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화 피비린내가 나는 바닷바람
이 장면을 본 단상 아래 만 명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들 숨죽이고 복잡한 눈빛으로 단상 위 모습을 바라봤다. 평상시 위풍당당하던 고위 장군들이 오늘 자신들 앞에서 처량하게 무릎을 꿇고 헝클어진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쥐죽은 듯 조용해진 광경을 바라보던 범한이 뒷짐을 지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조용한 병사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당 장군이 아니라 단상 위에 있는 저놈들이 제독 대인을 죽인 겁니다! 간사한 자들이 군대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있는 거라고! 당 장군의 억울함을 풀어줍시다!”
동해로 파견 갔던 당효파의 심복들은 지금 상황이 뭘 겨냥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일이 흠차 대인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외침에 몇몇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고 분노와 원한이 가득한 외침들이 단상 위 범한과 고위 장군들을 공격했다.
이들은 상곤과 당효파의 심복인 중하층 교관들로 자신의 수하 관병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과연 이들의 외침에 단상 아래가 혼란스러워졌다. 근거 없는 소문들에 혼란스러운 수군 관병들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천 명 정도 되는 관병들이 앞으로 몰려들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몇몇 사람들이 병사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이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 삼인자 장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범한이 자신에게 빨리 결심을 내리라고 재촉하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이대로 반란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서 있는 단상도 산산조각 부셔질 것이었다.
이에 결심을 굳힌 그가 앞으로 걸어가 범한 옆에 서더니 매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리석은 것들! 정말 반역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것이냐? 흠차 대인과 우리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
그는 수군에서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가진 지위는 상당했기에 그의 말에 상황이 점차 안정되었다. 다만 위험은 여전히 잠복해 있었다. 군인들 안에 숨은 당효파의 심복들이 계속해서 욕을 하며 선동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범한의 손짓을 본 허무재가 눈짓으로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단상 아래 몇몇 관병들이 이들과는 다른 주장을 외치기 시작했다.
“죄인 당효파를 죽여 제독 대인의 복수를 하자!”
몇 번의 외침으로 상황을 장악되지 않자 범한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홍상청과 몇몇 안색이 무척이나 안 좋은 수군 고위 장군들이 범한 옆으로 걸어와 몸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이들은 무릎을 꿇고 있는 상곤의 심복인 고위 장군들 등 뒤에 서더니 단칼에 목을 베었다.
촤악! 촤악!
촤악! 촤악!
날카로운 검이 이들의 목을 파고들어 살을 찢고 뼈를 끊었다. 떨어져 나간 머리가 단상 위를 떼굴떼굴 굴렀고 피가 사방에 분출되었다.
머리를 잃은 수군 고위 장군들의 몸이 단상 위에서 몇 번 경련을 일으키다가 잠잠해졌다. 모두들 죽은 것이다.
단상 위아래 할 것 없이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단상 아래 있는 수군 관병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이렇게 간단히 죽일 수가 있지?’
‘흠차 대인은 어째서 사건을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고 저들을 죽인 거지?’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발 옆에 맺힌 피를 바라보았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가쁜 호흡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당효파가 비참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죽여 여러분의 바람을 만족시켜 줘야 하겠지만 당효파는 주모자인만큼 경도로 압송해야 합니다······. 주모자를 능지처참해서 제독 대인이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도록 해야지요.”
하지만 단상 아래 수군 관병들은 범한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단상 위 화려한 관복을 입은 젊은 청년을 바라보는 수군 관병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긴 두려움을 느꼈다.
수군 관병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당효파 부장이 상곤 제독을 죽였다는 걸 믿지 않았다. 상곤 제독과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당효파 부장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벌이겠는가?
하지만 단상 위 머리 잘린 시신 네 구는 이들에게 흠차 대인은 서슴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상곤 제독은 이미 죽었고, 당효파 부장은 체포된 상황에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상곤 제독과 당효파 부장의 뒤를 따라서 자신들이 얻는 이점은 무엇일까?
