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약속된 장소로 온 사람
경도 사변이 일어나고 4년 뒤 황제는 진평평, 범건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반격과 복수를 단행했다. 이로써 경도 안에 있는 귀족 중 3분의 1이 숙청되었고,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황후의 집안이 몰락했지만 어떤 일들은 여전히 변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섭가의 죄명이나 섭가 처분 문제에 대한 것들 말이다. 이런 일들이 변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 깊은 황궁 안에 있는 어느 노부인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고, 천하의 안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섭경미의 수상쩍고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섭가 세력이 반격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경국 조정은 반드시 섭가에 대한 숙청을 진행해야 했다. 이것은 경국의 안전과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만큼 진평평과 범건도 이 점을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그리하여 경여당의 섭 대행수들은 범한이 데리고 나갈 때까지 오랜 시간 경도 안에 갇혀 살아야 했고, 조정과 군대에 남은 섭가 세력들은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제거되었다.
당시 천주 수군은 황실 금고 상품 운송의 안전을 책임졌기 때문에 섭가의 영향력을 가장 깊이 받고 있었고, 어떠한 의미에서 보자면 섭경미의 개인 수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천주 수군은 숙청에서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조정에 의해 세 부분으로 쪼개진 천주 수군은 암암리에 벌어진 진압과 숙청 후 경국 3대 수군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범한은 줄곧 억누르고 있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분노가 용솟음쳤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섭경미가 이미 사망한 만큼 천하의 안정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했다.
자신이 황제였다 하더라도 부드럽게 처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머리에서는 이해가 되어도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과거 천주 수군이었던 허무재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범한을 바라보다 마른기침을 했다.
문득 정신이 든 범한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허 장군을 바라봤다.
‘섭가 사람이 어떻게 숙청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있었던 거지? 섭가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대부분이 금고 관리인들처럼······ 과거의 신분을 잊고 조정의 일원이 되는 걸 선택했는데, 어째서 저 장군은 그러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 허무재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범한이 직접 그 이유를 물어보자 허무재가 솔직하게 털어놨다.
“저는 수군에 늦게 들어갔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원래 저를 바다 위에서 2년 정도 단련시킨 뒤 감찰원에 보내 원장 대인을 돕게 할 계획이셨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후 벌어진 일로 인해 저는 진 원장께 갈 수 없게 되었고, 다행히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장군의 말뜻은 장군이 섭가 사람인 걸 진평평 대인이 알았다면 군 안에 머물게 하지 않았을 거란 거군요.”
허무재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글쎄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저는 운이 무척 좋아서 도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 아버지는요?”
허무재는 범한이 말하는 상대가 용상에 앉아 있는 친아버지가 아닌 호부 상서 범건 대인이라는 걸 눈치채고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당시 일에 수상한 점이 많아 저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침착한 말투였지만 범한의 상대방의 말투에서 원망과 실망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경도에서 사건이 터지고 나서 조정 안에서 섭가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상황은 분명 너무나도 수상한 점이 많았기에 섭가 밀정인 허무재는 진평평과 범건이 이 일에서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도 범한은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장군도 저와 섭가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이제 와서 왜 저에게 이런 일들을 이야기하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떠보려는 범한의 말에 허무재가 고개를 들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범한이 오늘 이전에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련님은 아가씨의 유일한 혈육입니다.”
허무재가 간곡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설명했다.
“그러니 도련님은 반드시 아가씨가 남기신 가업을 물려받아야 할뿐더러······ 아가씨의 복수도 하셔야 합니다. 이건 도련님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제가 가진 재주가 미천하지만 있는 힘껏 돕겠습니다.”
범한이 얼마 동안 말없이 있다가 천천히 물었다.
“그 일에 참여했단 왕공 귀족들은 13년 전에 이미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복수라니요? 제가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
허무재는 지금까지 줄곧 교주 수군 안에 숨어 있어 조정 상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 일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었고, 섭가의 원수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며, 또 간단히 제거될 수도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강렬한 직감이 있었다.
답답해진 그가 애가 달은 표정으로 간곡히 말했다.
“그건 도련님께서 알아보셔야 할 문제입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의 시선에서 벗어나 교주 수군의 고위 장군으로 성장한 그는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섭가니 아가씨니 하는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고위 장군이 누릴 수 있는 풍요를 즐기며 조정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등의 위험한 일들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그는 섭가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 스물을 넘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마음이 흔들릴 범한이 아니었다. 그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왜 알아봐야 합니까?”
“도련님은 섭가의 후손이시지 않습니까.”
범한의 대답에 실망했는지 허무재의 호흡이 살짝 가팔라졌다.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장군이 존경스럽습니다만 한 가지 사실을 잊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허무재가 고개를 번쩍 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범한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실망, 놀라움, 깨달음, 포기와 같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겹쳐 보였다.
