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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07화 (507/1,108)

507화 저택 안에 침입한 자객

제독 저택과 후계상의 집은 약 두 길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중간에 놓인 북쪽 방향 길을 따라 두 번 돌면 눈에 띄지 않는 면포 가게가 있었다. 제독 저택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범한은 어둠 속을 달려 곧장 이곳으로 왔다. 안으로 들어온 그가 양손을 모아 인사하는 동시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제사 요패를 보여줬다.

거리를 순찰하는 병사들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은 듯 가게는 불도 켜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범한을 보고 놀란 면포 가게 사장은 신분을 확인하고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지금입니까?”

“지금이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리고는 옷을 벗으면서 잔에 차를 따랐다. 상당한 수련을 거쳐도 찌는 듯한 더운 날씨에 빠르게 달리면 갈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겉옷을 벗은 그가 물었다.

“몇 명인가?”

면포 가게 사장이 제자들을 시켜 옷과 관련 물건을 꺼내게 하면서 나지막이 대답했다.

“일곱 명입니다.”

범한이 그가 건네준 긴 두루마리를 받으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면포 가게는 북제 상경성에 있는 기름 가게와 마찬가지로 비밀 기지였다. 물론 이곳이 감찰원 주교주 지점은 아니었고, 지점이 되는 저택은 불이 켜놓고 있었다. 범한이 지점이 아닌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제독 저택 안에서 고위 장군들을 제때 상대하려면 이동 시간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한 분장은 지우는 시간도 촉박했다. 범한은 손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면포 가게 사장과 부하들이 바쁘게 그의 분장을 지워주고 옷깃을 다듬어 주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자 왠지 자신이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패션모델이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뒤 범한은 또다시 모습을 바꿨다. 이번에는 감찰원 제사 대인의 모습이었다. 차가운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검은 색 관복은 찌는 듯한 더위를 상당히 가려주었다.

감찰원 주교주 지점의 책임자인 면포 사장은 범한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제사 대인의 계획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사 대인은 어째서 분장을 하고 제독 저택에 잠입한 뒤에 다시 분장을 지우고 저택을 찾아가려는 것일까?’

사실 이 모든 건 범한이 상곤을 공격하기 전에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상곤의 배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었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적이 가장 두려운 법이었다.

면포 가게를 나온 범한이 고개를 들고 가슴을 쫙 펴고 걸어갔다. 여름 바람에 그의 검은 색 관복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펄럭 소리를 냈다.

면포 가게에 있던 부하들도 광택 없는 검은색 감찰원 관복을 입고 머리에는 관모를 쓴 채 손에는 각각 중요한 물건들을 든 채 뒤를 따랐다.

면포 가게 사장의 손에는 노란색 족자가 들려 있었고, 그의 부하는 장검을 품고 있었다.

여덟 명의 사람이 당당하게 교주 밤길을 걸어 경비가 삼엄한 제독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 * *

기생집과 제독 저택을 제외하면 교주성 안은 상당히 조용했다.

그러니 조용한 거리에서 범한 일행처럼 기괴한 무리가 걸어간다면 쉽게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곳은 제독 저택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관병들이 나와 이들을 막아서더니 질문을 하려 했다.

원래 교주 치안을 책임지는 건 주군의 몫이었지만 거대한 수군의 기세에 밀려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수군 관병들은 성안에서도 주인 행세를 하며 주군의 위치를 점점 빼앗아 갔다. 이처럼 오만방자한 수군 관병들은 오늘은 저택 안에서 들리는 기생들의 웃음소리와 술과 고기 냄새를 맡으며 더운 밤에 경호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때 갑자기 낯선 무리가 나오자 관병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소리쳤다.

“멈춰!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이 밤중에 거리를 쏘다니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물어보던 수군 관병의 목소리에 힘이 갈수록 사라져갔다. 거리에 갑자기 나타난 무리들 가장 앞에 서 있는 젊은 청년이 그를 바라보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관병이 멍한 표정으로 그 청년을 바라봤다. 무척이나 빼어난 외모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청년의 미소에는 왠지 모르게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위엄과 압력이 느껴졌다.

관병들을 인솔하고 있는 소교관은 밤에 검은색 옷을 입은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자 잔뜩 긴장하며······ 손에 들려 있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무리가 그를 본체만체하는 것이었다. 무리의 선두에 있는 청년은 무기를 든 채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열 명쯤 되는 관병들을 무슨 거리에 심어진 나무 보듯이 무시하며 곧장 저택으로 걸어가려 했다.

발끈한 소교관이 검을 뽑아 상대방의 앞을 막으려 했다.

그때 검이 잘리면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멀쩡하던 칼날이 잘려 땅에 떨어져 있었다.

관복을 입고 범한 옆에 서 있던 면포 가게 사장이 소매에서 꺼낸 경도(勁刀)를 거둬들인 뒤 요패를 꺼내 보여줬다.

“감찰원에서 사건을 처리하러 왔으니 관련 없는 사람은 비키게.”

소교관이 깜짝 놀라 잘린 칼을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감찰원과 군대의 관계는 줄곧 좋았고, 감찰원이 군대 내부를 조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경국의 관병들은 감찰원을 별로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민간에서 감찰원에 대한 무서운 소문이 워낙에 많이 들려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간담이 서늘해졌다.

