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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06화 (506/1,108)

506화 변소에서 벌어진 암살 (2)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란 상곤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범한이라고? 감찰원 제사 대인이란 말인가? 그가 왜 갑자기 교주에 온 것이지? 내 생일잔치에는 왜 온 거야? 게다가 왜······ 변소에 나타난 거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던 상곤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설마 밖에 있는 친위병들을 이미 모두 죽인 것인가?’

상곤은 대충 뒤처리를 한 뒤 바지를 추켜올리면서 물었다.

“정말 누구십니까?”

상대방이 정말 범한이라면 이미 큰일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지위와 명예도 모두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가 마음을 애써 다잡고 시간을 끌면서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생각했던 것만큼 변소에서의 만남은 좋지 않군요.”

밖에 있는 범한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목을 피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지.”

‘이목을 피한다고?’

상곤은 아무리 마음을 진정시켜도 발을 걷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안에서 깊이 심호흡을 한 뒤 물었다.

“만일 정말 범 제사라면 오늘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

“대인과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무슨 거래 말입니까?”

“동해에 있는 이름 없는 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거래를 하러 왔지요.”

나긋하면서도 음침한 목소리에 상곤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해지고 입이 말랐다. 변소의 악취도 느껴지지 않는지 숨을 가쁘게 들이쉬는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조정이 알고 있구나. 감찰원에서 나를 떠보려는 거야!’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범한이 떠보는 듯한 말투로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이를 앙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본관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은 대인이 명씨 집안과 결탁해 황실 금고 상선을 약탈하는 해적을 몰래 놓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이성으로 밀수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감아준 일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 협박해 거짓 자백을 받아내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십시오.”

상곤이 발끈하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밖에 있는 친위병이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이런 생각을 읽은 범한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게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대인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상곤이 목에 핏발을 세우며 반박했다.

“증거를 가져오십시오. 저희는 감찰원이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교주 수군은 경도에 있는 연약한 관리들과는 다릅니다. 만일 증거도 없이 멋대로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라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범한이 잔혹한 수단을 부리기로 유명하기는 했지만, 평생 전쟁터에서 살아온 상곤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대인이 이런 죄를 저질렀다고 제가 믿든 믿지 않든, 천하 백성들과 관리들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발 밖에 서 있는 범한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폐하께서 대인이 죄를 지었다고 확신하시고 저를 교주로 보내 처리하라 하셨다는 사실이지요.”

상곤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가 교주 수군에 문제가 있다고 믿고 있다면 국법으로 자신을 처벌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자신을 처벌할 것이었다. 경국 황제의 세 차례의 북벌에 동행한 노장인 상곤은 마음 깊이 경국 황제를 숭배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발 밖에서는 계속 범한의 간담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대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상곤이 의자에 털썩 앉아 눈동자를 재빨리 굴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제사 대인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수군 제독인 상곤은 1품 고위 관리였고, 범한은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감찰원 제사는 품계도 등급도 없는 관직이었다.

그래서 상곤은 변소에서 대화하는 중에도 이 점에 집착하며 절대 기세를 굽히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 무의식적으로 범한을 제사 대인이라고 칭하는 순간 그의 마음속 방어선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발 밖에서 범한이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대인은 섭씨 집안과 관계가 깊지 않고, 연소을과도 별다른 친분이 없지요. 또 지난 세월 동안 장 공주마마와 연관된 일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대인은 관직도 높고 가진 권력도 상당합니다······ 하지만 군산회에서는 품팔이꾼 역할만 하고 계실 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인께서 정말 따르고자 하는 주인은 누구입니까······ 누가 대인에게 조정의 군대를 동원에 명씨 집안을 도와주고 동이성과 결탁하라 명령한 것입니까?”

상곤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절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범한이 말한 일들을 교주 수군이 그동안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에서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만일 자신이 죄를 인정한다면 범한이 아닌 황태후가 나서서 비호해 준다 하더라도 자신 가족들의 목숨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위에 알리지는 않을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설득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대인과 대인 집안 가족들을 죽여서 제게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상곤이 냉소를 지으며 이를 갈았다.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그런 일들이 우리 교주 수군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만일 증거가 있다면 천자의 검을 들고 진영에 찾아와 저를 체포하셨을 테지요. 증거가 없으니 저를 이렇게 악취 풍기는 변소가 가둬두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 범 대인, 오늘은 제 생일이니 잔치에 참석해 같이 이야기 나누고 술도 마시고 하시지요. 이 일은 감찰원에서 증거를 찾은 뒤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범한이 발 밖에서 한숨을 쉬었다.

상곤이 발 안에서 실눈을 띄며 귀를 기울였다.

