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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87화 (487/1,108)

487화 버려진 자들의 모임 (2)

소주 화원으로 두 번째 사람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범한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때마침 범한은 항주로 임완아를 배웅하러 가려면 은전 상자를 가져가야 하는지를 두고 서재에서 고민하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그 은전 상자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림자 하나가 책상 앞으로 쓱 나타나 그를 질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문으로 들어오고, 문도 두드려 줘요.”

범한이 그림자를 쓱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감찰원 보고서를 읽었다.

그림자가 고개를 갸우뚱하여 온몸에 뒤집어쓴 시커먼 옷에서 갑자기 새하얀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원장 대인도 친자식이나 조카처럼 대하는 범한 대인은 역시 어딘가 다르다는 듯, 그래서 매우 흥미롭다는 듯이 말이다.

“운지란은 동이성으로 돌아갔군요.”

범한이 고개를 들었다. 감찰원 6처와 동이성 고수 자객 간의 쫓고 쫓기는 전쟁이 장장 4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범한이 황실 금고와 3대 작업장에 있을 때, 공개 입찰을 진행할 때, 소주성에 있을 때, 명원에서 적과 힘과 지혜를 겨루고 있을 때였다. 그때 다른 은밀한 전선에서는 소리 없는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이는 국면 전환도 가능한 중요한 일환이었다. 그러니 그 전선에서의 전쟁은 더 피비린내 나고 더 끔찍했을 것이다.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그림자가 묵직하게 입을 뗐다.

“열일곱이나 되는 감찰원의 형제가 희생되었습니다.”

그림자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드러나는 감정적인 동요는 없었다.

“동이성 쪽은 몇이나 죽었습니까?”

범한이 흥미를 가진 부분이었다.

“열일곱입니다.”

“그렇군요. 당한 만큼 갚아줬으니 우리가 손해 본 건 없어 보이네요.”

비록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범한의 눈에는 노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되돌려 받읍시다.”

그림자가 물었다.

“대인이요? 아니면 제가요?”

범한이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우습다는 듯 되물었다.

“당신의 바보 형님을 당신이 이길 수 있다고 봅니까?”

그림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못 이깁니다. 하오나 대인도 이길 수 없습니다.”

범한은 섭류운이 휘두른 칼의 위력이 생각나 그림자의 말을 바로 수긍해 버렸다.

“이기지는 못해도 아예 죽일 수 없는 건 아니에요.”

그림자가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 젊은이가 대종사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데, 대체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재에 침묵이 흘렀다.

범한은 계속 공무를 보았고 옆에 있는 그림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림자가 침묵을 깼다.

“듣자하니······ 섭류운이 왔었다고요?”

범한이 그림자를 쓱 보고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섭류운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고검이 아직 동이성에 있으니까요.”

범한이 탄식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리도 간단한 논리인 것을. 그림자처럼 살인만 아는 인간도 금세 알아채는데, 섭류운 그 늙은이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사고검이 동이성을 몰래 빠져나올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범한도 섭류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이성에게 뒤집어씌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탓도 있고, 경국 내부에서 큰 균열이 이는 걸 원치 않아 이처럼 말하게 되었다.

그림자가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입을 뗐다.

“그는······ 벌써 6년 동안 검려(劍廬)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림자 정도의 신분이라면 판단력과 정보력은 믿을 만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의 말대로라면, 이 일은 너무 괴이했다. 경국에서 사고검에게 무수히 죄를 뒤집어씌웠는데 동이성에서 직접적으로 반응을 보인 게 설마 단 한 번도 없다는 말인가.

범한에게 문득 미묘한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범한이 턱을 받치며 활기차게 물었다.

“당신의 백치 형님께서 벌써 갔을 가능성은요?”

“없습니다.”

그림자의 말에 범한은 한숨만 내질렀다.

“그래도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이내 또 다른 좋은 게 생각났는지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사고검이 나오지만 않는다면 누가 나를 죽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림자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일단 그 점은 묵인하고 다시 물었다.

"듣자 하니 섭류운이 왔다던데요?"

그림자는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문제를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고집스럽게 나오자 범한은 결국 크게 화를 내버렸다.

“나는 사랑이 돌아왔다고도 들었는데······ 섭류운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그렇게나 중요한 겁니까?”

“매우 중요합니다.”

그림자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제 우상은 오 대인입니다. 제가 가장 꺾고 싶은 사람은 사고검이고요. 하지만 섭류운 대인과 일전을 치를 수만 있다면, 평생 행복하고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인. 저는 대인에게 질투가 납니다.”

범한이 졌다. 이에 범한이 간절하게 말했다.

“나를 질투할 필요 없습니다. 다음에 그런 좋은 일이 있으면 꼭 남아 있게 해줄게요. 섭류운에 대해서는 내가 보장하는데, 그와 겨뤘을 때 죽는 건······ 분명 당신입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죽을 거예요.”

그림자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범한이 아무도 없는 밤의 어둠을 향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일 항주로 가는데, 따라와요.”

임완아를 배웅하러 항주로 가는데 해당타타가 따라가 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안전을 위해 그림자를 곁에 둬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 * *

그날 밤 이후로 범한과 해당타타는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가끔 눈빛이 마주칠 때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더 많이 생겨난 느낌은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해당타타는 여전히 나태하면서도 비가 갠 하늘의 맑은 달처럼 굴어 범한은 오히려 그게 더 어색했다.

