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누가 누구의 사람인가? (2)
형과가 자신의 뒤에 있는 친위병을 이끌고 수군이 주둔해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의 뒤에 있는 친위병들이 한쪽 발을 말등자에 고정한 채 쇠뇌의 화살의 활시위를 당긴 뒤 직도를 뽑았다. 흑기는 기본적으로 왼손은 화살 오른손은 검을 쥐고 공격했다.
형과의 미간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그는 범한의 명령에 따라 성안에 있는 고위 장군들이 보내는 사람들이 항구에 있는 수군 관병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하지만 수군 고위 장군들의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당효파가 자신의 측근 교관을 성 밖으로 보냈을 때 다른 수군 고위 장군들도 대부분이 똑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낮은 산등선을 전후로 흑기가 일곱 명의 사람을 찾아내 죽였지만, 형과는 자신들의 봉쇄선을 뚫고 수군 진영에 들어간 사람이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멀리 항구 쪽을 주시하던 형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쓰고 있는 은색 가면이 달빛을 받아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수군 진영에서는 이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안에 불빛이 흔들리고 점차 밝아지는 것이 아무래도 진영 안에 있는 병사들이 성안의 소식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분명 누군가가 수군 병사들에게 교주성을 공격해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면서······ 사지로 뛰어들자고 설득하고 있을 것이었다.
형과는 아무 말 없이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수군이 생각만큼 견고한 조직이 아닌 만큼 저 안에서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은 기껏해야 2천 명 정도일 거라 짐작했다. 이것은 이미 제사 대인이 계산해 둔 일이었다.
4백 명의 흑기가 육지전에 약한 수군 관병 2천 명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형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 경국의 백성들이었고, 모두가 경국의 병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개인적으로 그들을 정말 죽이고 싶지 않았다.
* * *
범한은 성 밖의 긴장 상황을 알지는 못했지만, 수군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흑기의 돌격 솜씨는 천하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을 만큼 최고였고, 더욱이 지금은 어두운 밤이었기에 수군이 움직인다 한들 교주성에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밤이 깊었다는 이유로 수군이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고, 그때까지 자신이 수군 고위 장군들을 매수하지 못한다면 분명 상당히 큰 규모의 반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독 저택 안에 앉아 흑기의 상황을 걱정하면서 고위 장군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품계 순서대로 오는 것인지 맨 처음 제독 저택에 돌아온 고위 장군은 수군에서 삼인자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이 40대 고위 장군은 서재 안에서 범한에게 무릎을 꿇고 조정에 충심을 표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제독 상곤이 나라를 배반하고 모반을 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도 비통해했고, 밤늦게까지 조사하는 범한에게 진심 어린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범한은 그의 등장에 안심하며, 그를 앞세워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대화를 나누면서 범한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何)씨 성을 가진 고위 장군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상곤과 당효파 없이 자신 혼자서 수군을 통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더욱이 범한은 분노하게 했던 것은 하 장군이 이 일에서 제일 선두에 서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하 장군은 지금 상황에서 제일 선두에 선 사람은 누구든 수군 관병들의 직접적인 원망의 대상이 될 것이고, 만일 그 대상이 자신이 된다면 군대를 장악하는 데 상당한 문제가 생길 거라고 말했다.
범한이 이 말에 분노한 이유는 자신의 앞에서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하 장군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 이유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간곡히 말하는 하 장군의 말 때문이었다.
“대인, 저는 줄곧 1 황자 저하와 함께 서쪽 오랑캐를 토벌하다 6개월 전에 교주로 왔기 때문에 수군의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 그는 오랜 시간 1 황자와 함께 일해 온 사람이었다. 감찰원 보고서를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상대방이 뻔뻔스럽게 자신의 배경을 밝혔으니 1 황자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계속해서 고위 장군들이 제독 저택에 돌아와 폐하에게 충성을 표시하고 범한을 위로했다. 동시에 조심스럽게 관련 증거를 내밀며 자신의 파벌과 입장을 설명했다.
이들은 모두 상곤의 측근들이 아니었고, 장 공주가 교주에 심어 놓은 밀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누구도 범한과 함께 상황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지금의 사태에 뛰어들었다가 자신의 앞날을 망치거나 자신의 뒤를 봐주는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하며 뒤로 숨으려고만 했다.
이들이 범한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려 찾아온 이유는 범한에게 밉보여 당효파처럼 붙잡히거나 반역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각자 가진 파벌과 배경은 경도 범씨 집안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들은 범한의 체면을 생각해 이곳에 온 거였다.
그리고 범한은 장 공주와 동궁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들의 체면은 신경을 써야 했다.
“대인, 저는 임소안과 먼 사촌 관계입니다.”
“대인, 하관은 진 장군과······.”
“대인, 저는······.”