“그렇죠. 도련님은 황제의 아들이시지요.”
범한은 섭가의 후손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황제의 사생아라는 것이었다. 섭경미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 황실이 몰래 그를 돌봐온 것도 사실이었다.
기억조차 못 하는 어머니에게 애정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섭가의 복수해야 할 대상이 황실이라면······ 황제의 아들인 그는 자신의 가족을 향해 칼을 겨눌 수 있을까?
이 사회는 여전히 순수한 부계사회였다.
그래서 허무재는 비록 실망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였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사실 오랜 시간 참고 인내해 온 그가 오늘 갑자기 정체를 밝힌 것은 아가씨의 혈육을 만났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입막음을 위해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예상과 달리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방금 한 말을 이해하신 것 같으니 이제 오늘 밤에 저를 찾아온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허무재는 범한이 왜 이 점을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소문이 퍼진 뒤 줄곧 소식에 귀를 기울이면서 도련님이 하시는 일들을 지켜봐 왔습니다······. 저는 도련님이 감찰원을 장악하고 황실 금고를 관리하는 방식과 일을 대하는 태도가······ 아가씨와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뵙고 싶어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소문은 당연하게도 작년 천하를 뒤흔들었던 범한의 출생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자신도 모르게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가 과거 자신과 같이 후안무치한 수단을 썼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맨손으로 사업을 성장시킨 걸 보면 음흉한 수단을 적지 않게 사용했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어머니는 과거 친왕 두 명의 죽음과도 밀접하게 관여되어 있었다.
‘저 허무재란 사람의 직감이······ 어머니와 내 생각이 비슷하다는 걸 알 정도로 민감하단 말인가?’
사실 두 사람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인만큼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이 세계에서 자신이 어머니와 통하는 점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어머니인 섭경미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둘의 관계는 혈연으로 이어진 일반적인 모자 관계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적으로 더 친밀하게 맺어진 독특한 관계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고, 옅어질 수도 없었다.
이 관계는 경국 황제도 추측할 수 없었고, 진평평과 범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이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이 기억조차 못 하는 어머니에게 깊은 감정을 품고 있지만, 혈육이라 할 수 있는 황족들에게는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섭경미에 대한 범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범한의 진짜 본심을 읽어낼 수 없는 만큼 향후 어느 중요한 시기에 누군가는 어떠한 대가를 치를 것이었다.
“홍상청.”
범한이 허무재에게 계속 질문하지 않고 큰 소리로 감찰원 부하를 불렀다.
방으로 들어온 건 청와였다. 살육이 벌어졌던 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범한의 밑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그의 본래 자신의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범한은 나중에 일을 처리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의 이름을 바꿔서 불렀다.
홍상청이란 이름을 지은 이유는 범한이 기억하는 이전 세계의 영웅이기도 했고, 홍죽이 홍 씨를 가진 뒤로 운이 좋아진 것 때문이기도 했다.
“이 방에서 열 걸음 이내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감시하게.”
홍상청이 명령을 받고 나갔다.
허무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장군은 제가 믿을 수 있도록 제 어머니와의 관계를 증명하셔야 합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허무재가 곧바로 범한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복받쳐 오른 그가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힌 뒤 장화 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내 범한에게 건네줬다.
그는 범한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러 온 이상 범한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허무제가 건네준 금속 탄알을 손에 쥔 범한은 순간 너무 놀라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자신과 오죽 아저씨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앞에 보이는 탄알은 허무재의 신분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범한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앞에 천주 해변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곧 수군에 들어갈 젊은이는 섭가 주인에게 보물을 받고 있었다.
황제도 그 상자를 찾으려 했고, 진평평도 그 상자를 찾고 있었지만, 누구도 찾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범한이 미소를 거두며 물었다.
옛일을 떠올리는지 허무재의 두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가씨께서 해변에서 그걸 던지려 하시다가 제가 아까워하는 걸 보시고······.”
20여 년 전 천주 해변에서 미모가 빼어난 여자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M82A1 탄알을 바다에 던지며 놀았다.
그러던 중 옆에 있는 젊은 청년이 아까워하자 여자는 웃으며 아무 생각 없이 탄알 하나를 주었다.
그렇다. 이게 허무재가 탄알을 얻게 된 배경이었다.
범한이 일어나 손가락으로 탄알의 금속 표면을 만졌다. 손끝을 통해 이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금속의 감촉이 전해지자 그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이 순간 바다 거품처럼 그의 머릿속에 제독 저택의 다른 사람들이나 교주 수군이나 장 공주, 군산회에 대한 생각들이 모두 지워졌다.
탄알을 바라보는 그의 머릿속에 탄알로 구슬치기 놀이를 하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개를 살짝 가로로 숙인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어쩌면 내가 멀리 이곳까지 온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