약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 * *
“요 몇 년 동안 그 애를 섭섭하게 대하기는 했지.”
어둠이 짙게 깔린 황궁 안 겹겹이 포개진 처마가 차가운 빛은 내뿜고 있었다. 얇은 옷을 입은 경국 황제가 태극전 앞에서 광장을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태극전 구석에는 황제의 시중을 드는 태감과 궁녀들이 웅크리고 있었고, 안전을 책임지는 호위병도 거리를 유지한 채 떨어져 있었다. 모두들 황제와 그 옆에 있는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이 무릎에 덮은 양털 담요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품고 있던 원망이······ 많이 가신 것 같습니다.”
황제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작은 전각에 갔을 때······ 그 아이가 짐의 상황을 이해해 주긴 했지만······ 여전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야.”
진평평이 특유의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황자들 중에서 그 애가 가장 큰 권세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이미 그 애에게 줄 수 있는 걸 모두 주셨습니다. 비록 괴팍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이만하면 바보는 아니니 폐하의 마음을 이해했을 겁니다.”
“문제는 그 애가 이런 것에 별로 마음이 없다는 거네.”
황제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연말 때 그 애가 범씨 집안 사당에 들어가려고 안달한 건 짐에게 원망을 드러내려 그런 것 아니겠는가?”
황제가 진평평이 대답하길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짐은······ 그 애에게 명분을 줄 수 있지만······ 지금은 안 되네. 그러니 자네가 대신 짐의 말을 그 애에게 전해주도록 하게.”
진평평은 황제의 말뜻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황태후가 아직 살아 계시는 한 황제는 황태후의 체면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한이 지난 2년 동안 고립된 신하가 되어 한 일들로 인해 황제는 이미 그를 충분히 신뢰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마음이 있으시군요.”
진평평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이 말은 군왕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황제와 함께 자라왔고, 이후에도 여러 일을 함께해 왔기에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짐에게 마음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 아이의 마음이지. 그 애는 정말 능력을 타고났어······. 북제, 강남, 교주에서 한 일들을 보면 조정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실익은 모두 챙기지 않았나. 게다가 재물을 탐내거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는 걸 보면 보기 드문 인재인 건 확실하네.”
진평평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이제 돌아오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두를 것 없네.”
황제가 담담히 말했다.
“명씨 집안의 꼬리가 아직 잘리지 않았네. 며칠 전 자네가 입궁했을 때 말한 군산회에 대해서······ 안지에게 조사하라 하게.”
“예, 알겠습니다. 폐하.”
그때 황제가 갑자기 바퀴 달린 의자를 잡더니 밀면서 태극전 앞 긴 복도를 걸어갔다.
“자네 나이가 아직 늙었다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닌데, 요 몇 년간 완전 노인처럼 변해 버렸군. 오늘처럼 더운 날씨에도 양털 담요를 덮고 있다니, 이제는 더위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비개가 자네에게 도대체 무슨 약을 준 거지?”
“죽고자 하는 사람이 뭣 하러 약에 돈을 쓰겠습니까.”
바퀴 달린 의자가 앞으로 나아가자 진평평의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폐하, 이제 그만 미십시오. 이 늙은 노비가 황송합니다.”
단 두 사람만 있는 지금 진평평은 자신을 늙은 노비라 칭했다.
“짐이 해주고 싶어서 그러네.”
그러자 뒤에서 진중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거 성왕가에 있었을 때 황궁에서 하사한 어린 태감이었던 자네는 매일 내 시중을 들어주지 않았나. 그러니 우리 모두 이제 나이가 든 지금 짐이 다리가 불편한 자네의 시중을 들어주는 거네. 내가 자네를 도와 좀 밀어주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러나?”
진평평이 몸을 움츠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떤 때는 어제 일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이 노비가 폐하를 따라 정왕과 범 상서와 싸우던 때가······.”
황제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짐도 며칠 전부터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담주로 돌아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황제가 황궁 밖으로 행차하는 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진평평이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자네 또 무슨 걱정이 있는 것인가?”
