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486화 (486/1,108)

486화 버려진 자들의 모임 (1)

“북쪽에 있던 우리 사람은?”

범한이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서비가 조심스레 범한을 슬쩍 바라보고는 품에서 서한 하나를 꺼냈다.

“왕 대인이 하관에게 부탁한 서한입니다. 그가 남쪽으로 다른 선물도 보냈습니다.”

범한이 서한을 받아들었다. 왕계년의 독특한 필적이었다. 하서비가 기다란 상자를 건넸지만 그건 받지 않고 한쪽에 놓으라는 행동만 보이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왕계년 이 인간은 나보다 죽는 걸 무서워하니, 당연히 바보같이 남쪽으로 내려올 리는 없고······. 다만 우리도 누군가를 따라가야 할 텐데, 북쪽에서는 어느 상단이 인수받은 거지?”

사실 범한은 최씨 가문이 쥐고 있던 노선을 자신이 모두 접수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경국 조정에서는 그 노선을 북제의 젊은 황제가 쥐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범씨 가문의 어린 아들이 북쪽 밀무역 노선을 장악한 사실을 범씨 가문 내 몇 사람, 언씨 가문 사람, 범한의 몇몇 심복만 알고 있어서였다. 이에 경국 황제는 범사철이 북제에 있다는 것만 알뿐, 범한이 어린 동생에게 그렇게나 큰일을 맡겨놓은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범한은 이런 상황을 하서비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에둘러 물어봄으로써 동생이 북쪽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하서비의 입을 통해 들어보려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서비는 대담하게 경국까지 들어 온 금의위 지휘사에게만 신경이 쏠려 있느라 북쪽 상단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은연중에 들은 소문은 있어 그것을 아뢰었다. 지금 북쪽에서 황실 금고 밀무역을 맡고 있는 거대 상인은 대단히 신비한 인물이며, 그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외부에는 알려지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범한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의 눈에 안도와 기쁨의 기색까지 돌았다.

‘사철이 녀석, 몸을 낮추고 참을 줄도 알게 되었구나.’

그런데 해당타타가 강남에 있다 보니 범한은 감찰원의 4처 밀정 체계를 이용해 북쪽의 범사철과 왕계년을 위해 많은 일을 처리해주는 건 불편했다. 물론 북제의 젊은 황제가 범한의 체면을 생각해 범사철을 곤란하게 만들 리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나이에 그런 위험한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 범한이 보기에도 정말로 고생스러운 일인 건 분명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사람을 보내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환생 한 삶을 사는 동안 날카로움이란 직접 갈고 닦아야 만들 수 있음을 명확히 알게 되어서였다. 그러니 범사철에게 아무리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해도 곤경 속에서 복잡한 과정을 통해 갈고 닦지 않으면 그거야 말로 안타까운 일이 되는 거였다.

하서비와 몇 마디 나누고 난 범한은 강남 수채 대두목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강남 대계를 위해 과거 사주에서 거둔 수하가 매우 쓸모 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모든 건 사전에 계획한 대로 하게.”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소문무는 황실 금고에 있고, 등자월은 소주에 남겨두었네. 황실 금고 쪽의 물건 조달 문제는 부사 마해가 처리할 것이야. 회계 문제는, 지금의 자네로서는 아직 어려울 테니 나이 많은 관원들에게 많이 물어보고.”

나이 많은 관원들이라 하면 호부에서 데려온 달인들로, 호부 상서 범건이 자기 아들에게 보내준 선물이었다. 그들에게는 허위로 장부를 만들고 자그마한 장난질을 쳐놓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하서비가 그러겠노라 대답을 하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첫 거래부터 북쪽으로 가는 노선이 뚫린 셈이지만······ 계속 속일 수 없을 겁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미간에 냉소를 띄웠다.

“뭐가 무서워 그러나? 신양에서 매년 무역을 했는데, 천하가 모를 거 같나? 약점만 잡히지 않는다면, 누가 자네와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하서비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제사 대인은 과연 대담하고 배짱이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한데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느라 얼굴에는 다른 감정을 흘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범한이 저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하서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씨 가문에 대한 일이라 달갑지 않은 것인가?”

하서비가 반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젊은 대인 앞에서는 조금도 숨기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용기를 냈다.

“제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습니다.”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이미 돌아가셨네.”

하서비는 잠자코 있었다. 명원에서 큰 혼란이 일었을 때 그는 북쪽으로 물건을 보내는 명령을 이행하는 중이어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데 도중에 소식을 들은 것도 있고, 나중에는 강남 백성들이 상복을 입은 광경을 본 것도 있고 해서 저도 모르게 참담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죽었다 해도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지.”

범한이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큰 노마님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는가?”

하서비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어 범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 저를 도우려다 죽음으로 몰고 가신 건 아닙니까?’

그러다 이내 강남 민심이 소란스러워졌는데 금세 평온을 되찾았고, 명원이 장례를 치른 후에도 이상하게 평온하다는 사실을 생각나 저도 모르게 다른 무서운 가능성을 떠올려 버렸다.

“명청달입니까?”

하서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범한이 싸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주지. 황제 폐하께서 명씨 가문을 거둬들이려 하시는 건 별 것 아닌 일이야. 하나 명씨 가문을 아무 탈 없이 거둬들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현 국면은 본관이 어렵사리 만들어 낸 것이니 자네가 망쳐서는 안 될 것이야.”

