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510화 (510/1,108)

510화 서재 안에 울려 퍼진 황제의 밀서 (1)

당효파가 무기를 압수당한 채 정원에 모여 있는 부하들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저택을 포위하고 있는 주군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상황을 살펴보던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빛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독 대인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고, 오늘 갑자기 작은 범 대인이 이곳에 온 것도 이상했다.

만일 감찰원이 자객 암살 사건을 핑계로 수군 친위병들을 무기를 압수하고 주군을 동원해 제독 저택을 포위한 것이라면······ 결코 간단하게 일이 마무리되지 않을 터였다.

이처럼 당효파가 지금 상황을 의심하고 있을 때 범한은 남몰래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수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군들을 모두 저택에 감금시켰으니 첫 번째 고비는 넘은 셈이었다.

사실 이는 그가 세운 참수 계획 중 일부로, 교주 수군의 우두머리인 상곤을 죽이고 수군 지도부들을 제독 저택 안에 감금시키기 위함이었다. 수만에 달하는 용맹한 교주 수군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이끌어줄 우두머리가 없다면 반란에 따른 피해도 최대한 줄어들 수 있었다.

이 목표를 위해서 범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상당한 힘을 들여야 했다. 더구나 언빙운은 멀리 경도에 있어 이 일의 세세한 부분까지 도와줄 수가 없었으므로 모든 과정을 범한 혼자서 계획하고 처리해야 했다.

그는 교주 수군이 군산회와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계획이 미리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계년조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범한은 만일에라도 일에 잘못되어 교주 수군에 의해서 자신의 심복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기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흑기를 성 밖에 대기시킨 뒤 그림자와 둘이서만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일부러 오주에서 모든 일을 잊은 사람처럼 놀은 다음 친척을 방문하러 담주로 가는 척하면서 자신의 진짜 행적을 숨겼다.

만일 장 공주 쪽 사람들이 미리 그의 목적을 알아챘다면 그가 아무리 황제의 숨겨진 아들이고, 감찰원 제사라 할지라도 교주 수군을 깨끗하게 숙청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 그가 하려는 건 숙청이었다.

사실 이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만일 정해진 규정대로 사건을 조사했다면 감찰원의 도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범한은 상곤을 잡을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력으로 부딪쳐 수군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흑기를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만 명에 달하는 수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감찰원이 교주에서 심어둔 밀정들은 그가 동원 일곱 명 말고도 더 있었지만, 결정적일 때가 아닌 이상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몸을 돌려 뒤에서 잔뜩 화가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 버린 수군 고위 장군들을 바라보고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폐하가 자신에게 강남을 안정시키고 수군을 바로 잡으라고 한 만큼 지금 앞에 있는 낯선 얼굴을 한 사람 중 대다수를······ 죽여야 했다.

그리고 그는 교주 수군을 상곤 한 사람이 완벽하게 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분명 이들 중에는 조정에 충성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 확신했다.

올해 봄 암암리에 해군을 동원해 해적들을 죽인 일은 반역에 가까운 일이었으므로 상곤은 분명 교주 수군 중에서도 자신의 직속 부대를 동원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 저녁 범한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군 고위 장군 중에서······ 누가 충신이고 간신인지를 분간해 내야 했다.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당효파를 향해 물었다.

“당 부장이 보시기에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자신의 심복이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 시간을 가늠해보던 당효파는 갑자기 들려온 온화한 물음에 깜짝 놀라 대답했다.

“제독 대인께서 화를 입으셨으니 작은 범 대인의 지시를 따라야겠지요······. 하지만 중차대한 일인만큼 당장 긴급 우편로를 통해 경도에 사실을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범한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교주 수군 제독이 사망한 사실을 경도에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건 범한이 교주성에 있다는 사실이 경도에 알려 의심을 받게 함으로써 일을 마음대로 진행할 수 없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 점을 이해한 범한이 감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인재가 교주 수군에 있는 줄 알았다면 후계상을 이곳으로 보내는 모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차라리 저 사람을 내 사람을 삼아 일 진행 했을 텐데.’

상곤의 사건을 순리대로 진행하기 위해서 범한은 당효파가 다른 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당효파가 자신의 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로 했다.

“이렇게 중차대한 사건은 당장 폐하께 보고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꼬리를 늘리며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했다.

“제독 대인이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 조정이나 민간이나 할 것 없이 큰 충격에 휩싸일 겁니다. 민간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도 분명하지요. 조정의 체면을 말할 것도 없고 국경의 안정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민심을 안정시키고 다른 나라가 이 일로 경국을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일단은 밖에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 교주 수군과 감찰원에서 동시에 경도에 밀서를 보내 조정에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알리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가 매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지금부터 3일 안에 교주 민간에서 오늘 일의 구체적인 상황을 알게 되거나 안 좋은 소문이 퍼진다면 그때는 본관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범한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고위 장군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유일하게 당효파만이 똥이 마려운 개처럼 끙끙대며 상곤 제독의 심복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눈짓을 연신 해 보였다.

