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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16화 (516/1,108)

516화 양 무리 안으로 들어가다 (1)

굳게 닫혀 있는 서재의 문은 마치 고문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않으려 하는 곧은 절개를 보는 것 같았다.

아직도 당효파 등 제독의 심복들은 후원 안에서 고문을 받고 있었지만, 입이 냄새나는 걸레에 막혀 있어 비명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홍상청은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주변을 바라봤다. 그는 지주가 보낸 아속 몇 명을 서재 주변에 배치한 뒤 어떤 사람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서재 밖은 쥐죽은 듯 조용해 안에서 범한이 허무재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상의하고 있는지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아니면 언쟁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안을 옅게 밝히고 있는 촛불로 인해 두 사람의 갈수록 굳어지는 표정과 한기 가득한 눈빛은 볼 수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자 콧등 양옆에 그림자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 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군요. 바로 여기였어.”

허무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인.”

두 사람의 과거와 이후에 관한 대화는 이 말로 끝이 났다. 허무재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추슬러 평상시 침착한 모습을 회복했다. 범한을 부르는 호칭도 도련님에서 대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과 범한의 대화가 반역에 해당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과 범한이 하는 대화를 누군가가 듣게 된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고, 범한의 앞날도 밝을 리 없었다.

“이후의 일은 나중에 다시 말하도록 하죠.”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허무재는 교주 수군에 20여 년 동안 있으면서 가장 말단 병사부터 시작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인만큼 수군 안에서 상당한 위신과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도와준다면 범한은 지금보다 훨씬 쉽게 교주 수군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다.

“제가 진영 안에 사람과 연락할 수 있습니다.”

허무재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나설 사람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수군 하급 군관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일은 훨씬 쉬워질 거였다. 진씨 집안사람인 장군이 나서려 하지 않은 상황에서 허무재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와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장군이 직접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됩니다.”

허무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저는 장군의 과거를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군이 지금까지 조용히 지내셨던 것도 천주 수군 출신이라는 것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일에도 나서서는 안 됩니다.”

범한은 지금이 군대에 심어둔 자신의 패를 드러낼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작 교주 수군 문제를 처리하려고 자신이 어렵사리 얻은 패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다만······ 군대 하층부를 진정시킬 방법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범한이 계속 말했다.

“장군이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진정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날이 밝으면 조칙을 내리러 수군 진영을 찾아가야 하는데, 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에게 포위당하기 싫습니다.”

허무재가 웃으며 공손히 손을 맞잡아 올렸다.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히려 대인께서 이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인께서는 군대가 가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나 병사들이 받는 폐하의 영향력을 너무 낮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허무재가 침착하게 자기 생각을 설명했다.

“물론 군대 안에 일부는 상곤 제독의 통제 아래 있었으니 제독의 심복들이 진실을 모르는 병사들을 선동해 반격에 나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곤 대인은 돌아가셨고 당효파 등 심복들은 체포되어 있지 않습니까. 병사라 하지만 그들도 백성입니다. 만약 이들을 이끌고 흠차 대인에게 반격하려 한다면 선두에 서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허무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양들이 늑대에게 대적하는 이유는 양 무리 안에 늑대가 숨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허무재를 바라봤다. 어머니의 사람이면서도 화를 피한 행운아인 그는 과연 일을 바라보는 면에서도 남다른 점이 있는 걸까.

“하지만 저는 외부에서 온 늑대입니다.”

범한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수군 안에 있는 늑대들이라면 몸을 사리려 하지 않겠습니까?”

허무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대인께서 그들 쪽 사람을 체포하셨으니 나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들이 뭐라 말하든 상관없이 진영 쪽에 수군 관명들도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항하려 한다면 대인께서 죽여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죽여서 위엄을 세우란 말입니까?”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겁을 먹고 들고 일어날까 걱정되는군요. 피 냄새를 맡게 되면 더욱 날뛰지 않겠습니까?”

허무재가 웃는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피비린내를 풍겨야 그들을 위축시킬 수 있습니다. 원래 말단 군인들은 겁이 많은 법입니다.”

그의 담담한 말투에서 약간의 분노가 느껴졌다. 아마도 20여 년 전 섭가와 천주 수군이 숙청당할 때 피비린내에 겁을 집어먹고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은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범한이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무재가 아직도 범한의 미간이 드리워져 있는 근심을 바라보았다. 그는 범한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살며시 말했다.

