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장인어른과 함께 군산회를 이야기하다 (1)
사위의 반박에 임약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자네는 이 일이 정말 단순히 남녀 사이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장인어른의 질문에 범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제가 봤을 때 본질상······ 아주 큰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임약보가 비연호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사위를 바라봤다.
“그런가?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 낭자가 북제에서 성녀라 칭송받는 사람이며, 북제 황실과 돈돈한 사이라는 것과 관련 없이 그냥 사소한 남녀 사이의 문제일 뿐이라는 건가? 자네는 혼인을 치룬지 반년도 되지 않아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파는 걸 내가 허락할 거라 생각하는 겐가? 그리고 폐하께서 이 일을 윤허해 주실 것 같은가?”
범한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해당과 혼인하지 않는 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사람들에게도 더 좋은 일인 만큼 이 일에서 자신의 편에 서줄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임약보의 입장에서 사위가 딸을 놔두고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하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장인어른······.”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보고 모질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임약보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자네가 한 말에 흥미가 생긴 건 사실이지······. 나는 자네가 그 낭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네. 내가 신경 쓰는 건 조정에서 자네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져서 우리 임씨 집안이 더욱 안정되는 일뿐이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이 밖에서 도와야 경국에서 그의 지위도 더욱 안정되고 공고해질 수 있었다. 그는 어느 방면에서는 분명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이전 세계의 관념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정치적인 일과 연관시키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해당이 자신과 혼인을 승낙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임약보가 범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사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이 웃었다.
“사실 자네나 나나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낭자가 범씨 집안에 시집을 오느냐 오지 않느냐는 사실 중요치 않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낭자가 어느 사람에게도 시집가지 않는 것이네.”
범한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늙은 여우인 장인어른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같다는 걸 인정했다.
“이만 완아와 대보를 보러 가보겠습니다.”
그가 일어나 장인어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임약보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완아는 걱정할 필요가 없네. 그 애가 어려서부터 내 옆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황궁 안에서 성장했으니 이 상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거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항상 장인어른의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모습에 놀랐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가 장 공주 사이에서 임완아를 낳고 출세 가도를 달렸던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면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장인어른은 자신보다 더 모진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저는 그저 완아를 보러 가려는 것뿐입니다.”
“완아와 대보가 이번에 처음으로 오주에 와서 집안 형제와 형수들이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네. 아마 다 함께 이동천에서 놀고 있을 거야.”
임약보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사위를 바라보았다.
“설명해줘야 할 일이 있으니 좀 더 있다가 가도록 하게.”
범한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자 임약보가 물었다.
“내가 자네가 완아와 혼인하도록 허락한 이유가 뭔지 아는가?”
범한은 이 점에 짐작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임약보가 쓰다듬던 비연호를 탁자에 내려놓고 설명했다.
“폐하께서는 훨씬 이전부터 완아를 자네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네. 그게 아마도 경력 원년에서 2년 사이에 일이지. 당시 나는 진평평 대인이 자네와 완아를 혼인시키는 일을 단호하게 반대를 하는 걸 보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눈치챘네.”
그 말을 들은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진평평 대인이 반대한 것과 장인어른이 반대한 것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임약보가 그의 의문에 대한 답을 바로 말해줬다.
“조정 문무백관 중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딱 세 명일세.”
“세 명이요?”
“그래, 자네 아버지와 진평평 대인, 그리고 진씨 집안 어르신일세.”
범한이 세 사람을 곰곰이 떠올려 봤다.
‘진평평 대인이야 감찰원의 수장이고, 재상을 제외하면 조정 문무백관 중에서 진평평 대인만큼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없지. 게다가 진평평 대인은 누구보다도 모략을 꾸미는 능력이 출중하니 장인어른이 두려워할 만해.’
‘또 진씨 집안 어르신의 경우 연세가 많고 조정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추밀원 정사이고 군대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진씨 집안 어르신은 품계가 제일 높은 대신 중 한 명이고 군대에 지인들과 제자들이 고루 포진되어 있는 만큼 장인어른이 중요시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내 아버지는 그때 호부 시랑에 불과했는데······ 뭣 때문에 두려워하셨던 거지?’
임약보는 사위의 눈동자에 드리운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 세 사람 중에서도 나는 진평평 대인의 안목을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진평평 대인이 자네와 신아의 혼사를 강경하게 반대했을 때······ 그렇게 강경하게 반대를 할 만큼 혼사에 문제점이 있어 보이지 않았네······. 그래서 나는 진평평 대인이 분명 내가 모르는 어떤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임약보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나도 반대한 거네.”
