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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88화 (488/1,108)

488화 검과 성지 (1)

상자에 있던 종이를 꺼내 읽어보니, 왕계년이 아부의 느낌을 한껏 담아 재밌는 필치로 글을 써두었다. 왕계년은 일단 작년에 대인의 서한을 몰래 보아서는 안 되었다며 뼈저리게 후회한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야 이 검의 내력을 알려주었다.

이 검은 과거 북위의 마지막 황제가 지녔던 검이었다.

북위가 경국에 멸망하고 혼란을 틈타 전씨 가문이 일어나던 때였다. 당시 황궁에 있던 태감들이 황궁에 있던 보물들을 훔쳐내 팔았는데, 이 검도 그때 민간으로 흘러나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후 북위 황제의 검이 세상에 나왔다는 소문이 돌아 왕계년은 거금을 들여 그것을 매입했다고 했다. 그리고 경국 강남으로 보내기 위해 외형을 조심스럽게 살짝 변형시켜 놓았다는 말도 덧붙여 놓았다.

“황제의 검이었군······.”

범한은 검을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이 검에 정말로 제왕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면 당시 북위 황제는 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데 웃는 것도 잠시,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쯤이면 왕계년도 자신이 황제의 사생아란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거금을 들여 북위 황제의 검을 구입해 천 리 먼 곳에 있는 자신에게 보내다니. 순전히 아첨하려고 보낸 거야? 아니면······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거야?’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탄식했다. 그리고 마누라와 딸까지 있는 그 늙은이가 그리 대담할 리 없다며, 자신이 너무 많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범한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황제 폐하처럼 자신도 뼛속 깊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어서랄까.

잠자러 가기 위해 촛불을 불어 끄고 서재에서 나온 범한이 그냥 나가지 않고 중얼거리듯 한마디 했다.

“조로(Zorro)!”

방문은 닫히고, 달빛은 고요했다.

네 토막으로 잘린 촛불 중 하나는 탁자 위에 엉겨 붙어버렸고 나머지 세 토막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 * *

사흘 후, 경도에서 출발한 하늘의 사자가 드디어 소주성에 도착했다. 여기서 하늘의 사자란 긴 날개를 가진 성별 없는 존재가 아닌, 천자의 말을 전하러 온 성별이 없는 자들을 의미했다. 그러니 날지 못하는 자들이라 말을 타고 오다 보니 이동 속도가 느릴 수밖에.

화원에는 엄숙함이 감돌았다. 청소를 마친 정원에 향을 피우는 탁자가 놓이고 제반 준비도 끝난 상태였다. 이에 앞마당에는 범한이 맨 앞에 그 뒤에 3 황자가, 또 그 뒤로 감찰원의 계년조 사람들, 6처에서 나온 호위 무사들, 호위(虎衛), 이렇게 수십 명의 사람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공손한 자세로 서서 성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해당타타는 자리를 피하고 없었다. 오늘은 성지를 받는 날이니 북제 성녀인 그녀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은근히 화가 난 범한이 팔걸이의자를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후 범한은 처마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사가 까주는 수박씨나 먹으며 3 황자와 이런 저런 이야기나 나누었다.

그러자 등자월이 난처한 기색으로 범한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대인, 조심하시지요. 어떻게든 기다리셔야 합니다.”

말을 마친 등자월의 눈빛이 힐끔 옆으로 향했다.

등자월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범한은 다 알고 있었다. 감찰원 부하들은 모두 범한의 행동에 상관하지 않고 있었고 셋째는 뭐든 자신을 따라하는 중이니 크게 신경을 쓸 건 없었다. 하지만 거드름을 피우는 행동은 황제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러니 등자월의 행동은 고달을 포함한 일곱 호위와 3 황자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호위들 사이에 황제 폐하가 자신을 감시하러 보낸 자가 있을 수 있으니 유념하라는 것이었다.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북제행과 강남행에서 고달은 범한과 잘 지내온 편이었다. 적어도 자신을 방해한다거나 불편하게 하는 일은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근래 들어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고달 일행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생에 일곱 호위(虎衛)는 자기 곁을 지키는 호위 무사로 남을 것 같으니, 그렇다면······ 나중에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잘한 잘못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고 해서 다 매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럴 때는 꾀어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남녀 간에도 그렇지만 남남(男男)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3 황자 곁에 있는 호위들은······.

* * *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밖에서 폭죽이 울리기 시작했다. 몇몇 황궁 호위의 안내를 받으며 태감 하나가 두 손으로 물건을 받쳐 들고 화원으로 들어왔다.

의자에서 일어나 있던 범한은 3 황자를 데리고 맞으러 나가 대례를 올린 후 차분히 성지의 내용을 들었다.

성지를 들고 온 이는 요 태감으로 범한도 아는 이었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 요 태감은 이 도련님이 조바심이 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에 순간 심장이 싸했던 요 태감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과정들은 생략하고 황색의 성지를 펴들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성지의 내용은 범한이 생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는 범한이 비밀 서한을 통해 황제와 이미 상의한 내용이었다.

강남에서 분란이 일었으니 황제는 일국의 군주로서 당연히 놀라움과 분노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성지에서는 엄준한 말들로 범한을 꾸짖고 있었다.

하지만 성지에 명씨 가문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자도 없었다.

이에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범한의 입가에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강남의 호족 따위 때문에 천자의 마음이 움직일 리 없으니까. 아무리 이번 일이 작은 일이 아니고, 만민이 혈서까지 써서 경도로 보내고, 몇몇 부패한 문인들이 어전에 송사까지 제기하고, 황제가 천하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범한을 훈계하기는 했어도 말이다.