“오늘이 아니면 나중에라도 저를 사용할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에 그를 사용하라는 말일까? 그건 바로 교주 수군을 범한이 장악하는 데 자신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조정에서 시행하는 교주 수군 조사에서 허무재는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보일 게 분명했다. 그가 가진 경력과 입지에 더해 충성심까지 증명된다면 범한이 굳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수군 제독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허무재가 이런 제의를 한 것은 자신의 벼슬길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범한에게 강력한 조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범한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장군의 신분을 너무 늦게 알아 수를 쓸 수 없을 것 같군요. 더구나 이후 교주 수군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이미 경도 쪽에서 정해둔 상태입니다. 10일 뒤에 추밀원 사람이 왔을 때 대인을 이 일과 연루되지 않게 해서 교주에 계속 머물도록 해드릴 수는 있지만, 제독 자리에 오르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허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수군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황궁에서 미리 계획을 세워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은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니 미리 사전에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다음 제독으로 누가 부임합니까?”

“진이(秦易)입니다.”

범한이 부가 설명을 했다.

“진항의 사촌 동생이지요.”

지금 경도 수비를 맡은 진항은 앞으로 진씨 가문을 이끌어갈 인재였고, 경도에서 범한과도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자 허무재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범한이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을 보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왜 진씨 집안사람들만 감싸시는 겁니까?”

허무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섭씨 집안이 폐하의 총애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군대 안에 두 집안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서쪽 정벌에 나선 몇몇 장군 중에서도 아직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이 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범한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교주는 중요한 전략 요충지인 만큼 황제는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에게 자리를 맡겨 상곤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허무재가 범한을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털어놓았다.

“진씨 집안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증거는 없지만 진씨 집안은 수상쩍은 점이 많습니다.”

허무재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대인도 아시겠지만, 수군 안에서 삼인자인 그 사람은 진씨 집안사람입니다. 그동안 상곤이 수군 안에서 한 짓들과 천명에 달하는 병사를 남쪽으로 파견한 일을 그가 모를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조정에 보고하지 않은 걸까요? 만약 그가 진씨 집안에 사실을 알렸다면 진씨 집안은 어째서 폐하에게 보고하지 않은 걸까요?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머릿속으로 재빨리 주판을 두드렸다. 전후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장군이 교주에 남아 곧 부임할 제독 대인을 지켜보셔야 합니다. 저는 진씨 집안이 폐하를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씨 집안이 폐하를 배신해서 좋은 일이 없지 않습니까?”

허무재도 범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1 황자는 현재 금군을 관리하고 있었고, 폐하의 눈 밖에 난 섭씨 집안은 정주에서 몸을 움츠리고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니 진씨 집안이 더 높은 지위와 영광을 얻을 기회를 박차고 폐하를 배신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정치는 장사와 비슷했다. 이익이 없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서 일을 보십시오.”

범한이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안전에 유념하셔야 합니다. 앞으로는 저는 장군을 찾지 않을 겁니다. 장군도 저를 위해 어떤 일도 하려고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허무재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범한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나갔다.

범한이 뒷짐을 지고 40대 장군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허무재가 진심으로 원해서 자신에게 머리 숙여 절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허무재처럼 20여 년 전의 일을 계속 잊지 않고 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멀리하는 위로 흰 연기가 피어나는 게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날아오는 방향을 가늠해보던 범한의 얼굴이 굳었다. 순간 그는 긴장감과 그보다 더 강렬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반란은 정말 그가 원치 않은 일이었다.

섭경미가 편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천하통일? 그녀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듯이 범한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날들에서 반란을 제외하고도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즐겁게 삶을 살아가는 거라든가 자신의 사람들을 더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거라든가 몇몇 사람들이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 말이다.

지금 제독 저택 안은 고요했지만 많은 사람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동쪽에서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해가 떠올라 주변이 점차 밝아질 무렵 밤새 굳게 닫혀 있던 교주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밤새 성을 지키느라 피곤한 주군들이 무기력하게 성문 양측에 서서 한 무리가 교주성을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수군 진영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 무리 가운데에 범한이 있었다. 말에 탄 그는 관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화려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그의 왼쪽에는 홍상청이 황제가 하사한 천자의 검을 안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감찰원 관리가 황색 성지를 들고 있었다.

앞에 선두에 선 관병들이 팻말을 메고 숨을 헐떡이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가락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나타난 관현악단이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떠들썩하게 연주를 하고 있었다.

급하게 만들어 약간은 초라한 흠차 의장이었다. 범한이 그 모습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룻밤 사이에 이런 것들을 준비해 낸 교주 지주는 과연 여러모로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관현악단에서 분 냄새가 짙게 나는 것이 아무래도 기생집에서 동원한 사람들일 것이다.

흠차 의장은 줄곧 소주에 머물고 있어 그는 해변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수군에 조칙을 내리러 가는데 이런 겉치레가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교주 지주 오격비가 허위로 날조한 흠차 의장으로 인해 경도 학사들이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교주 관리들과 죄가 없는 수군 고위 장군들이 범한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고, 밤을 새워 기력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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