단상 위에 있는 흠차 대인을 죽이고 산적패가 되어 천하를 적으로 삼고 숨어 살아야 할까?
혈기가 있다고 해서 야만적이거나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단상 아래 만 명의 관병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방금까지 반란을 선동했던 교관들은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아무도 몰래 도망칠 방법을 생각했다.
죽여서 위엄을 세운 범한이 만족한 표정으로 단상 아래를 바라보며 허무재의 말을 옳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단상 아래는 여전히 당효파의 심복들이 남아 있었다. 상곤의 무리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상황에서 교주 수군이 안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단상에 선 범한이 말했다.
“어젯밤 수군의 몇몇 사람들이 당효파의 비밀 명령을 받아 군대를 동원해 성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이는 반역에 해당하는 행위인 만큼 이들을 쉽게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영 밖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처럼 거센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봤다.
검은 갑옷으로 온몸을 치장한 기병들이 완만한 언덕을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들은 석궁은 안장에 달고 검은 허리에 찬 채 한 손에는 말고삐를 잡고 다른 손에는 마대 자루를 들고 있었다. 세상에서 보기 힘든 말 모는 기술을 뽐내며 수군 진영으로 달려오자 이윽고 자욱한 먼지가 일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흑기다! 흑기가 왔어!’
사람을 풀 베듯이 베어 죽인다는 흑기가 수군 병사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경국에서 가장 강한 기병 중 하나인 흑기를 처음 마주하자 수군 진영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뭘 하러 여기 온 거지? 우리를 죽이러 왔다고 하기에는 기병 숫자가 너무 적어. 고작 백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인원으로 뭘 하려는 거지.’
백여 명 정도 되는 흑기가 단상에 올라와 범한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손에 들고 있던 마대를 땅에 던졌다. 순식간에 단상 앞에 작은 산이 두 개 생겼다.
이와 동시에 수군 진영 왼쪽 뒤에 있는 작은 산언덕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두 열로 나란히 선 기병이 나타났다. 산등성이 위에 흑기가 언제든 수군 관병들을 공격할 수 있도록 두 줄로 진열해 있었다.
놀란 수군 관병들이 크게 동요했다.
마대 안에는 전부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거나 코나 귀가 잘렸거나 머리가 쪼개진 시신들 수 백구가 마대 안에서 데구루루 굴러 아래로 떨어졌다. 그동안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왔던 교주 수군들은 사람의 머리가 산처럼 쌓인 모습을 본 적도 없었고, 코를 찌르는 지독한 피비린내를 맡아 본 적도 없었다. 이에 겁을 먹은 수군 관병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고 마대 안에 담긴 머리들이 떨어지면서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앞으로 나온 범한이 화려한 관복을 펄럭이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사람의 머리가 쌓인 언덕 위에 섰다.
“이건 어젯밤에 교주를 피바다로 만들려 했던 반란군들의 머리입니다. 그러니 겁을 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반란군은 이미 진압되었고, 본관이 복수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수군 관병들은 너무 몰라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범한이 말을 늘어뜨리며 섬뜩한 눈빛으로 관병들을 바라봤다.
“몰래 이런 짓을 꾸민 사람이 누구인지는 반드시 찾아낼 생각입니다. 반란을 도모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일족을 참수시킬 것입니다.”
그가 고개를 숙여 관병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했다.
“총 열일곱 명의 사람들을 찾아낼 겁니다. 아니지! 열일곱 마리의 개들을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조정의 봉록을 받아 자신의 흉악한 야심을 기른 개들 말입니다!”
열일곱 명이라면 숙청 범위가 큰 편은 아니었다. 이에 단상 위에 있는 고위 장군들과 단상 아래 있는 관병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사백 명의 흑기가 나타났다. 단상 위아래 쌓여 있는 잘린 머리들을 보고 이미 겁은 잔뜩 집어먹은 수군 관병들은 감히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저 조정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바라볼 뿐이었다. 일 일곱 명을 체포하든 아니면 더 많은 사람을 체포하든 상관없었다.
