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화 신하를 위하는 임금의 마음 (1)
밀실에 들어온 언빙운이 진평평에게 인사를 한 뒤 최근 감찰원의 업무를 보고했다.
최근 진평평은 진원에서 지내고 있었고, 범한은 멀리 지방에 나가 있어 감찰원의 일상적인 업무는 모두 언빙운이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보고를 듣던 진평평이 물었다.
“범한이 사전에 자네에게 먼저 연락을 했는가?”
언빙운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한 탓에 감찰원에서는 황궁의 의견을 제사 대인에게 전달하는 일만 책임졌습니다. 구체적인 진행 방법을 2처에서 준비하기에는 시간적 여력이 없는 탓에 모든 과정은 제사 대인이 혼자서 계획해 진행하셨습니다.”
진평평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 혼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며칠 전에 자네 아버지께서 진원에 찾아와 내 의견을 물으셨었네······. 아무래도 이 일은 제대로 처리하기가 어렵겠더군.”
언빙운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심 씨 아가씨에 대해서 감찰원 고위 관계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껏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혼사 문제에 대해 황궁 안에서 말이 나온 이상 그도 더는 버티기 힘들어졌다.
심 씨 아가씨에 관한 일은 경도에서도 극히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고, 심지어 강남에서 북제와 함께 일을 꾸미고 있는 범한도 이 일은 함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사 나중에 이 일이 알려진다고 해도 언빙운은 경국과 북제의 관계를 위해 심 씨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할 수 없었다.
“일단 미루도록 하지.”
진평평이 눈을 반쯤 감은 채 말했다.
“자네가 친왕가의 그분을 찾아가 미룰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해보게.”
친왕가의 그분이란 바로 북제에서 경국으로 시집을 온 큰 공주를 말하는 것이었다. 온화하고 정숙하면서 명문가의 기질을 갖춘 큰 공주는 경국으로 시집을 온 뒤 무시당하는 1 황자와는 다르게 황태후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언빙운은 평온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약간 감동했다. 교주 일에 관여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진 원장이 자신의 혼사에 관심을 가지니 부하로서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다.
“범한이 경도에 돌아오면 의견을 물어보도록 하세.”
진평평이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애는 이미 파혼을 시켜 본 경험이 있으니······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거네.”
최근 몇 년 동안 황실에서는 모두 네 번의 혼사를 정해주었는데, 그중의 두 건의 혼사가 범씨 집안과 관련된 혼사로, 바로 범한과 범약약의 혼사였다. 그리고 범한은 임완아와 혼인을 한 뒤 갖은 수단을 동원해 천하가 경악할 만한 소란을 피우면서까지 자신의 누이인 범약약이 혼사를 피해 도망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진평평은 범한의 행동에 감탄하며, 그보다 더 제멋대로일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제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언빙운이 비개에게 인사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1년 동안 상처를 치료하면서 비개에게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평평이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1처를 맡길 생각이네. 최근 일을 보니······ 자네도 마음의 준비를 한 것 같던데.”
언빙운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무슨 마음의 준비를 했다는 걸까 생각했다.
“범한이······ 감찰원 일에 너무 마음을 쓰게 해서는 안 되네.”
진평평이 담담히 설명했다.
“그리고 왕계년은 경국에 돌아오면 범한 옆에서 죽어도 떨어지지 않으려 할 테니 1처 수장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을 걸세. 그러니 4처에서 유능한 사람을 찾아 자네 자리를 넘겨줄 준비를 하게나.”
언빙운도 무언가 짐작하는 바가 있었기에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물러나면 자네가 범한의 자리가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네.”
진평평의 목소리는 곧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범한이 훗날 원장이 되더라도 세세한 업무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자네가 제사로서 그를 도와 대신 처리하도록 하게.”
언빙운이 아무 말 없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뒤 두 손을 맞잡았다.
“알겠습니다.”
진평평이 그를 바라보고 옆에 있는 비개도 그를 바라봤다. 잠시 뒤 절름발이 노인이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천하 사람들 모두가······ 범한이 감찰원이 세워진 뒤 첫 번째 제사라 알고 있네. 하지만 언씨 집안은 대대로 감찰원에서 일을 해왔으니 처음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자네는······ 감찰원의 세 번째 제사가 될 거네. 제사는 영광스러우면서도 위험한 자리라는 걸 기억하게나.”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느낀 언빙운은 그 자리에서 굳어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때가 곧 있으면 올 테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감찰원에 제사가 처음 등장한 이유는 나를 감독하기 위해서였네.”
진평평이 조금도 즐겁지 않다는 눈빛으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제사란 신분에 얽매여 있지 않아 평상시에는 어떤 일에도 관여하는 법이 없었지. 지금도 감찰원 일에는 일체 관여하고 있지 않네. 나중에 그를 만날 기회가 온다면······ 그가 무슨 일을 지시하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네.”
언빙운이 바로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다가 물었다.
“······그 지시가 황제 폐하의 뜻과 반대되면 어찌합니까?”
진평평의 눈빛이 벼랑 위에 앉아 있는 늙은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한참 동안 언빙운을 노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따르게.”
