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처가와 합의된 사항 (1)
가족을 데리고 항주를 떠난 범한이 보름 만에 오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황제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었고, 오주 백성들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 비밀은 없는 법이었다. 더욱이 외가 식구를 만나러 가는 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좋은 법이었고, 북제 국사의 수제이자 궁중 제일 고수인 랑도가 범한의 행적을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랑도가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흥미진진한 문제 때문이었다.
경력 6년 봄이 시작될 무렵 북제 성녀 해당타타가 홀로 강남에 내려와 범한을 만났다. 이후 수개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이미 천하에 모두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범한이 이불 안에서 해당과 살을 맞댄다는 가슴 설레게 하는 남녀 사이의 이야기였다.
더욱이 범한의 섬세한 계획에 의해 사람들은 경국 흠차 대신 범한과 북제 성녀 해당타타가 그렇고 그런 모호한 관계라는 걸 믿게 되었다.
경국은 이론 소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북제 쪽은 견딜 수가 없었다.
해당타타는 고하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고, 북제 황제가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작은 사고였으며 북제 황태후가 애지중지하는 존재였다.
출중한 능력을 타고난 해당타타는 하늘의 자손이라 불리며 북제 관리와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상을 드높이는 존재였다. 이처럼 전설적인 존재가······ 남쪽에 내려가 경국 사람과 혼인을 한다는 건 북제 사람들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문을 듣고 북제 사람들은 분개했고 북제 황실은 조급해졌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경국에서 범한의 지위를 알고 있었고, 또 범한이 그 일에서 떳떳하지 못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물론 북제 황제야 《석두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만큼 범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황태후는 그렇지 않았다. 나이가 많지 않음에도 상당히 고지식한 성격인 황태후는 절대로 소문과 같은 일이 발생하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그동안 심중과 상삼호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와 금의위 진무사 지위사 자리를 누구에게 줄지에 대해서 북제 황제는 자신의 어머니를 압박해 양보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혼인과 같은 문제만큼은 북제 황태후의 영향력이 상당했기에 북제 황제도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젊은 북제 황제의 깊고 깊은 마음속 한편에는 해당타타가 경국 범씨 집안사람이 되는 걸 원치 않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 이유는 수백만 냥의 거금이 달린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젊은 황제의 마음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북제 황제는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침묵을 유지하며 황태후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뒀다.
황태후의 의견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한 나라의 성녀가 더러운 소문에 연루되는 걸 지켜볼 수도 없으며, 자신이 아끼는 해당타타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범한에게 시집가는 꼴은 절대 볼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녀는 랑도를 필두로 한 사람들을 보내 해당타타를 북제로 데리고 오는 동시에 해당타타의 지위와 걸맞은 집안을 물색해 혼사를 추진할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황태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당이 범한에게 시집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이것이 북제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해당타타의 결혼 상대로 황태후는 장영후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조카인 금의위 총 책임자 위화를 점찍어 둔 상태였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고, 위화의 능력이나 지위로 볼 때 해당타타의 짝으로 딱 맞았다.
하지만 위화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보다 대단한 능력을 지닌 여자와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 문제에 끼어들어 범한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범한이 진평평의 괴팍스러운 면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범한이 원한을 품으면 두고두고 기억해 두었다가 반드시 갚아 주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혼인할 여자를 빼앗아 가는 건 평생 잊지 못할 원한을 맺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위화는 범한이 북제에서 했던 일들을 떠올릴 때면 금의위 호위병을 모두 자신의 옆에 두어도 오싹한 느낌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위화가 아무리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황태후의 뜻을 거스를 용기는 없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친필 서신을 감찰원에 보내 범한에게 이 일을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 무렵 황태후가 보낸 랑도를 비롯한 일행들은 이미 남쪽에 내려와 있었다. 그 일행 중에는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랑도와 랑도의 여제자이자 위화의 누이인 위영녕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영녕은 해당타타를 무척 좋아한데다가 북제 모든 여자들처럼 그녀 역시 남쪽 감찰원 제사가 떳떳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후가 해당타타 사고를 자신의 오라버니와 혼인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을 때 가장 기뻐한 것도 그녀였고, 경국에 내려온 뒤 가장 분개한 것도 그녀였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범한이 한 일과 말들은 해당타타의 미래 시댁이 될 장영후 집안에 참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준 것이었다. 그래서 위영녕이 범한의 말만 들어도 치를 떨며 분개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의 스승인 랑도가 발끈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랑도는 고하의 수제자이자 천하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은 인물인 만큼 황태후가 자신과 제자들을 경도에 보내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었다. 이에 무도하 강을 건넌 뒤 곧장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소주로 가서 해당을 데리고 돌아가지 않고 오주에서 머물렀다.
해당타타가 북제로 돌아가는 일은 해당 사매의 일이자 지금 술집에 있는 청년의 일이었다.
랑도는 범한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토해냈다. 만일 자신의 일행이 소주로 가서 해당타타를 데리고 돌아간다면 해당타타 사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범한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므로 원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천하 사람들 모두 인정하듯이 경국의 작은 범 대인과 북제 성녀 해당타타는 하늘이 맺어 준 가장 이상적인 짝이었다.
