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별이 빛나는 똑같은 밤하늘 (3)
“신아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지?”
황태후가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외손녀를 떠올리며 옆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군주님은 지금 항주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래······. 강남은 나도 가 봤지. 그곳은 경치가 정말 훌륭한데 여인들은 방자했어.”
황태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분부했다.
“범씨 가문에서 신경을 써서 준비했겠지만 그래도 황궁 물건만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사람을 시켜 물건을 챙겨 강남으로 보내거라.”
노부인이 생각을 해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신아에게 서호 옆에서 지내는 게 어떤지도 물어보너라. 만약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산에 있는 행궁에서 지내도록 하고.”
그러자 늙은 궁녀가 서둘러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 * *
어서방 안. 경국 황제는 이제 막 어전 회의를 끝낸 터였다. 이에 피곤함에 미간을 문지르고 따뜻한 인삼차를 마시고는 영원히 그대로일 것만 같은 창밖 풍경을 바라고 있다가 혐오스럽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홍죽아······.”
황제가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쳤다. 한데 막상 이름을 부르고 난 후에야 자신이 홍죽을 동궁으로 보낸 지 이미 반년이나 지났다는 게 생각이 나 자조적으로 웃어버렸다.
“네, 황제 폐하. 무언가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옆에 있던 우두머리 태감이 공손하게 물었다.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볍게 몇 차례 기침을 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어서방 안에서 메아리치자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늙어서일 수도.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스스로가 얼마나 고독한지 알게 되다니.’
“작은 전각에나 가보자꾸나.”
황제가 용포를 휘날리며 가슴을 활짝 펴고 문을 나섰다. 그런데 서둘러 뒤따라가던 태감에게 황제의 탄식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언제 시간 날 때 담주에나 가 볼까?”
* * *
올해 경국은 작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황궁 안은 여전히 적막했고 더러웠으며, 황궁 밖은 여전히 시끌시끌했다. 조정에서는 의견 충돌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6부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으며, 감찰원은 여전히 조용하고 흉악했다. 늙은 진 원장은 여전히 진원에서 가무를 즐겼고, 범건 상서는 여전히 호부에서 바삐 일하는 중이었다.
민간 백성들은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그러다 삶 속에서 즐거운 일을 찾음으로써 무감각해져가고 있는 마음을 달랬다.
예를 들어 이런 거였다. 동쪽 어느 가문에서 어느 낭자가 시집갔다더라. 서쪽 어느 가문에서 어느 노인이 죽었다더라. 남쪽에서는 올해 큰물이 들지 않았다고 하고, 서쪽에서는 또 싸운다더라. 작은 범 대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더라. 북제 성녀와 범씨 가문의 아씨 마님은 대체 대면을 하기는 하는 걸까?
경도 1로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 큰 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길주. 이곳 하천 제방 양쪽으로 시끌벅적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제방을 수리하는 사람들이 힘들게 모래며 돌을 개미처럼 운반하고 있어서였다.
올해 경국은 운이 좋았다. 봄에 하천이 범람하는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했고, 하운 총독 관아에 국고에서 적잖이 지원해주고 있어서였다. 비록 단계마다 가혹하게 깎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적지 않은 공사비용이 아래까지 내려와 인부들은 일할 맛이 나는 중이었다.
온통 검게 탄 얼굴과 거친 옷을 입고 있는 양만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죽붕 안에 서 있었다. 그가 봤을 때 지금 상황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가을에 넘칠 수도 있는 물을 더 염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만리는 몰래 운반해 온 은자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살피라는 스승님이 맡긴 중임 때문에도 정신적인 압박감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상태였다.
양만리는 제방을 수리하고 물길을 나누는 방법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신분을 내려놓고 모든 걸 직접 집행했다. 그리고 연일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일하다 보니 그는 어느새 범씨 문하생이라는 서생의 분위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진짜 관원으로 변해 있었다.
제방 위 저 멀리서 몇몇이 다가오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다른 지역의 관원인 것 같았다.
아직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이 죽붕 쪽을 향해 소리쳤다.
