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변소에서 벌어진 암살 (1)
범한이 교주에 온 이유와 교주 수군과 대적하려는 이유는 모두 동해 작은 섬이 피로 물든 일과 관련이 있었다.
그 섬에 있던 해적들은 모두 명씨 집안의 사병으로 조정의 강력한 조사를 앞두고 죽임을 당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감찰원이 해적 안에 심어두었던 밀정은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그날 밤 잔혹한 상황도 알 수 있었다.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 그날 밤 해적들을 몰살한 건 교주 수군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후 몇 개월 동안 감찰원에서 능력을 확충해 교주 쪽을 조사했지만, 지금까지도 구체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포착해 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막을 아는 조정 고위 인사들은 이미 교주 수군이 명씨 집안과 군산회, 그리고 장 공주와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분명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국 황제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는 걸 용인할 수도 없었기에 범한에게 밀서를 보내 이 일을 처리할 전권을 부여했지만,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동원할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에 교주 수군 문제를 떠안게 된 범한은 한참동안 골머리를 썩이어야 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주동자들을 처벌하고 교주 수군이 다시 조정의 통제를 받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군은 명씨 집안이나 최씨 집안과는 달랐고, 2 황자와도 달랐다. 막강한 무력을 지닌 교주 수군을 함부로 건들었다가 군대 전체가 들고일어나는 일이 생긴다면 조정이 반란을 진압하든지 말든지와 상관없이 범한은 입지에 상당히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더구나 교주 수군은 명씨 집안의 밀수 사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했다. 동이성 밀수 과정에서 교주 수군이 암암리에 눈감아주고 용인해 주지 않았다면 십여 년 동안 순조롭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해상 밀수 노선에서 교주 수군이 맡은 역할은 범한의 감찰원과 위화의 북제 금의위가 육지 밀수 노선에서 맡은 역할과 같았다.
다만 그 섬에서 수군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후계상은 이미 생일잔치에 갔고 작은 저택에는 분장한 범한만 남아 있었다. 후계상은 교주 수군의 밀수와 관련된 정보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런 진전도 거두지 못했다. 후계상은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집안에 종을 많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저택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범한은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소한 부분까지 계획을 정리하고 생각하던 그가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뒤 자신이 하려는 일은 정치적으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었고, 방법으로 보면 야만적이기 그지없었다.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이 일의 전권을 줬다는 건······ 황제가 이 일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의미였지만 자신도 교주의 일을 처리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만일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조사하고 알아본다면······ 수군 고위 장군들도 바보는 아닌 이상 자신이 멸문지화를 당한 죄를 저질렀다고 순순히 자백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만일 군대와 감찰원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군대 측이 반란을 일으키는 최악의 결과가 생길 수도 있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교주 수군이 교주성을 포위한다면 범한과 부하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위험하지만 단호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오늘은 수군 제독 대인 상곤의 생일이라서 수군 고위 장군들이 모두 교주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한마디로 자신들 밑에 있는 군사들과 떨어진 채 소수의 경호 인력만 데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교주 수군의 병력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성안과 밖의 연락이 수월하지 않을 테니 수군의 대처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범한이 이 기회를 이용해 생일잔치에 참여한 고위 장군들을 한 번에 모아 해치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과연 범한에게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일까? 그의 제자인 후계상마저도 스승의 무모한 자신감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서 제독 저택 안에 있는 고위 장군들과 병력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 * *
수군 제독 상곤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좌석을 가득 채운 하객들을 바라봤다. 진중하면서도 거만함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그가 이렇게 웃는 이유는 오늘 기분이 좋기도 했고 사십 평생 바람과 파도를 벗하며 살아온 끝에 높은 자리에 오른 게 만족스러워서였다. 성안과 밖에 있는 관리들과 거상들이 자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멀리 강남 큰 인물들까지도 찾아와 선물을 바치니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음껏 웃을 수 없는 건 자신의 위치 때문이었다. 그는 교주 일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 고위 장군이었다. 명의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지방 군벌의 우두머리인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수십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항상 엄숙하고 위엄있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오늘 잔치로 은전 십여만 냥은 걷어 들이겠지?’
제독 대인이 속으로 계산해 보며 잔을 들자 아래 앉아 있던 하객들도 같이 잔을 들고는 다 함께 마셨다.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상곤의 시선이 오른쪽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그 자리에 있는 관리는 표정이 굳어 있는 게 아무래도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더구나 그 관리는 교주에 부임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건만 자신을 공경하기는커녕 예의상의 안부 인사도 하지 않았다.
상곤이 그런 관리를 혼내주기는커녕 오히려 오늘 자신의 생일잔치에까지 초대한 이유는 그 관리가 무척이나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곤이 이처럼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리는 바로 교주 전리 겸 주판을 맡은 7품 말단 관리 후계상이었다.
변변치 못한 말단 관리였지만 후계상이 상당한 배후를 지녔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후계상은 범한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작년 춘시에서 삼갑에 든 인물이었다. 그래서 상곤과 같은 1품 고위 관리라도 범씨 집안의 체면을 생각해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더욱이 강남 일 때문에 상곤은 줄곧 감찰원을 경계하며 마음속 깊숙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의 제자를 멀고 외진 교주에 보낸 이유가 의심스러웠다.
