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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02화 (502/1,108)

502화 산에서 나오다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조정 안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호부를 조사해 본보기로 삼을 생각이었겠지만······ 호부는 황제의 바람처럼 희생양이 되지 않았으니······ 이제 무슨 일이 생기게 될까? 황제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로 향할 것인가?’

“강남의 일은 묻지 않겠네.”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은 임약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자네의 능력을 믿네. 겉으로 보기에는 이번에 강남에 내려가 자네가 한 일들이 제멋대로인 듯 보이기는 하지만 분명 앞으로 일들에 대한 계획이 있을 것 아닌가······. 연말에 경도에 돌아가 업무를 보고할 준비를 잘해두도록 하게. 더욱이 그쪽 사람들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지 않는가.”

범한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임약보도 따라 웃으며 대견스럽다는 눈빛으로 사위를 바라봤다. 사위가 침착함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궁금해진 그가 물었다.

“폐하야 과거의 경험과 일들로 자신감을 가지실 수 있지만······ 자네는 자신감을 가질 만한 경험이나 일이 없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리 자신만만한 겐가?”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제가 이 세상에서 운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 믿습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말문이 막힌 임약보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잠시 뒤에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원굉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원굉도는 과거 재상가의 문객이자 장인어른인 임약보와 수십 년간 우정을 이어온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이후 그는 재상이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뒤에서 모략을 꾸몄고, 지금은 신양 최고의 모사가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그가 지금 누리는 자리는 친구를 팔아 이룬 것이었다.

‘장인어른이 갑자기 원굉도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미간을 찌푸리고 곰곰이 고민해 보던 범한은 장인어른이 자신을 배신한 원굉도를 죽여 복수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해졌다.

“원굉도는 대단한 사람이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멋대로인 사람이기도 하지.”

임약보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나를 배신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네.”

“장 공주 사람이지 않습니까?”

“운예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까?”

임약보가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1년이 지났군. 시간이 지나면서 원굉도에 대한 미움도 옅어졌고 자연스럽게 그 일의 진정한 배후가 누구인지 생각하게 되었네. 하지만 정말 도무지 모르겠더군.”

임약보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나를 대신해 물어봐 주게······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말이야.”

범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이번에 물어볼 때는 검이 아니라 쇠뇌의 화살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임약보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경도에 큰 혼란이 닥친다면 그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거네.”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임약보는 사위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해주지 않는 채 이 문제를 골몰히 고민할 뿐이었다.

경도 외곽 장원에 있는 절름발이 노인은 아마도 이 말의 뜻을 알고 있을 것이다.

* * *

범한은 오주에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서재로 달려가 장인어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과거 일들이 알고 싶기도 했고 장인어른의 정치 수단을 배우고 싶기도 했다.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범한은 덕분에 풍부한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간사한 재상이라 불리는 장인어른만큼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지는 못했다.

범한은 과거 북제 사신으로 갔을 때도 소은이 탄 마차에 자주 찾아가 배우려 했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배우려 하는 자세야말로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과 저녁에 명상과 혹독한 수련으로 자신을 단련했고, 또 배울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고자 했다. 사실 이와 같은 의지와 노력은 나태하고 산만해 보이는 그의 겉모습과는 대치되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이어진 대화를 통해서 범한은 조정의 중요한 점들을 알 수 있었다. 또 가장 정보가 없었던 군대 쪽 집안인 진씨 집안과 섭씨 집안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정보들을 알면 알수록 범한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은 갈수록 커졌다. 대대로 조정에 충성했던 섭씨 집안이 장 공주 쪽과 관계를 깨끗하게 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그는 이런 의문을 마음속 깊숙이 숨겨 두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강남의 일에 대해 임약보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결국 강남 총독 설청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범한은 편지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 로를 책임지는 총독 대인이 자리에서 물러난 전임 재상의 체면을 생각해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인어른이 설청이란 인물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였다.

설청은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관리였고, 공로를 세우길 좋아했으며······ 용의주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판단을 기준으로 범한은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했다. 이런 성격을 가진 관리라면 명신이 되는 걸 가장 바랄 테니 더러운 일에 자신이 개입되는 걸 극도로 꺼릴 게 분명했다. 그러므로 앞으로 잔혹한 수단을 벌일 때는 먼저 설청이 몸을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이후 공로를 그에게 돌린다면 설청도 암암리에 범한을 도와줄 것이었다.

황실 금고 밀수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고 해상 수색도 계속되고 있었으며, 명씨 집안에 대한 수탈과 압박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소주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명청달은 태평전장과 연락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초상전장에서 갈수록 많은 은전을 조달하고 있었다.

범한은 그 임계점이 넘는 순간이 명씨 집안이 몰락하는 순간이라 생각했다.

* * *

오주 성 밖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산이 있었다. 이 산에 빼곡하게 자라 있는 나무들은 남쪽에서 작렬하는 햇볕을 가려줬고, 잔잔하게 부는 산바람은 더위를 식혀줬기에 여름 피서를 보내기 가장 좋은 장소였다.

골치 아픈 정치 문제들과 떨어져 오주에서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을 가지게 된 범한은 완아와 대보를 데리고 주변 산에 가서 놀았다. 사냥도 하고, 개울에서 물놀이도 하고, 개구리를 구워 먹기도 했고 완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산 안에서 밤을 보낼 때는 하늘 위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그래서 범한은 아내를 품에 안고 키득대며 밀담을 나누거나 큰 소리로 시끌벅적하게 놀면서 밤하늘을 감상했다. 그는 앞으로 천하의 대세가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지금 중요한 굳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세상의 근심에서 벗어나니 무척이나 즐거웠다.