그리고 해당의 눈빛에서 가끔 함박웃음이 어릴 때면 범한은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통해 범한은 잘 알 수 있었다. 해당타타처럼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여인은 범한이 아무리 그런 방법을 동원하고 또 이상한 소문까지 내도 자기 곁에 온전히 붙잡아 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과거 범한은 범약약에게 세상을 주유해보라고 권하지 않았던가. 그런 범한이니 어찌 해당타타를 붙잡아둘 수 있겠는가.

하지만 스스로 인정했던 것처럼 범한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해당타타를 감히 아내로 맞이하고 또 그럴 능력이 있는 젊은 남자는 매우 드물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소문까지 퍼뜨려놨는데 누가 감히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 할까. 평생 시집을 안 가도 상관없었다. 다른 남자에게 가지만 않으면 되니까.

범한의 눈에서 잠시 음흉한 눈빛이 번뜩였다. 그런 그가 왕계년의 서한을 꺼내 서둘러 훑어보고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왕씨는 북제에서 무지 불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임무가 막중하다 보니 자기 곁에 있을 때보다 불편했던 거였다. 그래서 서한에서는 자신이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

범한은 왕계년의 심경이 이해가 되었다. 타향살이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라. 더군다나 일단 일에서 불협화음이 생기면 감찰원이든 조정이든 그를 버리려 들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버려졌다는 느낌은 너무 참을 수 없을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던 범한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에 만난 하서비와 그림자, 그리고 서한으로 만난 저 먼 북쪽에 있는 왕계년까지. 모두들 자신의 유능한 부하이자 고위급 인사였다. 그 중에서도 하서비와 그림자는 피맺힌 원한을 갖고 있었다. 모두 집안에서 가장 약자였으며,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어 천하를 떠도는 이들이었다.

한데 자기 신세가 언제 저들과 달랐던 적 있던가?

버려진 자들끼리 모였으니 언젠가는 해피(Happy)한 날이 오겠지.

* * *

감찰원 보고서를 모두 읽은 범한은 눈이 뻑뻑해지자 순간 욱해서 속으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한가로울 한(閑)을 쓰는 범한이란 이름과 편안하라는 뜻의 안지(安之)란 자는 모두 어릴 때 누군가가 지어준 것일 텐데. 지금 생각해 보니, 모두 황궁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지어주셨을 수도. 그런데······ 경도로 간 이후로는, 더 정확히 말하면, 작년 춘시 사건 이후로는 단 하루도 편히 지냈던 적이 없다니!

사실 언젠가 우연히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다가 두 세계를 경험하면서 배운 것을 토대로 판단하던 중 유쾌하지 못한 결론에 도달한 건 있었다. 황궁에 계신 황제 아버지가 자신을 괜찮게 대해주는 편이라고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 자신에게 큰 권력을 준 건 조정 내 국면의 균형추로 쓰기 위해서이고, 자신이 그 방면에서 확실히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왕가는 본래 무정하지 않은가.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이 정도나 해준 건 한편으로는 어머니 대인의 은덕 덕분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 폐하께서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부자의 정을 갖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범한 자신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었고, 더군다나 갈수록 더 잘 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범한은 부자의 정 같은 것에 도취 되기는커녕 현 상황을 이상하리만치 냉정하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가 자신을 강남으로 보내고, 자신에게 일을 떠넘기고, 골치 아픈 일을 하게 한 데에 대해 결국 화가 치솟았다.

자기가 일꾼으로 쓰는 당나귀도 아닌데······. 해당타타가 사철이를 당나귀 취급하는 걸 무척 즐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 * *

범한이 눈언저리를 부드럽게 누르며 옆에 놓여 있던 긴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매우 궁금해 외부에 붙은 봉랍을 뜯었다.

이는 왕계년이 보낸 선물로 하서비에게 신중히 다루라고 당부까지 한 물건이었다. 앞서 읽은 서한에는 범한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천천히 상자가 열리며 물건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한 자루의 검이었다. 별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옛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범한은 상자에서 장검을 꺼낸 후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쥐고는 후 천천히 당겨보았다.

검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검집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그러자 서재 안에 검의 맑은 빛이 창산의 눈처럼, 북호의 푸르름처럼, 강남의 바람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검은 부드럽게 빛났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살을 애일 것만 같은 강한 한기도 서려 있었다.

검의 가치와 예리함을 알아본 범한의 얼굴에 살짝 감동의 빛이 어리었다. 특히 부드러움 속에 숨은 살기가 자신의 괴팍한 성정과 닮아 있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범한이 팔을 뻗어 검을 대충 두어 번 휘둘러보았다. 가벼우면서도 손에 착 붙는 느낌이었다. 어찌나 예리한지 휘둘렀는데도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 촛불 위에서 놓고 세 번 휘둘러보았더니 촛불의 불꽃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범한에게 평소 익숙한 무기는 다름 아닌 암살용 쇠뇌와 신발 사이에 숨겨 놓는 가느다란 검은 비수였다. 누군가를 죽일 목적으로 사용할 때에는 매우 효율적인 무기였지만 쓰기 편한 건 아니었다. 특히 진짜 고수와 정면 대결을 하게 되었을 때는 별 소용이 없었다.

한편 범한은 그림자에게 찔린 일로 운 좋게 사고검의 검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집중해서 연습을 하다 보니 작은 성과도 있었다. 정말 보잘것없는 성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밤에 원몽을 죽일 때 그 위력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래서 사고검의 검술을 익히게 된 범한은 좋은 검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던 터였다.

원몽을 죽일 때는 해당타타에게 빌린 연검(軟劍)을 썼었다.

그런데 빌려 쓰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연검을 빌려 쓰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범한은 검 끝을 가볍게 튕겨 보았다. 미세하게 나는 ‘웅웅’, 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범한은 감탄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왕씨가 아부 하나는 정말 제대로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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