언빙운이 두 번 깊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속에서 치솟는 의문과 불안을 억누르며 물었다.
“제가 그 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제사 요패는 작은 범 대인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진평평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그를 오 대인이라고 부르고······ 오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네. 하지만 자네는 그를 이렇게 부를 자격은 없어. 그가 자네 앞에 나타난다면 자네는 자연스럽게 그가 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거네. 아주 간단한 문제지.”
그를 보게 되면 그가 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거라니. 아리송한 대답이었지만 언빙운은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그의 존재는 감찰원의 가장 큰 비밀이네.”
진평평이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이 점은 폐하께서 이전에 엄명을 내리신 것이니 자네도 비밀을 지키도록 하게······. 오 대인은 훗날 심각한 상황에 부닥친다고 하더라도 감찰원이란 이 기형적인 조직의 숨을 연명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이네.”
언빙운이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진 원장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감찰원은 폐하의 특수기구였다. 그래서 감찰원은 그동안 경국 관료 사회에 날카로운 검이 되어 왔고, 폐하는 그 검을 쥐고 있는 손이었다. 만일 검을 쥔 손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모든 사람이 감찰원이란 검을 부수려 할 것이었다. 그런 위험 상황에서도 감찰원을 지킬 수 있는 오 대인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황제 폐하와 버금가는 위력을 가진 사람인 건 분명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귓가에 피로한 진평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평평이 집게손가락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범한은 감찰원의 두 번째 제사일세. 하지만 자네도 그 애가 어떤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를 알고 있겠지. 감찰원은 그 애가 걸어갈 길의 한 부분일 뿐이야. 절대 여기 계속 머물게 할 수는 없네.”
“자네는 감찰원의 세 번째 제사가 되겠지만 이전 두 제사와는 하는 일이 다를 거네.”
진평평이 피곤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네의 임무는······ 만일 어느 날 내가 죽고, 범한이 제정신이 아니게 되면 모든 걸 참고 견디면서 치욕 속에서도 살아남는 거네. 살아남아서 감찰원을 지키도록 하게. 설사 표면상의 감찰원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가 계속 암암리에 확장해 왔던 첩보망은 무슨 수를 써서도 유지해야 해.”
그 말을 듣자 언빙운은 더는 침착한 척할 수가 없었다. 그가 놀란 눈빛으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 번째 제사에 관해 설명하는 진 원장의 말에는 모순되는 점들이 있어. 더욱이 오 대인과 내 임무는······ 만일 오 대인이 죽지 않았다면 감찰원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 내 임무는······ 필요 없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진 원장이 이렇게 심각하게 말하는 이유는 뭐지······.’
진평평 원장은 오 대인이 죽지 않아도 감찰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에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감찰원이란 검을 쥐고 있는 그 손이······ 갑자기 쥐고 있던 검을 내려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황제는 어째서 감찰원이란 검을 놓으려 하는 걸까?
진 원장은 어째서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일을 당부하는 걸까?
언빙운은 총명하고 침착한 사람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고,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거나 더 물어볼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그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이 뭘 하려 하는지, 앞으로 어떤 큰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도 없었고, 그 일이 사람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자네는 감찰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진평평의 말투는 언빙운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에게도 묻는 것 같았다.
질문을 듣지 못했는지 언빙운이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폐하에 대한 진 원장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진 원장에 대한 폐하의 총애는 그 누구보다도 깊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폐하를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언빙운이 말을 마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경국의 모든 백성이 속박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타인이 학대당할 때 굴복하지 않고, 재난과 악의 침략을 받았을 때 좌절하지 않기를 바란다. 잘못된 일이 있다면 두려워 말고 그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기 바라며, 흉포한 도적들에게 아첨하지 않고······.”
진평평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이 말은 언빙운뿐만 아니라 감찰원 모든 관리에게 익숙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감찰원 앞에 세워진 비석에 새겨진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비석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전혀 녹슬지 않고 금빛 광채를 뽐내고 있었고, 낙관에는 섭경미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천하 사람들은 모두 섭경미가 과거 섭가의 여주인이며, 작은 범 대인의 친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뒤에 글이 더 있네.”
진평평이 눈을 감고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뒤 누구도 감히 언급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 집에 돌아가서 자네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뭔지 알려줄 거네.”
“알겠습니다.”
언빙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말들이 한 글자로 합쳐졌다.
* * *
마차에 오른 언 공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놀라 그런지 그의 하얀색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저택에 도착한 그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종들은 본체만체하며 곧장 넓지 않은 후원을 가로질러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서재에 들어간 그의 눈에 퇴직한 언약해 대인이 어느 낭자와 함께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이 보였다. 평평한 돌판에 잡음 없이 떨어지는 광택 없는 바둑돌들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서재에 들어온 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본 언약해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을 바라봤다.
“심 낭자, 오늘은 바둑 두기 좋은 날이 아닌 모양입니다.”
전임 북제 금의위 지휘사 심중의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경국으로 도망친 심 씨 아가씨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녀가 언약해에게 먼저 인사를 한 뒤 다정한 눈빛으로 언빙운을 바라보고는 서재를 나간 뒤 조심히 문을 닫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