진평평은 황제가 담주를 가는 배후에는 분명 어떤 중대한 조치가 숨어 있다는 걸 알기에 쉰 목소리로 물었다.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황제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네.”
진평평이 다시 말하려 하자 천하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짐과 자네는 시체 더미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인데 지금은 작은 일이나 만지작거리면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구먼······. 짐은 아직 생각을 다 정리하지 못했네, 게다가 가끔은 욕심도 생겨. 만약 운예가 두 놈을 설득해 움직이려 한다면······ 이 일을 계기로 우리가 줄곧 완성하고 싶어 했던 일을 완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너무 위험합니다.”
진평평이 한숨을 쉬며 자신이 어떻게 말해도 황제의 마음은 이미 굳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제가 은은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천하가 올바르지 않다면 위험을 무릎 써서라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멀리서 궁녀와 태감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직접 진 원장의 바퀴 달린 의자를 미는 모습을 보며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충성스러운 연로한 신하에게 호의를 베푸는 임금의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 드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실 담주에 가려는 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네.”
황제가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태극전 한 귀퉁이로 걸어갔다. 밤중에도 은은한 백광을 내뿜는 난간은 앞에 광장과 몇 척 정도 높아서 낙차가 있었다. 천하를 무대로 오랫동안 협력해온 두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모고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광장은 높은 황궁의 담마저도 낮아 보이게 만들 정도로 드넓었고, 멀리 남쪽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짐은 그냥 가서 보고 싶은 것뿐이네.”
황제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가보지 못하지 않았는가. 지금 담주는 이전과 다르게 물고기가 많은지도 모르겠군.”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때 폐하께서 담주에 가셨을 때는 완벽하게 저희 경국의 관할 군이 아니었습니다.”
“맞네. 동이성에서 배로 이동하면 담주에 쉽게 도착할 수 있지 않나. 담주 북쪽에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불리는 밀림이 없었다면······ 사고검은 이점이 많은 담주성 항구를 포기하지 않았을 거네.”
“그곳에 밀림이 있어 다행이지요.”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배를 타고 계시는 그분을 바다 위에서 만나지 않았습니까.”
더는 과거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지 황제가 말을 멈췄다. 그 모습을 본 진평평이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폐하께서는 천하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멀리 볼 수 있는 분이시니 소신은 폐하의 판단과 결정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장 공주마마께서 정말 그런 마음을 품고 계신다면······ 두 사람을 어떻게 설득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득할 필요가 없네. 짐에게 칼을 겨눌 기회가 생긴다는 건 천하에서 가장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 아닌가. 고행자인 고하나 백치인 사고검도 이 기회는 놓치기 힘들어할 거야.”
만약 범한이 이 말을 들었다면 황제의 지금 분석이 오주성에서 임약보가 한 분석과 일치한다는 걸 깨닫고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황제는 경국이 임약보와 같은 재상을 잃은 걸 안타까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진평평은 양털 담요를 쓰다듬던 손짓을 멈추고 황제의 말을 이해하려 하는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잠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그 두 사람이 모든 것을 걸고 도전을 하려 한다면 경국 조정이 무엇을 가지고 막을 수 있겠습니까.”
“군대를 동원해 막아야 하네.”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를 장군으로 하실 겁니까?”
진평평이 침착하게 물었다.
“섭류운은 남쪽에서 건물을 부수고는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고검처럼 백치가 된 게 아닌가 오해하고 있어 나서기에는 부적합합니다. 사실 저는 그가 늙어서 미쳐가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안지도 편지로 말했네.”
황제가 차갑게 응수했다.
“그는 어쨌든 경국의 사람이니 외부와 결탁하지는 않을 걸세.”
“그 두 사람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네. 천하를 손에 쥔 짐이 그깟 사람을 두려워서 해야 하겠는가. 누굴 장군으로 세울지는······.”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천하에서 오 선생이 가장 사람을 잘 죽이는 장군이긴 하지.”
황제의 담담하면서도 강렬한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를 들은 진평평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의 뒤에 있는 황제는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