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처가와 합의된 사항 (2)
“제가 힘들게 이런 상황을 만든 건 그녀와 혼인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범한의 말에 랑도가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혼인을 하시려고요? 지금 아내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이곳 오주는 임약보의 고향이자 완아의 고향이었고, 범한은 오주의 사위였다······. 임완아와 해당은 모두 첩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고, 범한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범한이 장 공주의 시야와 입장이 제한적이라고 비웃었는데, 그 자신 역시 자신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섭경미와 같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이 세상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는 그는 세상의 저항을 돌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갈등하는 범한의 눈을 바라보던 랑도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오주에 온 건 예의상 대인에게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쨌든 경국에 내려와 이런 일을 벌이면서 대인에게 숨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인에게 솔직하게 알리고 소주로 간다면 타타도 분명 우리를 따라갈 겁니다.”
아무 말 없이 해당타타의 성격과 가치관을 떠올려 보면 범한은 랑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해당타타는······ 너무 총명해서 바보 같았고, 너무 자애로워서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이만 소주로 가십시오.”
범한이 자신도 이제는 모르겠다는 멍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랑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저도 이 일을 제멋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타가 북제에 압력을 받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것도 못 할 짓이지요······.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라 하십시오. 본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랑도가 범한의 모호한 말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그를 다시 바라봤다.
범한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북제로 돌아가면 또 어떠합니까? 대인도 대인의 사매가······ 위화와 혼인할 수 없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북제 황태후께서는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랑도가 ‘끙’하고 신음 소리를 내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고하 국사에게 해당이 위화와 혼인할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 하겠지요······ 하지만······.”
말꼬리를 늘리는 범한의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낀 랑도가 재빨리 물었다.
“하지만 뭐란 말입니까?”
“하지만······ 하늘 아래 누가 그녀와 혼인을 하려 할까요?”
범한이 차가운 조소를 날리며 랑도의 두 눈을 똑바로 노려보더니 다시 태어난 이래 가장 오만한 말을 내뱉었다.
“해당이 제 여자라는 걸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아는데······ 저에게 원한을 받을 각오를 하고 그녀와 결혼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위화 대인에게 과연 그럴 용기가 있을까요?”
술집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건물 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한참을 침묵한 채 범한의 살기등등한 위협을 곰곰이 되씹어 보던 랑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대인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굳이 일을 크게 만들려 하는 겁니까?”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대인이 보이에는 작은 일이 제게는 큰일일 수도 있는 법이지요.”
랑도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한참을 말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장난스러운 말이군요.”
장난스러운 말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은 다른 일이 아니라 여자의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랑도가 범한의 평온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오주에서 이런 일을 의논하는 게······ 대인의 사돈이나 군주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범한의 약점을 정확하게 겨냥한 것이었다. 랑도는 이 점을 이용한다면 범한이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범한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이렇게 만났는데도 아직도 소주에 가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저와 함께 가자는 겁니까?”
범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랑도가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온화한 말투로 넌지시 물었다.
“대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작년에 서산 절벽에 나타났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대인이 아니십니까?”
범한은 갑자기 그 일에 관해 물어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 당황스러웠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는 능력만큼은 탁월했기에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라니요?”
서산에서 있었던 일과 소은의 마지막을 지킨 일, 그리고 신묘에 대해서도 범한은 이미 해당타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해당타타를 통해서 고하 국사가 자신과 소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미 눈치챘다는 것도 들어 알고 있었다.
범한은 해당이 이 중요한 문제에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방증하듯이 랑도는 더는 추궁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되었으니 더는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저는 소주에 갈 테니 대인은 오주에 남아 계십시오. 앞으로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분명 일어날 것이었다.
범한이 침착한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
“만일 대인께서 타타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누구든, 그게 설사 고하 국사라 할지라도 그녀를 강제로 시집보내려 한다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 제 말을 잘 들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흘러가듯이 한 말이었지만 랑도는 듣는 순간 마음이 오싹해졌다. 9품 강자의 경지에 오른 그는 범한이 반년 동안 상당한 발전을 이뤘지만, 자신만큼 원숙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말입니까?”
범한이 살짝 웃었다.
“만약 그쪽에서 제 두 번째 아내를 강제로 시집보낸다면 제가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든 반드시 북제를 멸망시킬 거란 말을 말입니다.”
랑도가 입을 꾹 다문 채 범한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는 범한의 위협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도 확실했다. 만일 범한과 같은 인물이 경국 쪽에 서서 북제를 공격한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제 말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랑도도 온화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절대 사매가 원치 않은 혼인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손을 내밀어 랑도의 크고 단단한 손바닥을 잡았다.