범한과 임완아는 약속이나 한 듯 소주, 경도를 비롯한 다른 곳과 관련된 일들을 언급하지 않았고, 해당타타나 장 공주, 황제 등과 같은 사람들도 머릿속에서 지웠다. 두 사람은 그저 북제에 간 범약약이 어떤 수행을 받고 있을지와 경도 외곽에 위치한 범씨 집안 장원에서 등자경이 잡아 왔던 들짐승 고기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덕주에서 생산된 닭다리 살이 얼마나 부드럽고 기름졌는지와 같은 일들만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산을 돌아다니면서 물을 만나면 물에 들어가 놀았고, 새끼 사슴을 만나면 늑대에게 잡아먹힐까 걱정했다. 숲을 따라 흐르는 개울 물소리에 즐거워하고 벼랑 위를 지나는 구름에 감탄하기도 했다. 혼인한 뒤에 좀처럼 가져보지 못했던 여유였다. 마치 세상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범한과 임완아 두 사람만 남은 듯했다.

아니다. 대보도 함께였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대보는 항상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날들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었다. 이런 달콤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범한은 산에서 나와 번잡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대보도 우리와 같이 가나요?”

범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장인어른 곁에 있도록 하는 게 어때요? 장인어른 곁에 아무도 없잖아요.”

임약보는 현재 혼자 오주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친척 자제들이 많이 있었지만, 진짜 마음을 붙일 가족은 몇 명 없었다. 임완아는 오늘 범한을 따라가야 했으니 대보까지 그들을 따라간다면 연로한 임약보 혼자 남아 있어야 했다.

믿고 의지할 아들이 없는 고독감이 어느 정도일지 범한은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고집을 부리시는걸요.”

임완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범한에게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산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쉰 덕분에 임완아의 몸은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그녀가 양쪽 볼이 살짝 상기된 모습으로 큰 눈을 껌뻑이며 범한을 바라봤다.

건강해진 아내의 모습에 범한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그럼 모두 가죠.”

수일 뒤 검은 마차 행렬이 오주를 떠나 천천히 동쪽을 향해 갔다. 이후 수많은 작은 도시와 큰 산을 지난 마차는 세 갈래 길에 멈춰 섰다.

이곳은 동산로 구역으로 세 갈래 길은 동산로 관할의 두 주성으로 이어져 있었다.

동쪽으로 가면 담주였고 북쪽으로 가면 교주였다.

“나는 교주에서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먼저 담주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범한이 마차를 세운 뒤 임완아에게 말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열흘이면 될 거예요.”

임완아는 남편이 교주에 가서 뭘 하려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황제의 명을 받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애써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말했다.

“아무 꽃이나 꺾으려 하지 말아요.”

임완아가 아무 여자하고 바람피우지 말라고 넌지시 지적을 주자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멋쩍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길가 아무 꽃이나 꺾지는 않을 테니.”

그때 줄곧 임완아 옆에 앉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대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장원에······ 꽃 있는데.”

대보의 말에 순간 소주 장원에 있는 해당타타가 떠오른 범한이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임완아도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샐쭉거렸다. 자신의 말이 가져온 파장을 이해하지 못한 대보만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잠시 헤어졌다.

갈림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던 범한이 채 3리도 가지 않은 지점에서 마차를 세우게 했다. 그가 기지개를 켜며 옆에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준비됐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제사 대인.”

멀리 숲 쪽에 음침한 살기를 내뿜는 검은 색 기병들이 대열을 맞춰 서 있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동북쪽에 위치한 동산로는 경국 7로 중 하나였다. 이곳 효산에서 정북 방향으로 가면 동이성이 암암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은 제후국을 거쳐 곧바로 북제 영토에 진압할 수 있었다. 범한은 지난해 사신으로 북제에 갔을 때 북쪽 창주를 돌아 북해를 거처 진입하는 다른 경로를 사용했기에 이 경로를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는 오늘 북쪽으로 가려는 게 아니었다. 지금 북제에는 그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말을 탄 채 손에 들린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지도 한쪽 귀퉁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교주는 담주 아래에 위치해 있었군요······ 그런데 여기 하얀 공백으로 된 곳은 어디입니까?”

그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형씨 성을 가진 흑기 부통령이었다. 얼굴에 은색 마스크를 쓴 형 장군이 음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담주의 북쪽은 험준한 산에 빽빽한 밀림이라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도를 그릴 때 하얀 공백으로 비워둔 것이지요. 이 큰 공백을 따라 정북 방향으로 해만을 따라가면 동이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동이성이라고?’

범한이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언젠가는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천하에서 가장 큰 도시인 동이성이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담주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니.’

게다가 담주성 북쪽에 있는 밀림으로 둘러싸인 험준한 산은 범한에게 무척 익숙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길을 찾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곳 밀림은 환경이 무척이나 특이했는데, 특히 바닷가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쭉 이어져 있어 새들도 다가서기 힘들었다.

만약 동이성에서 경국으로 내려오려 한다면 효산 서쪽으로 돌아서 오거나······ 해로를 통해서 오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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