양만리가 옷깃을 끌어당겨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챈 양만리가 기쁜 마음에 죽붕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계상 형? 가림 형? 예까지 어찌 온 겁니까?”
감격한 양만리가 앞으로 나아가 두 사람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방문자는 바로 범문사자로 불리는 후계상과 성가림 이었다. 두 사람은 춘시 후 다른 지역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범한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제법 빨리 승진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불과 1년여란 시간동안 몇 등급을 뛰어 넘어 7품의 첫 번째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한데 두 사람의 임관지는 길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에 양만리는 기쁜 것도 기쁜 것이었지만 두 사람의 방문이 조금 의외였다.
후계상은 양만리의 질문에 바로 답을 해주지는 못했다. 온통 굳은살이 베긴 손이 자기 손을 잡자 양만리의 검게 그을린 얼굴을 바라보며 감동어린 말부터 내뱉고 말아서였다.
“대인께서 서한을 보내셨네. 한데 자네가 하운 총독 관아에 있다고만 말해주셔서 이런 상황일 줄은······. 이리 고생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네.”
옆에 있던 성가림도 벌써 탄식하고 있었다.
그러자 양만리가 껄껄 웃었다. 한데 무슨 생각이 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과거의 저는 정사에 대해 공리공담만 할 줄 알았지요. 한데 이런 민생 관련 일을 직접 하고 나니 경국 백성이 이리도 힘들게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답니다. 스승님께서 저를 제방 공사 하는 곳에 보낸 건 저를 신임해 발탁하신 것이나······ 직접 이 일을 하다 보니 스승님의 시큰둥한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지더군요.”
세 사람은 순간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후계상이 이 침묵을 깨고 황당무계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인께서 북제 성녀를 굴복시킨 건, 모두 그분이 북제 황궁 쪽에 한 그 말 때문이란 소문이 있던데.”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 이야기가 나오자 세 사람은 범한의 제자였는데도 참지 못하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양만리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자 후계상이 몸을 돌려 발 아래 제방 공사 현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 포효하고 있는 큰 강을 바라보며 크게 탄식했다.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움을 쫓아야 한다라······. 나는 우리가 애당초 대인을 얕봤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걱정거리는 먼저 앞장서서 걱정하고 즐기는 것은 천하가 다 즐기고 나서 즐기라.
속으로 이 말을 되뇌어보던 세 사람은 절로 존경심이 일었다.
“스승님께서는······ 겉으로는 단정치 못해 보여도 실제로는 천성이 거짓이 없는 분이십니다.”
양만리는 그간 보고 들은 것, 범한이 운하를 중시하는 것, 범한 때문에 강남에 생긴 변화를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방 죽붕 옆에는 하운 관아 소속의 다른 관원들이 있었다. 양만리가 스승님이란 단어를 쓴다는 걸 알아챈 후계상이 낮게 헛기침을 두 번하고는 양만리에게 훈계를 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대인이라 부르게. 조정에서는 우리가 당파라도 만든 줄 알 걸세.”
“군자는 친구는 사귀어도 당파는 만들지 말라 했지요. 하나 정말로 당파를 만들어야 한다면, 저 양만리는 스승님을 위한 개가 될 것입니다.”
후계상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맑고 우렁차게 말했다.
“방금 그 말은 이 형을 위해 일부러 한 말 같군. 만리 자네, 이제 보니 반년 동안 많이 늘었군. 스승님 곁에 있다 보니 성품이 많이 좋아졌어.”
성가림도 부럽다는 듯 몇 마디 했다.
“우리가 외지에서 관리로 있는 동안, 자네는 강남에 있었지. 그런데 스승님께서 강남으로 오실 줄이야.”
그러자 양만리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스승님과 함께 지낸 건 며칠 되지 않아요. 사천립 그 인간이야말로······ 두 분 다 소주로 가서 직접 보시지요. 사형(史兄)이야 말로 스승님 덕분에 많이 변했습니다.”
그제야 무언가가 생각난 양만리가 질문을 던졌다.
“형님들은 어디로 가시던 중입니까?”
