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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04화 (504/1,108)

504화 교주성 안에서 벌어진 생일잔치

범한이 떠난 뒤 흑기도 곧바로 산에서 내려왔다. 이들은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관도가 아닌 길로 이동해야 했다. 범한이 아무리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흑기가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4백여 명의 기병으로 경국 3대 수군 중 하나인 교주 수군을 진압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그렇기에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시선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최대한 조용히 성으로 접근했다.

한편 홀로 산을 내려온 범한은 멀리 교주 성문이 보이자 말에서 내렸다. 그가 말을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 어릴 때 배운 감찰원의 방법대로 놓아주었다. 그가 탄 말은 상당히 영리해서 곧장 주인의 뜻을 이해했다. 말이 터벅터벅 깊숙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범한이 말을 죽이기 싫어 풀어준 건 아니었다. 굳이 피비린내를 풍겨서 골치 아픈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걸 확인한 그가 큰 나무 아래 주저앉아 작은 구덩이를 파더니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안에 넣었다.

이후 몸에 있는 장비를 꺼내 자세히 검사하고 검은색 비수와 3처에서 새로 제작한 암살 석궁, 몸에서 한 번도 떼 놓은 적 없었던 마취약과 독약들을 확인했다. 그가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한숨을 쉬었다.

범한은 왕계년이 보낸 황제의 검을 구덩이에 묻으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정정당당하게 이 검을 사용할 때가 올 거라 생각했다.

큰 나무를 떠낼 때 감찰원 제사 작은 범 대인은 이미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변장한 그는 여전히 잘생기기는 했지만, 평소만큼은 아니었다. 얼굴 양미간은 더 넓히고 입꼬리는 아래로 쳐지게 분장한 그의 얼굴은 무척 잘생겼다기보다는 진중해 보였다.

무명옷 안에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잠행복을 입고 있었지만, 가장 좋은 소재로 만들어 통풍이 아주 잘 되었기 때문에 더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산길을 따라 교주성으로 걸어가는 데 태양은 이미 산 뒤로 숨어버려 사방에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성문 앞에 다다른 범한은 통행증을 제시한 뒤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관례상 하는 몇 가지 질문에 답한 뒤 쉽게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감찰원에 제작한 통행증은 수준 높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범한은 병사의 질문에 답할 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성실하게 답했다. 이곳 교주는 해안가에 위치해 있어 매일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기 때문에 성문 병사들도 손쉽게 통과시켜주었다.

성문을 지날 때 범한은 일부러 어수룩한 미소를 지으면서 멀리서 온 여행객 행세를 했다. 그는 발걸음을 쉴 새 없이 옮기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 민가와 경치를 구경하는 척하면서 일이 바쁜 외지인 행세를 완벽하게 해냈다.

교주성은 과연 평범한 주의 성과는 달랐다. 바다와 인접해 있었지만 상업,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형 화물 상업은 발달해 있지 않았다. 성안에서 가장 번화한 대로 양쪽에도 장사하는 점포들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상점들은 문이 닫혀 있고 간판도 없어 외지인이 보면 정확히 뭘 영업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시 전체에서 사람 사는 열기나 냄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곳의 분위기는 지나칠 정도로 엄숙하고 무거웠다.

성안을 돌아다니며 주변을 자세히 관찰한 범한은 교주 수군이 상주해 있어 이곳이 다른 성과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경도와 멀리 떨어져 조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교주에 수만 명의 병사가 주둔해 있으니 그 존재 자체만으로 위협이 될 게 분명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수군과 비교하면 교주 현지의 힘은 보잘것없었기에 교주성에서 가장 높은 관리인 지주도 수군 제독 앞에서는 고분고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교주의 경제 사정은 수군에게 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만 명의 병사가 주둔해 있는 수군은 조정에서 조달해주는 걸 물품을 제외한 모든 걸 가까운 곳에서 조달해 썼다. 비록 교주 백성들은 못마땅하겠지만, 기형적으로나마 번영을 할 수 있었다. 최소한 수군이 있어 물건이나 양식을 팔지 못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몇 가지 원인으로 수군의 후방 기지가 된 교주성은 대적할 힘이 없음을 알았기에 불만도 꺼내지 못하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거대한 수군을 옆에 둔 교주성 안에는 자연스럽게 군대 분위기가 가득했다. 성안에서 가장 좋은 지역은 군대에서 점용해 사용하고 있었고, 가장 큰 호화 저택도 수군의 고위 장군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또 가장 인기 있는 기생도 수군들의 차지였다.