범한은 아무래도 자신이 밖에 놀고 있는 완아와 손위처남에게 바로 갈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장인어른이 자신과 나랏일에 대해 의논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럼 나중에 혼인에 동의하신 이유는 뭡니까?”
“자네에게 말하지 않았나······. 잊어버린 모양이군.”
호탕하게 웃는 임약보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공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에게는 대보와 신아만 남게 되었네. 그 와중에 폐하께서는 은연중에 나에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뜻을 보이고 계셨지······. 나는 조정에서 있으면서 간사한 재상이라 불리며 수많은 적을 만들었네. 내가 재상 자리에 있을 때야 가족을 보호하고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었지만······ 내가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누가 내 가족을 보호해 주겠는가? 누가 우리 대보를 보살펴 주겠는가?”
임약보가 범한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자네가 비연호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 그 날 나는 자네가 내 가족을 보호해 주고, 대보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확신했네. 그래서 혼사를 허락한 것이지.”
그때 범한이 가져온 녹주석으로 정교하게 만든 비연호는 지금 임약보 옆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장인어른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살아 있는 한 완아가 모욕을 받거나 대보가 불행한 삶을 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임약보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자네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자네가 섭가 여주인의 아들인 걸 알게 되었는데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화제가 점점 범한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줄곧 먼저 입 밖에 낼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었던 방향 말이다.
“제가 봤을 때 조정 문관 중에서······ 임소안을 빼면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가 2 황자와 싸움에서 이긴 것 같지만 만일 조정에서 세력다툼이 벌어진다면······ 저를 대신해 변론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임약보는 사위의 말뜻을 이해했지만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은 채 넌지시 대답했다.
“문하중서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한 것인가?”
범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게 같은 편이란 뜻은 아니지요. 입장을 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을 때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임약보가 사위인 범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자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가?”
범한은 장인어른의 물음에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먹이를 받아먹으려 하는 새끼 새처럼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임약보가 ‘껄껄’ 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웃다가 돌연 정색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해줄 수 없네.”
장인어른의 대답에 범한은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 뜻을 곧장 이해했다. 임약보는 자기 가족의 운명을 쥐고 있는 범한을 항상 도와주려 했다. 그러니 그가 해줄 수 없다고 한 말은 정말 도와주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시기가 무르익지 않아서 해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범한이 살짝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임약보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경도를 떠난 뒤 조정 문관들 파벌에 약간의 변동이 일어났네. 2 황자와 운예 쪽에 선 사람, 동궁 쪽에 선 사람, 그리고 문하중서 편에 선 사람들도 있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도 이런 현상을 발견하고 심상치 않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말 이상한 것은 어째서 자네 편에 서려 하는 사람은 없냐는 것일세.”
임약보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사위를 바라봤다.
“자네는 지금 천하 사림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자 장묵한에게 증서를 받은 인물일세. 그런 면에서 자네의 나이가 젊기는 하지만 서생들의 수장이라 볼 수 있지. 그런데······ 왜? 어째서 태상사 소경 임소안을 제외하고 아무도 자네 편에 서지 않으려는지 이유를 아는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네 편에 서려는 문관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네······. 그동안 자네는 각 군과 주에서 힘들게 관직 생활을 하고 있는 제자 네 명을 제외하고 세력을 조금도 확장하지 못했어.”
범한도 이 점을 가장 이해할 수 없었고 골치가 아팠다. 범한은 처음에는 황제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막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경국 황제는 자신이 군대와 관련을 맺지 않도록 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 문관들과 교류하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문관들이 자신과 힘을 합치려 하지 않는 이유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이 세력을 확장하는 걸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는 그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장인어른을 바라봤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에야 범한은 지금까지 문신들이 자신의 편에 서려 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멀리 오주에 있는 장인어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장인인 임약보가 아직도 문인들이 범한의 편에 서는 걸 막고 있던 것이다.
범한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리보다 아름다운 꽃은 가장 먼저 꺾이는 법이네.”
임약보는 자신의 말을 이해한 사위가 마음에 드는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자네는 너무 주목받고 있네. 심지어 황자들보다도 더 주목을 받고 있지······. 그래 내가 자네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네. 황실에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잠시 자네를 지켜보기만 하고 편에 서지는 말라고 했지······. 이들이 언제 자네 편에 설지는······.”
임약보가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관직에서 물러났는지 아는가? 애초에 너무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려와야 했던 거지. 완아의 남편인 자네가 내 전철을 밞는 건 원치 않네.”
임약보가 말을 멈추고 사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 그들은 자네의 편에 설 것이야.”
이게 범한의 질문에 대한 임약보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