그러자 성가림이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스승님께서 반년 동안 강남을 정비하신 것 때문에 적지 않은 공결이 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부에서 나를 소주로 내려 보냈다네.”
양만리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가림이 소주로 가면 범한에게 도움이 될 거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면 형님은요?”
후계상이 잠시 웃고는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교주로 간다네. 전리로 임명되었지.”
양만리가 깜짝 놀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번 이동은 좌천인 건데.’
양만리는 범한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후계상은 다른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을 교주로 내려 보낸 건 분명 깊은 뜻이 있어서라고 알고 있어서였다. 더군다나 스승님이 보내준 서한에는 그런 숨은 일의 뒤처리는 네 사람 중 후계상 정도만 가까스로 해낼 수 있다고 언급되어 있어서였다.
* * *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라 했던가.”
물의 고장 강남. 범한은 큰 배 갑판 위에 놓인 대나무 의자에 누워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건 복을 누리기 위해서야. 나라며 백성 걱정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별이 빛나는 밤, 수로를 따라 운항하던 배는 어느새 항주를 떠나 있었다.
서호 근처에서 보내는 여름 한 달 동안 범한은 비개가 준 약을 조심스레 연구를 해보다가 화가 나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고하가 말했던 게 진짜였다. 그런데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는지 비개는 범한의 서한에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늙은 변태가 대체 어디로 숨은 건지 범한은 알 길이 없었다.
한데 임완아는 약을 먹을수록 몸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기분이 많이 좋아졌고, 북제 고하에 대한 미움도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은 범한으로서는 급할 게 없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으니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강남에서의 일을 모두 마무리 짓자 범한은 주변 사람을 모두 데리고 큰 배에 올라탔다. 이는 강남 수군이 제공해준 것으로 범한은 이 배를 타고 강남 수로를 따라 여행에 나섰다.
여행의 목적지는 오주, 교주, 담주였다.
밤이 깊은 시각, 임완아와 3 황자 등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고, 적막한 갑판 위에는 범한과 임대보 두 사람만 나란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평소 어둠에 숨어 있던 6처 검수와 호위들은 모두 범한의 명령에 따라 물러나 있었다.
범한은 잠이 오지 않아서, 임대보는 대낮에 너무 많이 자둔 때문에 밤을 새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나란히 누워 강남의 맛난 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나 나누었다.
세상 사람들은 범한이 왜 백치인 손위 처님과 저리도 잘 지내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 범한도 왜 그런지 딱 부러지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임대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평소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을 느껴서일 수도.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었다.
더군다나 정치, 천하, 시시비비, 흑과 백, 선과 악, 다른 사람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 백옥 작업장, 하수구 같은 걸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먹는 것 등 단순하고 유쾌한 것만 이야기하면 되었다. 이를 테면, 지금 하늘 위를 수놓고 있는 수많은 별 같은 것 말이다.
강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물살은 세지 않았다. 선박은 이름도 모르는 커다란 호수에 정박해 있었다. 저 멀리 있는 갈대숲에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물새도 없어 호수에는 그야말로 고요함만 가득했다. 머리 위의 별이 가득한 하늘도 끝없이 적막할 뿐이었다. 범한이 별이 가득한 머리 위의 하늘을 바라보며 옆에 있는 대보에게 말했다.
“하늘 위에 있는 별은 뭘까요? 말해보세요.”
“참깨.”
임대보가 크고 살찐 손바닥으로 획을 긋기 시작했다.
“달······, 은 구운 떡. 별은······ 참깨. 소보가 말해준 거야.”
소보는 오죽 아저씨 손에 죽은 임씨 가문의 둘째 공자였다. 범한은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하늘 위 별과 초승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구운 떡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경국 하늘에 달 하나랑 저 별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게다가······ 진짜 이상한 건, 대낮에 태양이 하나 있다는 거예요.”
낮에 태양이 뜨고, 밤에 달과 별이 뜨고. 이는 절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도 모두 아는 상식이니까.
하지만 임대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꼬마 범한, 내가 봐도 이상해.”
그러자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죠! 너무 이상했어요! 어렸을 때 내가 알아낸 건데, 여기는······ 여전히 지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