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남녀 애정사와는 무관한 일
범한이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겨우 입을 뗐다.
“사실······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일을 그분이 아닌 내가 할 생각인 거예요.”
“당신은 근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에요.”
해당타타가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안지는 자신의 자상한 면을 습관적으로 이기심이란 걸로 가리고 있어요. 그렇다 해도 당신은 역시나 다정한 사람이에요. 경국의 황제께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직접 손을 쓰신다면, 분명 핏물이 강을 이루겠죠. 당신은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하려는 거고······. 그 일이 야기할 파괴력을 최소화할 생각으로 말이지요.”
범한은 고개를 숙여 해당타타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범한이 아무리 장 공주, 태자, 2 황자와 원한이 깊다고 해도 장 공주는 임완아의 친모이고, 귀여운 섭령아는 2 황자비가 되었고······. 그러니 용상을 둘러싼 전쟁이 시작되면,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칠 게 분명했다. 범한은 여러모로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경도 성벽에 몇천 명의 머리가 내걸리고, 더러운 피가 성벽을 적시는 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매우 비슷한 2 황자 마마는 평소 수줍게 웃던데. 목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도 그렇게 웃으려나? 만약 황제 폐하와 자신이 이긴다면, 섭씨 가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섭령아는 또 어떻게 되는 거고?’
범한에게는 이 모든 게 문제였다. 한데 황제 폐하께는 이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범한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가 주도권을 쥘 수 있기를 강렬히 바랐다.
해당타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혼자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적들은 당신의 대응력을 뛰어넘는 여러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에 대해 경국 황제 폐하께서는 자신만의 계획을 세워두셨어요. 당신이 대신 고생할 필요 없이요.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의 당신은 그분께서 손에 쥐고 있는 가장 예리한 검에 불과해요. 그분께서는 당신이란 검을 쥐고 계신 손이고요.”
범한은 해당타타가 말한 게 군산회란 걸 알고 있었다. 이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황태후마마도 계시군요.”
해당타타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범한은 그녀의 웃는 눈에 어려 있는 암담함을 발견했다. 이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태후마마는 두 분 모두 무척 성가시네요.”
해당타타는 해결도 안 될 화제에 대해서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무심코 범한이 허리에 차고 있는 고검(古劍)에 시선이 향했다.
“왕계년이 보내줬어요.”
범한이 해당타타의 눈빛을 맞이하며 설명을 해주었다.
“과거 북위 마지막 황제의 검이었데요.”
해당타타는 일찌감치 검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맑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많은 얘기가 나돌지 않도록 조심해요.”
범한이 웃었다.
“일깨워줘서 고마워요. 알아보는 사람이 몇 안 될 줄 알았어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떨구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한참 후 천천히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북위가 멸한 후 30년도 지나지 않았어요. 북위의 마지막 정신을 대표하는 소은과 장묵한, 이 두 분이 이미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기적으로는 일러요. 현재 천하에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직 적지 않아요.”
범한은 이 낭자가 갑자기 왜 이런 이상한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순간 황당했다. 지금의 천하는 태평성대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불과 20여 년 전에 천하에 거대한 전쟁 연이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정도는 범한도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대국이 멸망하고 두 개의 대국이 태어날 때 청산이 피로 물들고, 시체가 산을 이루고, 수십만의 백골 더미 안에서 지금 천하를 이끄는 큰 인물들이 태어났다는 것도 범한은 다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앞에 펼쳐진 수호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범한이 보고 있는 수호(瘦湖)는 경도 포월루 앞에 있는 수호가 아니었다. 소주 포월루 앞에 있는 수호로 지난달에 범사철이 서한으로 강남에 있는 사람들을 시켜 판 것이었다. 이를 만들기 위해 농민이 적지 않게 징발되었고, 경도 것 보다 배나 더 크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지금 두 사람이 포월루 뒤편에서 수호를 보고 있었다면 분명 경도 것 보다 훨씬 더 멋졌을 것이다.
한데 포월루는 섭류운의 검에 반 토막이 잘려나간 상태로 지금 바삐 수리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범한과 해당 두 사람은 썰렁한 호숫가에 서서 호수 위의 물안개가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걸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인생과 천하가 무상한 것처럼 말이다.
“안지네 청루 수리가 많이 늦네요.”
해당타타가 무심코 툭 던지듯 말했다.
“타타 얼굴을 보고 있기가 쑥스럽네요. 당신네 북제 은전까지 쓰는 건 너무 과한 것 같아서요.”
범한이 웃다가 바로 해명에 나섰다.
“수리가 급한 게 아니에요. 경도에서 실력자를 데려왔어요. 청루에 남겨진 검흔을 자세하게 조사하려고요.”
범한이 말한 실력자는 당연히 2처, 3처에 있는 이들을 의미했다. 무너진 포월루는 섭류운의 첫 번째 사건 현장이었다. 범한은 남겨진 검흔과 호흡을 통해 대종사가 동원한 방법을 밝혀내 나중에 이용할 생각이었다.
해당타타가 말했다.
“나도 가서 살펴봤어요.”
“네?”
범한이 두 눈을 반짝였다. 해당타타 낭자의 무공에 대한 안목과 식견은 자기보다 훨씬 높았다. 이에 범한은 그녀가 분명 무언가 발견했으리라 생각했다.
“기둥 여덟 개가 동시에 잘려나갔더라고요.”
건물에서 본 세세한 흔적들을 떠올리던 해당타타가 결국에는 감탄을 쏟아냈다.
“나머지 갈라진 흔적은 검세가 침입해서 생긴 거였고······. 당신과 나는 기둥을 자르려면 억지로 해야 해요. 한데 세(勢)를 통제한 걸 보니, 우리는 대체 어느 세월에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히더라고요.”