그래서 랑도는 이 문제로 범한을 너무 자극하고 싶지 않았고, 승낙을 받지 않고 해당타타를 데리고 갔다가 북제로 돌아가는 길에 경국 군대의 추격과 포위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먼저 오주에 머무르면서 범한을 만나 직접 이 일을 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랑도 일행이 오주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사실 범한의 반응도 이해는 되었다. 갑자기 북제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자신과 혼인할 여자를 다른 남자와 혼인시키기 위해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면 그러라고 허락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군대를 보내 죽여 버리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이것이 바로 술집에서 두 사람이 충돌한 배경이자 이유였다.
술집에 있는 북제 사람들은 범한의 경박한 말투와 무슨 사위라고 하는 말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모두가 치솟은 화를 가까스로 누르면서 경국 사람들은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범 제사처럼 비열하게 행동하고 부끄러움 없이 남녀 일을 입에 담는 사람을 저급한 사람이라 하는 거지.’
이러한 모두의 생각과 다르게 랑도는 범한을 이해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인은 뭣 때문에 불가능한 일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범한은 악취를 맡은 표정으로 코를 쓱 문지르며 대답했다.
“대사형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랑도는 해당타타의 대사형이었다. 이런 연유로 범한은 나름 랑도에게 공손하게 말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위영녕의 귀에는 상당히 거슬렸다.
랑도가 살며시 웃으며 고민하다가 손을 휘저어 제자들에게 술집에서 나가라고 지시했다.
범한도 웃으면서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상대방의 정면에 앉았다. 이후 감찰원 부하들이 차를 가져올 때까지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한참 눈싸움만 하던 랑도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대인께서 계속 피하시면 그냥 소주로 가려 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의 경치가 무척 좋습니다. 그래서 저와 해당타타도 자주 경치를 구경하러 다녔지요.”
랑도의 눈빛이 살짝 흐려지더니 화제를 돌렸다.
“모든 일이 대인이 생각하는 데로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자 범한이 랑도를 빤히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은 없었습니다.”
도무지 이견이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랑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막무가내로 구는 범한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는 해당타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추측해 볼 수 있었기에 황태후가 내린 임무를 성공시키기가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랑도를 힐끗 쳐다본 뒤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북제 황태후께서 소주로 가라 했으니 대인께서 소주에 가는 거야 당연하지만······ 상대가 따라갈지 아닐지는 대신이 관여할 부분이 아니지요.”
그 말을 들은 랑도가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이처럼 자신감이 있는 걸 보니 타타가 저희를 따라 돌아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으신가 봅니다?”
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일에서 해당의 뜻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누구도 그녀의 결정을 바꿀 수 없었다. 북제든 범한이든 그녀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뿐이지 정할 수는 없었다.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긴 범한을 바라보던 랑도가 온화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대인이 잘못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가 대인을 보러 오주까지 온 것은 함께 타타를 설득해 달라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타를 데려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예의상 알려 드리러 온 것이지 동의를 얻으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범한이 어금니를 꽉 다물며 차갑게 응수했다.
“그녀의 문제가 곧 저의 문제입니다.”
“아마······ 타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랑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의 눈을 바라봤다.
“저는 타타가 자라오는 모습을 지켜본 대사형입니다. 대인이 아무리 타타와 사이가 좋다고 해도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보다 더 정확하게 아실 수는 없지요. 사실 타타는 상당히 거만한 아이입니다. 아마도 대인께서는 그 애가 계속 소주에 머무르기를 바라시겠지요?”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랑도의 말이 옳았다. 해당타타는 겉모습은 시골 처녀처럼 촌스러웠고 행동은 순박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타고난 강자라면 모두 그러하듯이 그녀 역시 뼛속까지 강한 자신감과 거만함으로 꽉 차 있었다. 이런 여자가 소주에서 무미건조하게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 분명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범한 자신도 해당타타에게 혼인 승낙을 받아낼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이었다.
이것은 암담하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였다.
“타타는 북제 사람입니다.”
랑도가 범한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설명했다.
“타타가 북제 사람이라는 건 누가 그 애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태어난 순간 자연스럽게 정해진 사실입니다. 그러니 만일 타타가 가려 하는 길이 북제 조정과 백성의 이익과 충돌한다면 그 애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대인께서도 알고 있겠지요.”
범한이 힘껏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언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 적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랑도가 바로 반박했다.
“사실 타타의 의견에 계속 영향을 끼쳐온 사람은······ 대인이셨지요.”
범한이 살짝 발끈하면서 탁자를 내리쳤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랑도는 범한을 빤히 바라볼 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침묵하던 그가 냉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인이 제 사매인 타타를 위해 뭘 해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황태후께서 무슨 생각을 하실지, 또 제 스승님께서 이 일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대인께서 타타와 혼인한다면 저는 두 사람의 편에 설 겁니다.”
랑도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도 저절로 믿게 할 만큼 힘 있고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