비록 조정에서 군에 주둔한 고위 장군들이 인접 주성 안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모두들 힘없는 규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교주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 주둔해 있는 주군이나 변군도 마찬가지였다. 군에서 힘 있는 사람들은 환경이 열악한 군영에서 지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안 저택과 여자를 사서 생활했다.

흑기는 정말이니 특별한 경우 중에서도 더 특별한 경우였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붉은 등이 높이 걸려 있는 기생집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군대가 있는 곳은 기생 장사가 어느 곳보다 잘 되었다. 다만 수군 장군과 병사들이 돈을 제대로 지급하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감찰원에서 전한 정보에 따르면 교주 수군은 비록 교주성의 황제나 다름없었지만, 지금까지 주변 풀은 먹지 않았다.

그들은 남쪽 해상의 풀만 먹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대저택으로 걸어갔다. 저택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추녀는 봉황의 날개처럼 높이 치솟아 있었고 문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리고 죽간으로 담이 처져 있었다. 거리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게 경도 관리들의 저택보다 더 휘황찬란해 보였다.

오늘 이 대저택에는 멀리 보이는 기생집처럼 붉은 등이 걸려 있고 안에는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문 위에는 흰 수염을 폴폴 날리는 노인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는데 아무도 큰 인물이 생일잔치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이처럼 즐거운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병사들이 대저택의 문을 지키고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얼굴이 거무스름하고 귀밑에 물때가 살짝 보이는 게 오랜 기간 바다 위에서 생활한 사람 같았다. 병사들은 곁눈질도 하지 않고 엄숙한 표정으로 저택 앞을 오가는 행인들을 감시했다.

대저택 앞에는 행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의 주된 임무는 하객들을 검사하는 거였다. 하객들은 수군 상급 장군이거나 교주성 관리이거나 부유한 거상들이었고 심지어는 멀리 강남에서 온 상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혹시나 흉기가 들어 있나 선물을 포함한 모든 물건을 샅샅이 검사했다.

오늘은 큰 인물의 생일잔치가 열리는 날이었기에 절대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됐다.

범한은 정기를 살짝 움직여 경비가 삼엄한 정문 말고도 저택 안 곳곳에 적지 않은 자객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의 입가에 심상치 않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대저택 바깥에 길모퉁이를 지키고 있는 호위병들의 기량을 살피는 동시에 주변 지형을 머릿속 그려 외웠다. 과거 한번 간 것으로 드넓은 황궁의 작은 길까지 모두 외웠던 그였기에 대저택 하나 정도 외우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왁자지껄한 소리를 뒤로 한 채 주변을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오므리며 길옆 담장 아래 어느 지점을 바라봤다. 익숙한 암호를 발견한 그가 몸을 돌려 들어가더니 막다른 골목이 끝날 때까지 걸어갔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막다른 골목과 마주한 담장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발끝을 들고 몸 전체를 꼿꼿이 세운 뒤 손바닥으로 담장 끝은 짚고 뛰어넘었다.

일반 백성으로 변장한 범한이 교주성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벽 뒤에는 아담한 크기의 작은 저택이 있었다. 아름답지도 않았고, 밖에 거리에서 나는 소음을 막아주지도 못하는 집이었다. 집의 방은 앞뒤로 해서 여섯 칸 있었지만 한 눈으로 봐도 오래되고 낡아 보였다. 아무래도 이 집에 사는 사람은 평범한 백성은 아니지만 경제 상황이 풍족해 보이지도 않았다.