관병도 병사였고, 병사는 곧 백성이었다. 오늘 밤 잔혹하기로 소문난 감찰원 밀정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라웠지만 자신의 검을 단번에 부러뜨리자 소교관은 두려움을 감추질 못했다.

그가 애써 정신을 차렸을 때 감찰원 관리들은 이미 제독 저택 바로 앞 큰 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저택 안에 있는 동료에게 알릴 기회를 놓치자 마음이 조급해진 소교관이 눈을 굴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너무 당황한 그는 당장 자신의 상사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성 밖에 있는 진영에 통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물론 제독 저택 밖을 지키고 있는 무장 병력은 소교관 무리만이 아니었다. 거리 처음부터 끝까지 경호를 서고 있던 수군 관병들도 검은색 옷을 입은 무리를 발견했고, 즉각 상대방의 신분을 알아챘다.

‘감찰원 밀정이다!’

하지만 감찰원이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 거친 수군 관병들이라 할지라도 조정에 소속된 관리들에게 함부로 칼을 뽑을 수는 없었고, 더구나 상대는 경국 황제의 직속 특수기관인 감찰원이었다. 이에 저택 밖을 지키고 있는 관병들은 경계와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 일행을 노려볼 뿐이었다.

* * *

감찰원 관리들은 거리 양쪽에서 쏟아지는 적의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제독 저택 정문에 다다랐다. 범한이 관모를 살짝 올리더니 머리칼 언저리를 긁으며 저택 문 앞에 걸린 붉은 등과 붙어 있는 초상화를 바라봤다.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수군 친위병에게 말했다.

“안에 들어가서 대인에게 감찰원에서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조사하러 왔으니 교지를 받으라 전하게.”

매서운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보던 여섯 명의 친위병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조사하러 왔다는 말에 금세 눈을 풀고는 서로를 바라봤다. 잠시 뒤 누군가가 말을 전하기 위해 저택 안으로 걸어갔고, 남은 친위병들이 정문을 열어 황제가 보낸 관리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범한은 제독 저택 뒤채에서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발견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기에 규정을 따르지 않고 곧장 제독 저택의 높은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친위병들이 뒤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이 있나. 아무리 감찰원 관리이고,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재산을 몰수하러 온 것도 아니면서 규칙을 어기고 집안으로 쳐들어가다니?’

감찰원 관리들이 집안에 쳐들어가는 데 상곤의 친위병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친위병들이 재빨리 뒤쫓아 가서는 각자 유리한 지점에서 범한 일행을 경계했다. 모두들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기세를 누를 필요는 있었다.

범한은 이런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대청 문을 넘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방금 전 소식을 전달하러 안으로 들어갔던 친위병의 모습이 보였다. 제독 상곤을 찾지 못한 친위병은 부장의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이고 있었다.

대청 안에 놓인 악기 소리와 세상 태평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기녀들의 목소리가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저택 밖에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시끌벅적한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 아무도 상곤이 다친 걸 알아채지 못했다는 걸 확인하고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즐거우신가 봅니다.”

그 말에 대청 안이 조용해지면서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본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몇몇 우악스러운 고위 장군들은 이미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귓가에 들리는 교태 섞인 기생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품에 안고 있던 기생이 겁에 질린 눈빛으로 대청 밖을 바라보자 이들도 따라서 고개를 돌려 검은 옷을 입은 무리를 바라봤다.

이들 중 한 고위 장군이 벌떡 일어나 누가 감히 흥을 깨뜨리느냐고 욕을 퍼부어주려 하다가 맞은 편 교주 관리들의 겁먹은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대청 밖에 서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본 교주 관리들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찰원의 관복은 정말이니 볼품없었지만······ 단박에 알아볼 만큼 특징이 뚜렷했다.

맨 끝 좌석에 앉아 있는 후계상만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기생과 여유롭게 한담을 나누며 소란이 일어난 쪽은 보지도 않았다.

욕을 퍼부으려고 하던 수군 고위 장군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애써 삼키며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범한을 바라봤다.

‘재수 없게 감찰원 검은 개들이 여긴 왜 온 거야?’

상석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살며시 일어나 대청 앞에 서 있는 범한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오늘 밤에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를 본 범한은 한눈에 그가 수군에서 중요한 인물임을 알아챘다. 상곤의 오른팔 중 한 명으로 지략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당효파(黨驍波)였다.

범한 옆에 서 있는 면포 가게 사장이 대신 대답했다.

“감찰원에서 사건을 조사하러 왔네. 수군 제독 상곤 대인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청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혹시나 했던 추측이 사실이 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모두들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감찰원 관리들을 바라봤다. 한편 교주 수군 쪽 관리들은 눈알을 계속 굴리며 마음속으로 주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때 마침 상석 쪽에 앉아 있던 교주 지주가 나섰다. 반백 살인 그가 마른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대인,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상 제독 대인의 생일이니 내일 다시 와서 말씀하시지요.”

“본관의 일이 바빠 그럴 여유가 없으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게.”

범한이 대청 안을 훑어보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 말에 지주 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대청 안에 앉아 있는 사람 중 최소 대여섯 명이 3품 이상의 고위 관리들이었다. 아무리 감찰원 관리라 해도 고위 관리 앞에서 이렇게 제멋대로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대인의 관명과 성명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해 말했다.

“현재 감찰원 제사직을 맡은 본관의 성은 범이고 이름은 한, 자는 안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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