그는 이대로 범한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제독 저택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밖에 전할 길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밖에 소식을 전할 수 없게 된다면 교주 지방 관아의 태도를 볼 때 수군 고위 장군들은 도움을 청하지도 도망칠 곳도 없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효파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할 새도 없이 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일어난 일은······ 정말이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범한의 얼굴에는 슬퍼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계시는 분 중 이 일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섭섭하시더라도 이곳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상황을 면밀히 조사한 뒤 다시 의논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수군 고위 장군들이 이곳에 감금되었다는 소리였다.

이어서 제독 대인 상곤의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에 대한 의논이 이어졌다. 범한은 끼어들지 않고 옆에 서서 수군 고위 장군들이 슬픔에 겨운 얼굴로 일을 의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특히 그는 당효파가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호시탐탐 그를 감시했다. 침대에 눕혀진 상곤의 시선에 눈길이 간 범한의 눈빛이 순간 흐릿해졌다.

과거 북벌에 참여했던 노장의 죽음에 고위 장군들이 이처럼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면 군대 안에서 상곤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동해 작은 섬에서 이뤄진 살육은 상곤이란 사람이 얼마나 음흉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줬다.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전 세계에서 가장 좋아했던 말 중에 붓은 총을 이길 수 없고, 어떤 음모나 모략도 무력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다. 물론 이 말은 무력이 충분히 강하다는 전제로 가능한 것이었다.

‘음모와 무력이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이 각각 있는 법인데. 내가 상곤을 암살한 것은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 것일까?’

그가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있던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린 뒤 교주 지주 오격비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그리고는 수군 고위 장군 중 중요한 인물들과 오격비를 데리고 제독 저택 뒤쪽에 있는 의사방으로 향했다.

의사방은 서재였으나 서재보다는 면적이 크고 촛대까지도 지나치게 화려한 곳이었다.

범한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안에 있는 화려한 장식품들은 본체만체하며 상석에 가서 앉은 뒤 사람들에게도 앉으라고 지시했다. 오격비는 아무 말 없이 범한 옆에 앉았다.

오늘 발생한 일로 겁에 질린 교주 지주 대인은 자신을 신임해 주는 범한의 모습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늘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간담이 서늘해졌다.

다른 수군 고위 장군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작은 범 대인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다.

“상곤 대인에 대한······ 폐하의 밀지가 있었습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고는 품에서 편지를 하나 꺼냈다.

“상곤 대인이 갑작스럽게 화를 당하셨으니 이 밀지는 대인들에게 읽어 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놀란 당효파가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상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라 그런 건지 피곤하고 자꾸만 식은땀이 흘렀다.

“대인, 관례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아래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며 쌀쌀맞게 응수했다.

“입 다물고 잠자코 듣기나 하십시오.”

범한의 거친 말에 지주 오격비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고, 당효파도 이를 악물고는 다른 고위 장군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범한이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게슴츠레하게 흘겨보았다.

“폐하께서 구두로 내리신 명령을 전하는 것이니 잘 듣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네 명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상곤, 자네를 보지 못한지도 2년이 흘렀구나. 짐이 자네에게 세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항시 마음이 편치 않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일은 자네에게 직접 물어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 범한을 대신 보내노라.”

범한이 고개를 숙였다. 이 편지의 내용은 황궁에서 직접 전달한 경국 황제 폐하의 전언으로 바로 구두 명령이었다.

무릎을 꿇고 듣고 있던 네 명은 당시 황제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았음을 직감하고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특히 당효파는 등 뒤에 땀이 비가 오듯 줄줄 흐르고 있었다. 범한이 냉정한 목소리로 밀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첫 번째 궁금한 것은 자네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인지다. 짐이 자네에게 봉록을 적게 준 것인가? 아니면 자네에게 내린 경도의 저택이 너무 작은 겐가? 두 번째 궁금한 것은 혹시 자네가 노망이 든 게 아닌가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 북벌에 나섰을 때는 총명했던 자네가 어째서 이리 멍청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세 번째로 궁금한 것은······.”

여기까지 읽은 범한이 말을 멈추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자리에 경국 황제가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죽임을 당한 상곤이 만약 이 밀서를 읽었다면 경국 황제의 분노와 깊은 실망을 느꼈을 것이었다.

교주 수군 제독 상곤은 경국 황제가 북벌에 동참했을 정도로 최측근 신하였다. 그렇기에 황제는 북쪽으로는 동이성 세력을 막아야 하고 남쪽으로는 강남을 견제해야 하는 교주 수군의 자리를 그에게 믿고 맡긴 것이었다.

이처럼 경국 황제의 무궁한 신임을 받는 신하가 황제를 배신하고 강남 명씨 집안을 도와 사사로이 병력을 움직여 무수한 생명을 살육한 것이다.

밀서를 바라보는 범한이 눈꺼풀이 힘없이 내려뜨리며 속으로 황제가 깊이 상심하고 실망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진평평 원장이 말했듯이 황제가 가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믿는 사람이 자신을 배반하고 기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상곤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기에 직접 밀서를 보내 상곤을 먼저 호되게 혼내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범한은 황제의 바람을 완전히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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