범한이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봤을 때, 그 놀랄만한 결과를 내기까지 섭류운이 검을 몇 번이나 휘두른 거 같아요?”
“3번이요.”
해당타타가 대놓고 말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렇다는 거예요. 만약 그 어른께서 있는 힘껏 하셨다면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확실히 기적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늘과 땅의 위력에 맞먹는 실력을 발휘했으니까.
* * *
“정말 나랑 같이 가지 않을 거예요?”
범한이 호수를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있던 답답한 숨을 길게 내뱉었다.
“소주에도 사람이 남아 있어야지요.”
해당타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이 후안무치하게 8처를 동원해 우리 둘 사이의 일을 소문내고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진짜로 항주로 가 봐요.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내 처지는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해당타타는 단도직입적으로 원망을 늘어놓았다. 미소를 머금고 한 말이었지만 범한은 해당타타를 당해낼 수 없었다.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볼게요.”
해당이 살짝 하품을 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배웅 안 할게요.”
새벽의 소주성. 햇살이 내려와 호수 위의 물안개를 순식간에 흩어버렸다. 둘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호숫가를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 * *
소주를 떠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니다. 강남에 있는 동안 범한은 원래 항주 서호 주변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다만 명씨 가문의 일이 너무 껄끄럽게 전개되고, 또 의외의 일이 너무 많이 발생해 이제야 항주로 가게 된 것이었다. 항주로 옮겨갈 걸 알고 있던 부하들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화원에 있던 여종들도 사사의 지휘 아래 이사할 준비를 마친 터였다.
범한은 화원을 원래 주인인 소금 상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해당타타가 소주에 남아 황실 금고 전운사와 초상 전장의 대량의 은전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범한은 화원을 이 낭자가 머물 곳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일을 능숙하게 잘 하는 어린 여종도 남겨두어 매우 세심한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양계미는 화원을 돌려받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기보다는 오히려 너무나도 기뻐했다.
송별회에서 양계미는 궁둥이를 들썩이며 들어와 아랫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두 고위 관원이 무어라 말을 하는데도 그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흠차 대인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건 좋은 징조란 생각뿐이었다.
식사를 하는 데 시간을 오래 쓰지는 않았다. 범한을 배웅하기 위해 강남 총독 설청, 평소에는 거의 만나기 힘든 순무, 현재 감찰원의 조사를 받고 있는 소주 지주가 나왔다. 한데 음력 2월 2일에 죽붕에서 있었던 살벌한 일 때문에 이들 강남 관원들은 감히 선물까지 챙겨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설청은 전혀 거리낌 없이 대단히 귀한 선물을 가지고 온 상태였다. 한데 너무 귀한 물건이라 범한은 눈과 입이 떡하니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송별회가 끝난 후 범한과 설청은 정원에서 잠시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범한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대인, 아무리 이 후배와 정이 드셨다지만······. 첫째는 제게는 과분합니다. 둘째는 제가 나중에 어찌 호의를 가지고 강남로 관원들을 훈계할 수 있겠습니까?”
범한의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설청이 웃으며 질책했다.
“자네한테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자네가 싫어도 가져가야 하는 것을.”
범한은 가슴이 답답했다.
설청이 우렁차게 말했다.
“안에 든 절반은 임씨 가문 아가씨께 보내는 거네. 아니, 범 부인께 드리는 거네. 처음 항주에 왔으니 부족한 게 많으실 거야. 그러니 넣어 두고 쓰시라고 하게.”
설청이 말을 이어 갔다.
“나머지 절반은 스승님께 드리는 거네. 이 제자가 소주에서 공무가 바빠 뵈러 갈 시간이 없지 않았나. 그러니 작은 범 대인이 부디 본관 대신 성의를 전해주게나.”
범한이 웃었다. 며칠 전 오주로 가겠다고 설청에게 통지를 했고, 또 황제 폐하께 보내는 서한에도 그 일을 언급한 게 이제야 생각나서였다. 설청 입장에서는 묵직한 것으로 예를 다해야 했다.
뜻을 이해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에 범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가 항주에 있는 동안 대인께서 분부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서한을 보내주시지요.”
“내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설청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는 흠차 대인이야. 그러니 분부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래도 번거롭게는 할 걸세.”
범한이 대충 두어 마디를 더 건넸다. 설청은 일찍부터 자신이 소주를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범한은 일부러 그 점을 들추어내지는 않았다.
막 헤어지려는 찰나 설청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작은 범 대인, 본관이 지금껏 답을 찾지 못한 게 딱 하나 있는데.”
“대인, 말씀하시지요.”
범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설청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대인이 올해 대체······ 나이가 몇이더라?”
강남 총독의 신분이라고 해서 춘추니 하는 고상한 단어를 쓰기보다는 어른이 아래 연배에게 묻듯이 던진 말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껄껄껄 웃고는 대답을 해주었다.
“열아홉입니다.”
설청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소문으로는 익히 들은 바였지만 그래도 실제로 들으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영웅은 어려서부터 나온다더니만, 과연 그렇군.”
흠차 대인이 성을 떠나자 화원은 고요해졌다. 한편 감찰원과 범한의 강력한 압박에 눌려 있던 소주성은 하룻밤 사이에 숨통이 트인 것만 같았다. 이에 범한의 거처에 있던 검은색 마차대열이 성문을 빠져나간 걸 확인한 백성들은 속속 밖으로 나와 어마어마한 간신이 드디어 성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리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폭죽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날 밤 강남로에서는, 특히나 소주부에서는 관원들이 관모의 먼지를 털어내며 자축했다. 또한 더 이상 감찰원으로 차를 마시러 불려가지 않아도 되는 것도 축하했다. 그리고 이미 잘려나간 관원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