범한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요. 대인은 1품 고위 관리이니 감찰원에서도 특명이 있지는 않은 한 체포해 심문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증거가 될 만한 사람은 그쪽에서 모두 죽여 없애버리지 않았습니까. 설사 한두 명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군대 쪽의 죄명을 모두 밝히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또 명씨 집안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큰 노마님이 공교롭게도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대인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대인의 죄명을 밝힐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범한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근심이 느껴졌다.

“폐하께서는 대인이 계속 교주 수군을 지휘하는 걸 원치 않으시지만, 조정에서는 대인을 이동시키는 것에 대한 저항이 큰 상태입니다. 게다가······ 감찰원은 대인의 죄명을 밝힐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인을 교주에서 쫓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범한의 말을 듣고 있던 상곤은 순간 황당하면서도 불길한 위험이 느껴졌다.

‘왜 밖에 있는 친위병들이 들어오지 않는 거지? 이때쯤 되면 들어와야 할 텐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문의 귓가에 범한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대인께서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시니 저도 이제는 방법이 없군요······. 가장 직접적이고 거친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곤의 눈동자가 수축하더니 기이한 장면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발을 바라봤다.

평평하게 펼쳐져 있던 청색 발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검은색의 무언가가 청색 발을 뚫고 자신의 가슴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상곤은 황당하기도 하고 화도 나기도 했지만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두 눈을 부릅뜬 채 검은색 비수가 얇은 청색 장막을 뚫고 자신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죽음 앞에서 상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체내의 정기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뭐지? 몸은 또 왜 이렇게 힘이 풀리는 거야······ 어째서······ 감찰원에서 감히 나를 암살할 생각을 할 수가 있어!’

그가 눈을 부릅뜨고 속으로 소리쳤다.

‘나는 교주 수군의 제독이야! 나는 교주를 장악한 지방 군벌이라고! 내 밑에는 1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있다고!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내 병사들이 들고일어나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들 거다!’

그는 조정의 1품 고위 관리인 자신을 감찰원에서 암살하려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감찰원은 뛰어난 암살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지금껏 경국 황제는 감찰원이 경국 고위 관리를 암살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만일 그런 사태가 생긴다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상곤이 변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는 범한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상곤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가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검은 색 비수를 보며 처참한 미소를 지었다.

범한이 비수를 걷어 들인 뒤 푸른색 발로 핏자국을 닦고 장화에 다시 꽂았다. 그리고 발 안 의자 위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상곤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경국 황제라면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노장을 죽일 수 없겠지만······ 자신은 황제가 아니었다. 빨리 담주로 가서 할머니를 뵙고 싶은 범한은 교주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범한이 수군 제독 상곤의 몸을 든 채 위풍당당하게 변소를 나왔다. 난폭한 정기에 천일도 심법이 더해지니 그는 온몸에서 강철처럼 강인한 힘이 샘솟아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변소 밖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그 앞에는 상곤이 그토록 와주길 고대하던 친위병들이 쓰러져 있었다. 분명 무공 실력이 상당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죽은 채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범한이 하품을 하는 그림자를 본 뒤 들고 있던 상곤을 던져 내려놨다.

“제독 저택 안에서 제독을 죽이는 일인데 더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일날이 제삿날이 됐군.”

그림자가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일을 너무 크게 벌였다는 걸 알고 있겠지.”

일을 너무 크게 벌였다고 지적하면서도 그의 살짝 창백한 얼굴에서는 근심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감찰원 6처의 진정한 수장이자 천하에서 제일가는 자객인 그림자에게 수군 제독의 죽음은 그리 큰 걱정은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림자와 범한의 실력이라면 설사 지금 누군가가 상곤이 공격했다는 걸 발견하고 포위한다고 하더라도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다.

범한도 전문적인 자객이었다.

그림자가 상곤의 목덜미를 잡고 나무 인형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들어 올렸다. 고개를 숙여 살펴보던 그가 의문 섞인 눈동자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계획대로 처리한 건가?”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가 동작이 빠르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변소는 저택 안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 종들이 잘 찾아오지 않았고, 밖은 숲에 가려져 있어 사람 눈에 띌 일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촛불을 켜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누군가가 지금 상황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변소는 항상 사람이 찾는 곳이었고, 범한은 그림자가 행적을 오래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한 사람이 발끝을 세우고 옅은 연기처럼 소리 없이 담장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손가락으로 담장을 짚고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큰 새처럼 날아올라 담장 밖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용한 제독 저택 후원은 앞채에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빼면 조용하기만 했다. 무녀들의 옷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생일잔치 분위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아무도 변소에 간 제독 대인이 너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고, 제독 대인이 이미 죽었다는 걸 눈치챈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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