마치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인 것처럼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만 있다면 평상시 그토록 무서워하는 상사도 배반할 수 있었다.
단상 위에 있는 삼인자 장군이 이름을 부름에 따라 단상 아래 수군 관병들은 이름이 언급된 교관과 더 멀리 떨어지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연병장에는 열일곱 개의 원이 생겼고, 원 가운데에는 안색이 흙빛이 된 수군 장교가 서 있었다.
이들을 어젯밤에 병사들을 선동하고 일부 수군 관병들을 동원해 교주 성 밖에서 흑기와 전투를 치른 사람들이었다.
흑기가 천천히 만여 명에 달하는 인파를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흑기는 만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이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에 오히려 주눅이 든 수군 관병들은 흑기가 사람을 잡아갈 수 있도록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사람 한 명당 흑기 세 명이 둘러쌌다. 교관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반항했지만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발악하면 할수록 죽음을 앞두고 고통만 심해질 뿐이었다.
* * *
열일곱 번의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비명이 들린 뒤 열일곱 명의 머리가 그들의 동료들의 머리 무덤 위로 떨어졌다. 쌓여 있는 머리 무덤에는 이미 파리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범한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한가운데로 이동하는 걸 보니 교주의 일도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비로소 조칙을 내릴 때가 온 것이다.
조정의 예의 규범에는 눈곱만치도 관심 없는 범한이 손을 휘둘러 감찰원 부하들에게 이 일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의자로 돌아가 앉아 잠시 쉬었다.
“천명을 받은 황제 폐하의 말을 들어라······.”
범한은 황제가 뭐라 말하는지 듣지는 않은 채 단상 위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수군 관병들이 조칙을 들은 뒤 일제히 환호하고 만세 삼창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수군 관병들의 봉록이 또 오른 것인가?
* * *
교주 수군의 소식이 경도에 전해진 때는 일이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난 뒤였다. 경도는 내륙에 자리 잡고 있어 상쾌한 바닷바람이 불지 않아 교주보다는 공기가 건조했고, 기후도 좋지 못했다. 어쨌든 몸이 약한 사람이 살기에는 좋지 않은 곳이었다.
홍죽은 며칠 동안 화가 지나치게 치솟아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화는 기분이 아니라 몸 상태였다. 그가 코를 쓱 비비며 오늘 밤에도 코피가 나면 황궁 어의에게 상태를 봐 달라고 부탁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태의원 사람들의 수준이 별로인 걸 떠올리며 범씨 아가씨가 아직도 태의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종종걸음으로 궁전 앞으로 달려온 그는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황후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뭐라 말을 전했다.
홍죽은 동궁에 들어온 뒤 황후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황태자는 여전히 이 어린 태감을 불편해했다. 어린 태감의 얼굴에 여드름이 계속 나고 화기가 치솟아 코피를 흘리는 모습이 수상했기 때문이다.
홍죽의 말을 들은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상 제독을 추서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큰 사건을 어떻게 3사의 조사 없이 감찰원 한 곳에서 처리할 수가 있지?”
황후는 교주 수군의 내막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이 일이 장 공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지시했다.
“장 공주마마의 처소에 가서 상황을 엿보고 오게.”
만약 자신의 추측대로 범한이 교주 수군에 가서 이운예의 수족을 자른 것이라면 장 공주는 분명 발광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주의 사건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부장이 나쁜 무리와 결탁해 제독을 암살했다는 게 사실일까? 범한이 교주로 온 그날 밤에 사건이 발생한 게 정말 우연인 걸까? 교주 수군이 동해에서 활동하는 해적과 결탁한 걸 상곤 제독이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조정 관리들 모두가 이 점을 의심했고, 군대 측에서는 약간의 반대 의견도 나왔다. 상곤이 어떤 사람이든 그는 군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다만 이런 의심과 반대를 입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폐하는 장례도 성대히 치러주고 상곤 집안에 하사품도 후하게 내려 주며 죽음에 애통해하는 듯 보였지만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폐하가 사실은······ 상곤의 죽음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