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오주의 사위 (2)
소주 상인이 매질을 당한 이유는 작은 범 대인과 오주의 특별한 관계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꾸 범한이 언급되자 젊은 여자는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우리 북제에서 그렇게 제멋대로 굴더니, 인제 보니 장인의 힘에 기대 오주성 안에 숨어 있는 겁쟁이였군······.”
범한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이 여자는 북제인이었다.
최근 국교를 회복한 경국과 북제는 왕실끼리 혼인도 맺고 고하 국사가 경국에서 제자를 받아들이는 등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지만, 민간은 아니었다. 몇십 년간 서로를 죽이며 싸웠기에 양국 백성들은 여전히 서로를 원수처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여자가 자신이 북제 사람임을 밝히자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계심과 두려움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
심지어 여자 덕분에 겨우 매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소주 상인도 고마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재수 옴 붙었다는 표정을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고귀한 집안 출신이라 자존심도 높고, 명성이 자자한 스승의 제자라는 자부심도 품고 있는 북제 여자는 무시를 당하자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바로 그때 오주 서생이 큰 소리로 물었다.
“감히 작은 범 대인을 겁쟁이라고 하다니······ 그럼 북제 성녀는 얼마나 잘났는데?”
술집 분위기가 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무나도 조용해서 북제 여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았다.
북제 여자의 얼굴이 굳더니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젊은 서생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방금 전 그 말에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엄청난 살기에 술집 안에 불던 시원한 바람마저도 멈춘 듯했다.
이처럼 심오한 경지에 오른 고수를 일반 백성이 무슨 수로 막겠는가? 겁에 잔뜩 질린 오주 서생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줄곧 조용히 앉아 있던 북제 여자의 스승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헤쳐서는 안 된다.”
스승의 말에 북제 여자는 마지못해 검 손잡이에서 손을 내려놓기는 했지만,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더니 오주 서생을 향해 휘둘렀다.
이때 어디선가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오주 서생 앞을 가로막았다.
탁자에 앉은 북제 여자의 스승이 골치 아파졌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외모가 아름다운 북제 여자의 손이 단단한 무엇과 부딪쳤다.
북제 여자가 끙 소리를 내며 상대방에게서 전해져 오는 강력한 힘을 느꼈다.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란 걸 깨달은 그녀가 놀라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 앞을 막은 남자는 회색 옷을 입고 장검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검의 날을 평행이 되게 들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검으로 북제 여자의 손을 막은 모양이었다.
북제 여자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자신이 회색 옷을 입은 남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 스승과 사형, 사제들이 있는데 경국 섭류운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누가 자신을 건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다시 뺨을 내리칠 엄두는 나지 않았기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고민하는 표정으로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살폈다. 그녀가 눈치를 살피다 은근슬쩍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옮겼다. 검을 뽑아 공격할 작정이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와라.”
그녀의 뒤 탁자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담겨 있었다.
화가 난 북제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뒤에 탁자로 걸어갔다.
“스승님, 한 번만 싸워볼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중년 남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년 상경에서 네 사형도 저 대인에게 졌는데 네가 맞붙어서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놀란 북제 여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봤다. 갑자기 어디서 저런 고수나 나타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이 그녀의 스승을 보고는 양손을 잡고 정중히 인사했다.
“랑도 대인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정말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탁자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는 북제 고하 국사의 수제자로 해당타타의 사형이자 궁중 제일 고수로 불리는 랑도 대인이었다.
그리고 오주 서생의 목숨을 구해준 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바로 범한을 지키는 호위의 수장 고달이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정말 우연에 의한 것일까?
사실 두 사람이 오주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라는 말로 단순히 설명할 수는 없는 복잡한 내막이 담겨 있었다.
랑도가 고달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범 대인께서는 저를 만나고 싶지 않으신가 봅니다?”
랑도의 질문에 고달이 공손하면서도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정이 길고 힘들다 보니 아씨 마님의 몸이 안 좋아지셔서 대인께서 틈을 낼 시간이 없으십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스승과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던 북제 여자는 비로소 두 사람이 원래 알던 사이라는 걸 눈치챘다. 사실 그녀는 산에서 수행을 하느라 그동안 북제에서 발생한 일을 잘 알지 못했고, 고달을 만난 적도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 강남에도 고집을 부려 내려온 것이었기 때문에 스승의 계획이 뭔지도 모르게 있었다.
랑도가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가 두 손가락으로 들고 있는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수고로우시겠지만 범 대인께 제 말 좀 전해주십시오. 이 일은······ 우리 북제 사람들의 자존심과 관련된 일인 만큼 계속 이렇게 지연시킬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끝낸 랑도가 일어나 자기 제자들을 데리고 술집을 나가려 했다.