그런데······ 성지라는 조정 공문에서 범한의 일 처리가 신중치 않다는 건 지적하면서 명씨 가문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건 왜 일까? 조정에서 단 한마디도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 몇 마디 훈계뿐이었지만, 범한은 또 다시 1년 치 녹봉을 삭감 당하고 말았다. 다른 처분은 없이 말이다.

요 태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멈추자 범한을 포함한 이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황공하옵니다!’를 외쳤다. 그리고 이어 ‘황제 폐하 옥체 강녕하시옵소서!’ 등등의 무료한 말들을 늘어놓은 후 범한이 두 손으로 성지를 받아들고 옆에 있는 관원에게 건넸다.

* * *

“또 녹봉이 삭감된 거야?”

범한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구시렁댔다.

“나와 아버지 둘 다 몇 년 동안 수입이 없군. 대체 집안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란 건지!”

범한과 3 황자는 실내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요 태감이 몸을 굽히고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지은 채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요 태감······ 내게 은전을 돌려줘야겠네. 이러다가는 죽만 먹고 살아야 할 것 같으이.”

범한이 웃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요 태감이 재빨리 몇 걸음 앞으로 나와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놈 사정 좀 봐주십시오. 대인이 세상에서 은전을 제일 잘 벌어들이는 분이란 건 모두가 다 아는데······. 강남으로 오신지 반년도 안 되어 조정에 은전 수천 만 냥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소인의 푼돈이 필요하신 겁니까?”

요 태감은 말을 하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재빨리 3 황자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범한이 앞서 한 농담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거 범씨 가문은 황궁 태감과 내관들을 배불리 먹여주었다. 그래서 요 태감도 범한이 자신에게 준 돈에는 크게 관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농담을 3 황자 앞에서 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요 태감은 3 황자가 나이는 어려도 마음이 모질다는 걸 잘 알고 있던 터라 두려웠다. 그런데 곁눈질로 본 3 황자는 차분한 표정이었다. 마치 조금 전 말들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요 태감은 다시 생각을 해보고는 범한이 3 황자 앞에서 말을 꺼낼 정도라면 분명 분별력 있게 행동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순간 요 태감의 심장이 철렁했다. 황궁에서의 예측이 어쩌면 틀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정으로 보낸 돈에 손댈 정도의 담력은 없는데. 자네······ 나보고 탐관이 되라고 권유하는 건가?”

세 사람은 이미 중당에 들어와 있었다. 범한과 3 황자가 양쪽으로 주인 석에 앉고 요 태감은 한쪽에 서서 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요 태감이 씁쓸하게 웃었다.

“범 대인, 소인을 그만 놀리시지요.”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그에게 앉으란 의미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먼 길을 오느라 정말로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던 요 태감은 냉큼 자리에 앉았다.

“자네가 좀 일찍 올 줄 알았는데,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네.”

범한이 호박씨를 톡톡 까먹으며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그 사이 요 태감은 눈이 확 돌아갔다. 그는 순간 자기 눈이 이상해진 줄 알았다. 상석에 앉아 있는 ‘두 분’이 너무 똑같이 생겨서였다. 차이라고 한다면,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는 것 정도였다.

요 태감이 서둘러 웃는 얼굴로 해명에 나섰다.

“사실은 성 밖 역참에는 어제 도착했습니다. 단지 규율을 따르기 위해 오늘에서야 성으로 들어왔을 뿐······. 성지가 두 개라 총독 관저에 먼저 다녀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러니 대인, 부디 이놈 발이 느리다 탓하지 말아주십시오.”

요 태감이 범한의 표정을 소심하게 살폈다. 그런데 조정에서 잔뜩 벼르고 있는 젊은 권신의 얼굴에 화가 난 기색이 전혀 없자 그는 일단 한시름 놓았다.

사실 성지를 전달하는 태감은 황제 목소리의 전달자여서 천하 7로와 각주에서 오만하기 짝이 없게 행동했다. 앞서 총독 관저에서도 요 태관은 설청에게 매우 깍듯한 대접을 받고 온 터였다. 이렇게 어디에서든 거드름을 피울 수 있는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화원에서만큼은 죽어도 거드름을 피울 수 없었다.

일단 범한이 흠차 대인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 ‘황자’가 둘이나 있다는 것과 범한이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를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요 태감은 온순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총독 관저에 먼저 갈 거란 건 알고 있었네.”

범한이 불쾌한 기색으로 말을 이어 갔다.

“설마 내가 그 정도 규율도 모르는 줄 아는가?”

범한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총독 대인에게는 무어라 하셨는가?”

요 태감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대인께 전한 황명과 거의 비슷합니다.”

“뭐? 설청 대인도 녹봉 1년 치를 삭감 당하셨는가?”

범한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매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그의 어투에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요 태감이 헤헤헤 간사하게 웃으며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3년입니다. 이제야 저도 마음이 좀 편하군요.”

범한이 웃으며 수박 씨앗을 내버렸다.

“내가 황제 폐하께서는 영명하시고 인자하시다 말하지 않았는가. 이 불쌍한 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수는 없으셨던 거지.”

그러자 요 태감이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대체 제게 어찌 받아들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다행히 범한이 바로 화제를 돌려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강남까지는 먼 길인데 어쩌다 자네 같은 늙은이가 왔는가? 황궁에 젊고 힘 좋은 내관들은 없단 말인가?”

“대 태감은 지금 몇몇을 교육 중입니다. 한데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일이 있은 후 그가 그 불쌍한 곳에서 돌아오기는 했습니다. 하나 그가 돌아오는데 시간이 지체된 것도 있고, 한시라도 빨리 강남으로 성지를 가져와야 하기에, 이번에 소인이 오게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요 태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 태감은 잘 지내겠지?”

범한이 물었다.

요 태감이 웃기 시작했다.

“대인의 크나큰 보살핌 덕분에 황궁 내 몇몇 노형들은 비교적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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