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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03화 (503/1,108)

503화 성에 접근하다

동이성의 해양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떠오른 범한의 눈빛에 불안감이 스쳐 갔다. 이 세계에서는 해군이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타격을 줄 만큼의 소란을 일으킬 수는 있었다.

‘만약 동이성이······ 담주에 상륙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로소 범한은 황제 폐하가 이 일을 왜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자신에게 직접 움직이라고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또 천주 제1수군을 폐지한 뒤 외진 교주에서 수군을 양성한 이유가 뭔지도 이해했다.

조정이 담주 남쪽에 위치한 교주에 강력한 수군이 주둔시킨 이유는 바로 동이성의 강력한 수군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지었다. 당시 어머니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던 천주 수군을 해체한 뒤 교주에 수군을 양성한 걸 보면 조정의 일 처리는 과연 물샐틈없이 치밀하고 정확했다.

“그런데 형 부통령은······ 왜 가면을 벗지 않는 겁니까?”

그가 웃으며 옆에 있는 흑기 부통령에게 최대한 온화한 말투로 물었다.

범한이 사신으로 북제에 갈 때 진평평의 엄명을 받아 동행했던 4백 명의 흑기는 이후 범한의 수하게 되었다. 검은 옷, 검은 말, 검은 얼굴을 한 4백 명의 기병은 상삼호에게서 소은을 데려오는 일이나 강남에서 군산회를 포위해 토벌하는 일 등에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다.

범한이 흑기를 가지면서 얻게 된 가장 좋은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범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직접 군대 쪽에 손을 뻗을 방법은 없었지만 강력한 흑기를 손에 넣은 덕분에 더욱 과감히 다른 사람과 담판을 벌일 수 있었다.

병권이 없는 상황에서 흑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 무척이나 안심되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범한이 자신의 부하인 흑기와 친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흑기는······ 주에 들어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에 가까이에 주둔할 수도 없었다. 반면 범한은 환락을 탐하는 사람이었기에 군영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과 흑기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어 지금까지도 서먹한 사이였다.

범한은 자신이 앞으로 무언가를 하려 한다면 자신의 수하 중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4백 명의 흑기를 진평평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온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4백 명의 흑기를 온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하려면 진심으로 복종할 수 있을 만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세 갈래 길에서 흑기를 만난 뒤로 그는 줄곧 왕계년과 등자월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던 방법을 사용해 은색 가면을 쓰고 있는 흑기 부통령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최대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한편 수장으로써 갖춰야 할 침착함과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도 형씨 성을 가진 흑기 부통령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 답답해진 범한이 한 질문에 형 부통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저 습관이 돼서 벗지 않는 것입니다.”

살짝 화가 난 범한이 애써 온화한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가면을 쓴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지요.”

말을 탄 채 범한의 옆을 따라가던 형 부통령은 겉으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범한은 그가 말고삐를 살짝 강하게 쥐는 걸 보고 상대방이 이 화제에 살짝 호기심이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눈치챈 범한이 눈썹을 살짝 씰룩거리며 설명했다.

“가면 아래 얼굴이 너무 못생겼거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은 흉터가 있어 쓰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얼굴이 미인을 뺨칠 만큼 곱상해서······.”

말을 하다 말고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제 외모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흑기는 위험을 임무를 주로 맡는 만큼 적이 겁을 먹을 만큼 흉악하게 생길수록 유리하겠지요. 그러니 형 장군은 앞에 이유로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아닐 겁니다.”

범한이 웃으며 은색 가면 사이로 보이는 상대방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빛나는 걸 바라봤다.

“그러니 형 장군은 분명 보기 드문 미남일 것 같군요.”

당황한 눈빛의 형 통령이 한동안 말없이 범한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사 대인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범한이 호탕하게 웃으며 속으로 과거 가면을 쓰고 싸운 난릉왕(蘭陵王)과 적청(狄靑)의 이야기를 적절히 얼버무려 말한 것이 통했다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형 통령은 여전히 가면을 벗지 않았다. 더욱 상대방이 궁금해진 범한은 주제를 바꿔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도 형 장군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군요.”

범한의 말에 형 통령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말고삐를 당기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소신, 성은 형이고, 이름은 무명(無名)입니다.”

“형무명이라고요?”

범한은 이미 자신의 수하 중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흑기를 인솔하는 부통령이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작년 처음 이 사람의 이름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가졌던 호기심을 떠올리며 천연덕스럽게 놀란 척을 했다.

“장군의 이름이 형무명이라면 저는 상관 요녀의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 * *

기병 수백 명이 나란히 줄지어 나아갔다. 동북 방향으로 뻗은 깊은 산골짜기는 조용했다. 게다가 주변에 일정 거리마다 정찰병이 배치되어 있어 행적이 알려질 일은 없었다.