바로 이때 술집 한쪽에 늘어져 있던 대나무 발이 살짝 흔들리더니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 젊은 청년은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잘생겼고 입술은 얇고 붉었으며, 얼굴에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미소에는 왠지 모르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할 만한 한기가 느껴졌다.
랑도가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청년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인사한 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뒤에 있는 북제 여제자를 바라봤다.
“경국 영토에서 함부로 사람을 때리고도 아무렇지 않게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겁니까?”
랑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이 왜 자신의 여제자에게 면박을 주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그가 뭐라 설명을 하려 했지만, 상대방이 손을 흔들며 말을 막았다. 랑도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북쪽 조정에서 이 젊은 남자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는 탓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한편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랑도의 여제자는 곱상하게 생긴 외모만 보고는 시비를 걸길 좋아하는 서생이라 단정 짓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제 이름을 숨길 생각이 없습니다. 제 성은 위(衛) 이름은 영녕(英寧)입니다. 귀하께서는 누구시길래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이름이 위영녕이라고?”
미모가 빼어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던 청년의 눈빛이 번뜩였다. 최근에 받은 정보와 랑도가 남쪽으로 내려온 목적 떠오른 그는 위영녕이란 낭자가 좀 전에 화를 낸 이유를 단박에 이해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랑도를 향해 물었다.
“대인의 제자입니까?”
랑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 분위기를 살피다 넌지시 물었다.
“위화 대인의 누이입니까?”
랑도가 웃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젊은 청년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기다렸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젊은 청년은 ‘오!’ 하는 외마디 외침을 내지르고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청년이 몸을 돌려 위영녕을 바라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은 아니니 검을 내놓고 가면 용서해 주겠네.”
‘뭐라고 하는 거야? 내 검을 내놓고 가라고?’
위영녕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발끈했다. 그녀가 차고 있는 검은 스승에게 천일도를 전수 받으면서 함께 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검은 그녀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고, 검을 내려놓는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누구길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겁니까?”
랑도의 얼굴도 붉어졌다. 청년이 옛정을 생각하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데 화가 난 것 같았다.
청년이 위영녕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누군지는 보다는 낭자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지. 낭자는 위화 대인의 누이이고······ 나는 낭자의 아버지와 호형호제한 사이일세. 그러니 내가 낭자에게 훈계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가 몸을 돌려 랑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이런 유치한 방법을 사용해 나를 나오게 만들다니 참 재미있군요.”
랑도가 쓴웃음을 짓고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봤다. 북제에서 상당한 위엄과 명성을 지닌 스승이 사매가 모욕을 당하는데도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위영녕은 눈앞에 있는 청년이 자신의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북제 황태후의 친형제인 장영후였다. 그런 아버지가 어떻게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청년과 호형호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당황해 입꼬리를 살짝 떨던 그녀가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소리쳤다.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십시오!”
청년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성격이 더러운 것이 속을 알 수 없는 위화보다는 술고래 장영후를 더 많이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오늘 이곳에서 소란을 피워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위영녕을 반드시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번개처럼 빠른 손으로 위영녕의 손바닥을 가볍게 툭 쳤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위영녕이 손을 빼자 그가 감쪽같은 솜씨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앗았다.
손이 번개처럼 빠른 것도 놀라웠지만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고 섬세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잔재주였다.
그 모습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위영녕은 귀신처럼 감쪽같은 솜씨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청년이 빼앗은 칼의 칼날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과연 좋은 검이군. 위하 그놈은 내가 준 돈을 자기 집으로 전부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 아내가 될 사람까지 가로채려 하는군.”
위영녕은 숨이 탁 막히면서 자신이 너무 바보 같이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제야 상대방의 정체를 깨달았다. 천하에서 황제가 아니고서 북제 금의위 지휘사인 자신의 오라버니를 함부로 말할 사람은 그 사람밖에는 없었다.
청년이 검날을 튕겨보며 위영녕에게 말했다.
“내 누이가 낭자의 작은 사고이고, 내게 아직 시집을 오지 않은 색시가 낭자의 큰 사고이니 내가 낭자에게 훈계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 점은 천일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기에 위영녕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청년이 해당타타 사고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자신의 위씨 집안에도 모욕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씩씩댔다.
“그렇지. 내가 바로 오주의 사위이네.”
범한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지만, 생각을 단념하는 게 좋을 거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위화 대인께서도 마음을 접으시고, 그쪽 황태후께서도 이만 마음을 단념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쨌든 좀 있으면 모두가 나를······ 사위라 불러야 할 테니 말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가 손에 든 검을 꼬아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 던지고는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