‘감찰원에서 교주 수군을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명씨 집안에서 비밀을 누설하지는 않았을 테고, 큰 노마님도 이미 돌아가셨으니 증거를 찾을 수도 없을 텐데.’
상곤은 자신의 생일잔치를 축하는 술잔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속으로 섬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되뇌었다. 그날 섬에 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심복이었고, 동원한 병력은 매일 군영에 갇혀 있으니 다른 곳에 말을 퍼뜨릴 위험도 없었다.
제독 대인이 술잔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자 하객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수군대는 소리에 정신이 든 상곤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부인들과 아이들이 모두 경도에 있는데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군. 교주의 일에 대한 소문을 조정에서 들었다고 해도 나를 건들려 하겠어? 그리고 감찰원에서도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나를 함부로 건들 수는 없을 거야.’
상황을 되짚어 본 끝에 자신이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자 상곤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무녀를 불러 흥을 돋우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후계상을 보니 상곤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힐끔힐끔 후계상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불편해진 아랫배를 감싼 그가 부하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는 저택 뒤에 있는 변소로 갔다.
* * *
후계상의 집에서 나온 범한은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제독 저택의 뒷담에 기대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황궁에서 높은 담벼락을 믿고 적은 수의 병력으로 순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독 저택 역시 두 장 높이나 되는 뒷담에는 넘을 사람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병력을 세워두지 않았다.
여름밤 안개구름 속에 숨은 범한이 체내의 정기를 운행하며 두 손을 회색 칠이 된 회색 담에 밀착시켰다. 그리고는 살짝 힘을 주어 손바닥에서 나온 얇은 정기로 어렸을 때 담주 절벽을 기어올랐던 것처럼 기어오를 수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체내의 난폭한 정기가 폭발한 뒤 해당의 도움을 받아 부상을 치료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체내의 정기를 운행해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탈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손쉽게 벽을 기어오르자 그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유령처럼 범한이 아무 소리 없이 제독 저택의 높은 담장을 기어오른 뒤 저택 안 수풀 안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후방에 호위병 두 명을 손쉽게 쓰러뜨린 뒤 그가 주방 밖으로 걸어가 감찰원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독을 주입하는 도구를 품 안에서 꺼냈다. 그리고는 대롱 앞의 있는 날카로운 바늘로 밀봉된 술 항아리를 찌른 뒤 마취약을 넣었다.
일을 마친 그가 옆에 열려 있는 술 항아리에서 술을 한 국자 떠서 마셔봤다. 교주 수군의 급료로는 마실 수 없는 맛 좋은 고급술이었다.
떠나기 전 그가 손에 있는 환약을 하나 던져 넣었다.
범한이 어둠 속에 서서 멀리 옥외에 있는 몇몇 친위병들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예상대로 상곤은 변소에 갈 때도 친위병이 밖을 지키게 했다.
변소 지붕에 기어오른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고는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발끝으로 소리 없이 착지한 그가 변소 안을 둘러보았다. 과연 제독 저택은 변소마저도 호화스러웠다. 변소는 안과 밖에 두 칸이 있었는데 밖에 칸에는 변기는 놓여 있지 않았다. 범한이 바지를 풀고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또로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변기에 앉아 있던 수군 제독 상곤이 화들짝 놀랐다. 이때 상곤은 바지 절반은 내리 채 가운데가 뚫린 의자에 앉아 있었고, 의자 아래에는 변기통이 놓여 있었다.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발견한 매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제독 저택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방어망을 뚫고 자신이 들어와 있는 변소에 같이 들어와 볼일을 보려하는 사람은 딱 한 종류였다. 은은히 풍기는 살기를 감지한 상곤이 맨 처음 하려고 한 반응은 당연하게도 크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자객이다!”
하지만 그는 총명한 사람이었기에 곧바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왜냐하면, 지금 변소에 잠입한 사람이 자신을 죽이러 온 자객이라면 굳이 소리를 내어 존재를 알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아무런 기척도 없이 변소까지 몰래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자객이라면 소리를 질러 친위병을 부르기도 전에 자신을 죽일 것이었다.
그래서 상곤은 숨을 죽인 채 변소에 잠입한 고수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 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나는 생일잔치에 초대하지 않은 겁니까?”
잔뜩 긴장해 살기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상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귀하의 이름을 모르는데 어떻게 초대장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칸을 가린 발을 걷고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안에 있는 늙은 장군은 큰일을 본 모양이었다.
“그쪽이 상곤이지요?”
상곤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경국 1품 고위 관리인 그는 이런 황당한 일을 겪어 본 적도 없었고, 더구나 상대방의 말투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경박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성격대로 당당하게 나설 때가 아니었다. 앞에 있는 젊은 청년에서 풍겨 나오는 위협을 느낀 상곤이 대답했다.
“제가 상곤이긴 합니다만······ 손을 씻은 뒤 다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왜요? 사람이라도 부르려는 겁니까?”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목이 터지라 소리쳐도 소용없을 텐데.”
상곤이 주름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는 귀하는 누구십니까?”
“제 이름은 범한입니다.”
범한이 발을 내려놓은 뒤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