대열 중간에서 형 장군과 나란히 서서 산골짜기를 지나던 범한은 아까 형 장군의 이름을 가지고 놀렸던 걸 떠올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 장군이 말했다.

“소신은 성이 형이고 이름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무명(無名)입니다.”

‘감찰원 5처의 큰 인물의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는 흑기 부통령이라?’

범한이 살짝 입을 벌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감찰원이 마귀 같다고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어. 진평평 대인의 지시를 따르는 감찰원의 전체 구조나 관리들의 경력 모두 기이하기 짝이 없으니까.’

형 장군이 자신을 속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범한이 가벼운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이름이 있는 게 좋을 텐데요.”

형 장군이 한참 말없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인께서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이름을 지어 달라 요청받는 것은 상당히 영예로운 일이었다. 놀란 범한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장군이 침착하면서도 진심 어린 눈빛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던 범한이 좋은 이름이 떠올랐는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무예를 뜻하는 무(武)자에는 창 과(戈)자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형 장군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무장이니 외자로 창 과자를 쓰심이 어떠합니까?”

사실 형 장군은 과거 뛰어난 군인으로 높은 분에게 미움을 받게 되자 진평평이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흑기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약간은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이름을 듣자마자 범 제사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색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분명 입가에 은은한 미소 짓고 있었다.

당시 군대에서 상사들이 모두 사형에 처하거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실종된 뒤 줄곧 이름 없이 은색 가면에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살아온 풍운아는······ 자신의 이전 삶을 모두 끊고 몇 년을 산 끝에 다른 이름을 가지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형과 장군은······.”

달그락달그락하는 말발굽 소리에 섞여 범한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누구에게 미움을 받은 겁니까?”

* * *

형과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에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제사 대인의 날카로운 질문에 놀란 것인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침묵하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씨 집안입니다.”

범한이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진씨 집안이 군대 안에서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늙은 진 대인은 오랜 시간 추밀원 정사 자리에 군림해 있었고, 작은 진 대인은 현재 경도 수비 자리를 맡고 있었다. 범한의 장인어른이 임약보도 조정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 중 하나로 진씨 집안을 뽑았으니 형과 부통령이······ 진씨 집안을 피해 흑기가 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은 저절로 진평평 대인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 절름발이 노인은 겁도 없이 진씨 집안의 원수를 데리다가 쓸 생각을 한 것도 모자라 그를 흑기 부통령 자리까지 오르게 해준 것이다.

“저는······ 진씨 집안과 관계가 좋은 편입니다.”

그의 말뜻은 만일 형과가 원한다면 자신이 경도로 돌아가면 원한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형과가 웃었다. 가면 밖으로 보이는 얼굴에 주름이 지는 걸 보니 활짝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인 감사합니다.”

형과가 감사함을 표시한 뒤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옆에 있는 과묵하고 용맹스러운 부하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려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던 그가 슬며시 물었다.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진씨 집안의 원한을 산 겁니까?”

형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영에서 진씨 집안 큰아들을 죽였습니다.”

‘뭐라고? 진씨 집안 큰아들? 진항의 형을 죽였다고?’

범한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놀랐다. 진씨 집안 큰아들이 만약 형과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조정에 내로라하는 무장이 되고도 남을 인재였다.

‘진평평 대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람을 거둬들인 거지? 언젠가는 큰 문제가 될 사람을 감찰원에 들인 이유가 뭐지?’

그때 앞쪽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 없이 앞으로 나가던 흑기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발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아닌 말의 걸음을 일제히 멈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말이지 천하를 통틀어 보기 힘든 기술이었다. 아마도 천하에 이러한 기술은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서호의 왕 장군 정도일 것이었다.

곧 하늘이 어두워질 것이었다.

범한과 형과는 말을 달려 산골짜기를 지나 산 중턱에 올라가 아래 성지를 바라봤다.

성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안에는 곳곳에 불빛이 켜져 있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이곳이 바로 교주였다.

범한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푸른색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하늘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경비가 삼엄한 항구와 정박 되어 있는 수십 척의 전함, 밝게 불이 밝혀진 진영은 어렴풋하게 보였다.

저곳이 바로 교주 수군의 진영이었다.

“알아서 움직이시고, 저곳에 들어가려 하는 사람은 모두 죽이십시오.”

굳은 얼굴로 아래를 바라보는 범한의 머릿속에 형과의 문제는 이미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무정한 눈빛으로 아래를 주시하며 명령을 내린 그가 말고삐를 바짝 당겼다. 흑기 대열에서 벗어난 그는 단 한 명의 호위도 없이 홀로 말을 몰아 좁은 산길을 지나 산 아래 교주성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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