“이건 남자대 남자의 약속입니다.”
랑도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웃었다.
“아마도 남자만의 약속은 아니겠지요.”
범한이 랑도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먼저 대인이 하신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해당타타의 일에 대해 저는 장인어른의 의견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제가 그녀와 혼인을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그녀와 혼인할 수는 없습니다.”
범한이 여기서 말하는 장인어른은 임완아의 친아버지인 임약보였다. 그가 범한에게 이런 뜻을 전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랑도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담판을 지을 곳으로 오주를 선택한 이유는 범한이 아무리 후안무치한 사람이라도 오주에서라면 처가의 체면을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국 전임 재상이 자신의 사위와 같은 후안무치한 사람일뿐더러······ 이처럼 낯짝이 두꺼운 사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것이 제왕의 법인 것일까? 아니면 하늘의 이치인 것일까? 아니, 이것은 도덕의 문제인 거야.’
랑도가 몸을 일으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더는 범한과 이야기하고 싶어지지 않은 그가 공손히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술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범한이 한숨을 돌리며 이마에 땀을 닦았다. 그는 긴장이 된 것도 아니었고 북제에서 내려온 사람들 때문에 난처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해당타타를 이해했다. 그녀의 성격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소주를 떠난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올 터였다.
범한을 정말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든 건 바로 랑도가 조금 전에 한 말이었다. 이곳은 오주였고 장인어른의 고향이었다. 오주성 안에서 자신이 멀리 북제에서 온 사람과 함께 자신의 또 다른 여자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걸 완아가 안다면 뭐라 생각하겠는가? 그리고 사돈어른이 안다면 체면이 얼마나 상하겠는가? 그리고 자신은 처가 사람들을 무슨 낯짝으로 대한단 말인가?
이것이 그가 지금까지 랑도를 피해 온 원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뻔뻔스럽게 후안무치하게 랑도와 이 일을 의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인어른 임약보와 허물없이 모든 일을 의논했기 때문이다.
북제 사람들이 꽈배기처럼 뒤틀린 쇳덩이를 가지고 마차를 타고 남쪽으로 갔다. 소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범한은 가서 관여할 생각도 없었고, 참견할 능력도 없는 만큼 등자월 일행이 보낼 소식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가 술집 난간에 서서 북제 사람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직도 잔뜩 화가 나서 뾰로통한 위씨 집안 낭자를 지켜보던 그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도 해당을 설득할 수 없는 만큼 랑도도 할 수 없을 것이지만 고하가 나설지 안 나설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고결한 인물이었고, 이것은 아주 특별한 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오주성 안 일이 떠오르면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임완아에 대해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그의 머릿속에 무협 소설 의천도룡기의 주인공이자 명교의 교주인 장무기가 겪던 고통과 즐거움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장 교주만큼 거짓말쟁이는 아니지만, 장 교주보다는 더 후안무치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술집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옷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앞섶을 열었다. 그리고 멀리서 북제에서 온 손님들의 뒤를 따라 술집을 내려갔다.
* * *
범한의 일행이 시끌벅적하게 오주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임씨 집안 대저택에서 며칠을 머무르자 소식이 자연스럽게 외부로 전해졌다. 오주 지주는 이미 값비싼 선물을 준비해 만나러 왔고 백성들도 임씨 집안 사위가 지금 오주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범한의 마차가 거리를 다닐 때 누구도 앞에 나가 방해하지 않았고, 이 일에 대해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도 없었다. 오주 백성들은 마차를 보면 허리를 살짝 숙여 소리 없이 인사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거리감은 내면의 존경심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범한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장인어른이 오주성 안에서 얼마만큼의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다만 그는 오주 시민들이 자신을 존경하는 이유가 임약보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명성 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오주 백성들은 그가 오주의 사위라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마차가 임씨 저택인 어마어마하게 큰 장원에 도착하자 범한이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뒤채로 걸어갔다. 그가 나타나자 비취색 비연호를 가지고 놀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큰일을 하려면 낯짝은 두껍고 마음은 모질어야 하네.”
범한이 조용히 의자를 찾아 앉으며 반박했다.
“아직 그 정도로 큰일은 아닙니다.”
비연호를 가지고 노는 노인은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와 여유작작한 노년의 삶은 만끽하고 있는 임약보였다. 과거 경국 관리들의 수장이었던 그는 1년 만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빗질을 해 묶었고, 편안한 홑옷을 입은 채 뒷굽이 없는 편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다만 두 눈이 푹 꺼지고 눈동자가 무기력해 보이는 것이 조정의 아귀다툼에서 벗어나 무미건조한 노년 생활을 보내다 보니 이전보다 활력이 없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