범한이 돌계단 위로 올라가 방문을 벌컥 열더니 곧장 상석에 가서 앉았다. 옆에 있는 찻주전자 냄새를 맡은 그가 잔에 차를 따라 마셨다.

그때 옆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주인이 허둥지둥 방 안으로 들어와 낯선 젊은 청년을 바라보고는 뭐라 물으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낯선 청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그가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스승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범한이 웃으면서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비쩍 마른 후계상의 얼굴을 바라봤다.

“교주에서 일하면 홀쭉한 몸도 좋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어찌 더 마른 것인가?”

후계상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강남 제방에서 양만리를 만난 뒤 부임하기 위해 서둘러 교주로 와야 했다. 그 길이 무척이나 힘들었던데다가 범한을 대신해 경천동지할만한 일을 몰래 조사하느라 심리적 압박이 큰 상태였다. 교주에서 한 달 가까이 있었지만 아무런 진전도 거두지 못한 그는 스승님의 일에 도움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 잠도 자지 못할 지경이었다. 과거 경도 비 오는 거리에서 범한에게 여유 만만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두 눈이 움푹 꺼지고 양 볼은 비쩍 말라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게 무척이나 초췌해 보였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스승님처럼 세상일을 웃으면서 처리할 수 있는 담력이 없습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후계상은 자신의 제자 중에서 가장 생각이 치밀하고 일 처리도 과감했지만, 피비린내 나는 일 앞에서는 주눅이 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서생은 서생이었다. 그가 감찰원에서 진행해야 하는 일을 후계상에게 맡은 이유는 첫째 교주 관리들을 놀래주고 싶어서였고, 두 번째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교주가 큰 혼란에 빠진다면 분명 잘못이 드러나 처벌받는 사람도 생길 것이었고, 공을 인정받는 사람도 생길 것이었다······. 만일 그때 후계상이 큰 공로를 세운 게 드러난다면 단박에 승진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의 공을 제자가 가져가기를 바라는 범한 입장에서는 지금 무섭고 힘든 건 그에 따른 대가일 뿐이었다.

“그동안 교주에 있으면서 이상한 점을 보지는 못했나?”

범한은 그에게 교주 수군이 밀수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일은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부임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후계상이 관료 사회의 음흉한 일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후계상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대인의 제자인 걸 천하 사람들이 다 알아서 그런지 이곳 관리들도 제 앞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할 뿐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설사 수군과 결탁한 관리들이 있다고 해도 제게 드러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알아낸 정보는 없지만······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건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오늘이 수군 제독인 상곤의 생일잔치가 열리는 날이 아닌가? 자네는 초대받지 못한 건가?”

후계상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하급 관리이기는 하지만······ 스승님의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제독 대인이 저에게도 초대장을 보내긴 했습니다. 다만······ 오늘 스승님이 오신다고 하셨기에 계속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가야 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 정하지 못해서······.”

“가도록 하게.”

범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자네가 먼저 가게.”

먼저 가라는 말은 자연적으로 자신이 뒤따라가겠다는 의미였다.

후계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스승님 혼자서 말입니까?”

“혼자면 충분하네.”

범한이 살며시 웃었다.

“상곤은 소은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나 한 사람이면 충분하지.”

그리고는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생일날에 죽으면 생일날과 죽은 날이 같아지니 가족들이 제사 지내기도 편하겠군.”

놀란 후계상이 난처한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의 스승을 바라봤다. 그는 스승이 오늘 생일잔치에 잠입해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건 알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교주 수군의 경계를 뚫고 들어가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폐하와 스승이······ 1품 고관대작인 수군 제독을 암살하는 바보 같은 짓은 저지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생일잔치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어떻게 수습을 하려고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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