제사 대인과 명청달이 암암리에 협약을 맺었다는 걸 알아차린 하서비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고 두려움마저 들었다. 자신이······ 쓸모없는 말단 패가 된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한데 범한의 다음 말에 하서비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달갑지 않다 했지. 한데 사실은 나도 그래.”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의 여섯 형제 중 자네와 내가 각각 하나씩 둘이나 쥐고 있어. 명청달은 그 일을 통해 명씨 가문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는데······ 나는 다시는 대놓고 손을 쓸 수 없게 되었고······. 그 늙은 여우가 내게 엿을 먹였지. 그래서 내가 그자를 되돌려놓지 못할 것 같은가?”

하서비의 입이 살며시 벌어지더니 그의 눈에서 간절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 손을 쓰실 겁니까?”

“복수란 이야기만 나오면 미쳐서 앞뒤 가리지 않는 지경이 되지나 말게.”

범한이 하서비를 훈계하듯, 어떤 위대하고 요원한 자신의 사업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강남 만민의 혈서가 일찌감치 경도로 도착했네. 황제 폐하께서 나를 엄히 타이르는 성지가 이틀 뒤면 도착할 걸세.”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이런 시기에 내가 명청달을 다시 공격할 수는 없겠지.”

“하관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생각난 하서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명청달이 그렇게 한들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고개만 숙이면 대인께서 살길을 내줄 거라 유치하게 믿고 있을까요?”

범한이 상찬하는 기색으로 하서비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냥 시간만 끄는 거겠지.”

“시간을 끈다고요?”

“그렇네.”

범한이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자기 어머니의 생명으로 1년이란 시간을 번 거야.”

“1년을 벌기 위함이라니요?”

하서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는 거죠?”

“그날 내가 말했었지. 자네 형이 나보다 훨씬 기발하다고 말이네.”

평온해 보이는 경도가 사실은 유난히 험악한 국면에 처해 있었다. 당연히 범한이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줄 리 없었다. 이에 범한은 싸늘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자네 큰형이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고 참으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건, 1년 후에 조정 국면을 보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네와 나도 1년만 봐주면 되는 거네.”

‘1년 후 저쪽에서 더 이상 참지 않고 공격에 나설 거라고? 그렇다면 1년 후면 저들을 죽여도 된다는 말 아닌가.’

“서두를 거 없네.”

범한이 하서비를 설득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이어 갔다.

“자네 큰형은 똑똑한 사람이야. 그러니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며 모두에게 미움을 사지 않으려 하는 거고. 물론 나중에는 자기 꾀에 당하게 될 거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거든.”

이 말을 하는 순간 범한은 섭류운이 포월루의 절반을 날려버리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졌다.

‘설마 그 대종사가 나보다 더 멀리 내다본 거야?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위험까지 다 내다본 거냐고!’

흠차가 포월루에서 자객을 만나자 진노한 강남 총독 설청은 즉각적으로 가장 강력한 조치에 들어갔다. 바로 명원의 사병을 모두 무장해제 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범한이 다치자 명씨 가문 노마님의 죽음으로 범한에게 일었던 강남 백성들의 적의도 많이 수그러들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본래 이렇게나 이상한 거다.

종합해 보면, 명원이 다시 힘이 약해져 범한이 주물럭거릴 수 있는 밀가루 반죽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한데 현 경도의 국면과 곧 도착할 성지는 범한이 만두를 빚을 날을 뒤로 미루도록 만들 것이었다.

“명청달이 내게 완전히 귀순해도 받아주지 않을 거네.”

범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하서비가 유난히 기뻐할 말을 해주었다.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원한을 새기고 사는 사람이야. 강남거 앞에서 살해당한 강남 수채 형제들을 어쩌면 자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지. 하나 나는 자네를 보호하기 위해 보낸 6처 검수 중 죽은 이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네.”

하서비에게서 슬픔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앞서 말했듯이 명청달은 똑똑한 사람이야. 그래서 그는 내가 거대한 이익 앞에서 평범한 이의 죽음을 웃으며 넘길 거라 여기는데······. 한데, 그건 그자의 오판이야.”

범한이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명씨 가문에서 내 사람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으니, 나는 그들을 죽여 버릴 거네. 그게 비록 그자의 어머니가 한 일이기는 해도 어머니의 빚은 아들이 갚아야 하니······ 그래야 공평한 거 아니겠나?”

하서비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진 상태에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대인의 말씀대로 매우 공평한 처사이십니다.”

범한이 하서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런 재미없는 일은 일단 그만하지. 반년 동안 북쪽 노선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게. 그리고 동시에 남령의 웅씨 가문, 천주의 손씨 가문과도 관계를 잘 맺어두게. 양계미와는 왕래를 해도 되고······. 훗날 자네는 명씨 가문의 거대 자산을 관리해야 해. 그러니 저들 거상들과 관계를 잘 맺어두게나.”

제사 대인의 말뜻을 알아들은 하서비는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며 바로 대답을 해버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그런 말을 하기는 아직 이르네.”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이미 명청달에게 분부를 해놓았네. 경력 7년 연제(年祭) 때 자네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이네.”

깜짝 놀란 하서비의 가슴에서는 여러 이유로 희열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정식으로 가문의 일원이 되는 거 아닌가! 강호에서 떠돌기를 여러 해, 드디어 명원으로 돌아가게 되다니!

* * *

저택을 나선 범한은 하서비가 마지막에 보였던 희열과 그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을 떠올렸다. 정식으로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게 그리도 중요한 걸까? 범한에게 이런 생각이 든 건 모두 그가 두 세계를 경험한 때문이었다. 그는 현생의 사람들이 혈통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걸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해가 안 됐다. 심지어는 이를 경시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범한에게는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길러준 이도 부모였다. 그리고 나를 자식으로 여겨주면 나 역시 그 사람을 부모로 여기고, 나를 원수로 여기면 나 역시 그 사람을 원수 여기는 게 삶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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