수군의 후방을 통제하는 어느 부장은 범한을 찾아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대인 제 성은 유씨로······.”
결국, 화가 폭발한 범한이 이를 갈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경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삼대 수군 중 하나인 교주 수군이 가진 실체란 말인가?’
범한은 수군 내부의 파벌이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인제 와서 자신의 성이 유씨라는 걸 왜 밝히는 거야? 왜 내 새어머니와 친척 관계라는 걸 진작 밝히지 않은 거지?’
화가 치솟은 범한이 그 장군을 내쫓고는 저택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를 갈며 친척으로 얽힌 관계이니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간사한 연기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밤 범한이 거둔 가장 큰 수확은 바로 군대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하나로 뭉친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수군의 내부는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황실 사람도 있었고 전임 재상 사람도 있었고 진씨 집안사람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문하중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교활해서 범한과 함께 나서려 하지 않았다.
범한은 결국 직접 자신과 함께 나설 사람 두 명을 고르는 동시에 마지막 사람을 들어오게 했다.
그는 그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는 걸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두 명의 고위 장군 중 한 명은 유씨 국공가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장인어른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이 둘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인 만큼 절대 이 일을 회피할 수 없었다.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군대가 이처럼 조정의 큰 인물들이 세력을 확장하는 장소로 활용된다면 머지않아 부패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경국이 자랑하는 전투력은 과연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의 상태에서 군대가 과연 국경과 백성을 지킬 수 있을까?
상곤은 분명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 있는 고위 장군들과 이들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좋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범한이 비꼬는 표정으로 마지막 고위 장군을 바라봤다. 범한은 자신의 앞에 있는 수군 노장이 군대 안에서 신망 받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기에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
“장군께서는 조정 어느 집안과 인연이 있으십니까? 임씨 집안이나 서 대학사 쪽과 관련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진 장군과 인연이 있으신가요? 원장 대인이나 저희 아버지와 관련 있다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믿지 않을 거니까.”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대로 가다가는 경국은 정말 제대로 된 군대 없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라를 지키는 기반인 군대를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도구로 사용한 사람들이야말로 파렴치한 자들이었다.
범한 앞에 서 있는 장군은 그의 말에 순간 안색이 굳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도련님의 사람입니다.”
당황한 범한이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누구십니까?”
장군이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는 도련님의 사람입니다.”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조정 관리들을 비웃었다고 망신을 주려는 것인가?’
그는 군대에 심복을 심은 적도 없었고, 만일 진평평 대인이나 아버지가 황제의 눈을 피해 사람을 심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 사람을 살펴보던 범한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 장군이 세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는 도련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범한을 향해 공손히 설명했다.
“저는 어느 파벌에서 속해있지 않은 도련님의 사람입니다.”
방 안에 유등의 불꽃이 흔들리면서 안이 확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고 했다. 범한이 자신의 앞에 있는 장군의 얼굴에 드리운 빛이 변하는 모습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국에서는 유등의 불꽃이 튀는 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징조라고 믿었지만 범한은 그게 지금 상황에서도 맞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대인의 내력을 알려주시지요.”
범한이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저는 허무재(許茂才)라고 합니다.”
그 고위 장군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신분과 범한과의 관계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평범한 이름이 신분을 감추는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가 어떻게 과거에 일어난 숙청을 피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지금 자신에게 신분을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련님, 저는 범씨 집안의 사람도, 감찰원 사람도 아닙니다.”
허무재가 침착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저는 섭가 사람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가씨의 사람이지요.”
“과거 천주 수군이었던 겁니까?”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한 뒤에도 범한의 미간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허무재가 대답했다.
“20년 전에 저는 천주 수군 선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천주 수군이 폐지되고 지금처럼 3대 수군으로 개편된 뒤 저는······ 줄곧 교주 수군 안에 있었습니다.”
범한도 당시 일어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섭가와 떼려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인 그는 당시 일을 절대 외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태평 별궁에서 습격을 받아 사망하고, 오죽 아저씨는 어린 그를 안고 도망쳤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오죽 아저씨는 혼자 힘으로 한 나라와 대적하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경도 안에서 섭가의 세력은 하루아침 만에 모두 축출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섭가의 근간이 경도 안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각 군과 로에 자신의 산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섭가의 영향력은 경국의 외진 곳까지 방방곡곡 퍼져 있었고, 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제 폐하는 범건과 함께 회군하여 돌아오고 진평평도 급히 경도로 돌아온 뒤 상황이 안정되자 복수 외에 군신들에게 놓인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섭가가 남긴 방대한 산업과 영향력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범한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섭가의 3대 작업장은 궁정에 귀속되어 지금도 경국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황실 금고가 되었다. 그리고 섭가의 대행수들은 경도에 갇히게 되었고, 섭가에게는 모반을 일으켰다는 죄명이 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