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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85화 (485/1,108)

485화 무언가 번거로운 기분

“섭가 아가씨는 특수한 혈통 아닐까요?”

해당이 갑자기 흥미가 생겼는지 맑은 눈으로 범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당신 경맥은 평범한 사람들과 달라요. 그게 아니라면, 그 이상한 패도의 공결도 익히지 못했을 거예요. 분명 자당의 신분과도 관련 있을 거예요.”

해당타타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범한이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싸늘하게 웃었다.

“나중에 태어날 내 아이가 그런 이상한 점을 물려받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러자 해당은 옅게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씨내리 같은 건 생각도 마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연상이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이 잔뜩 화가나 목소리를 한껏 깔고 포효했다.

“술에 또 춘약을 탈 생각도 말고요!”

범한이 화를 내는 모습을 내내 보고 있던 해당타타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리리는 임신하지 않았군.”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불 속에 함께 있느라 둘은 몸이 불덩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화까지 겹치니 정욕의 불길이 어찌 일지 않을 수 있을까. 범한이 이를 꽉 깨물고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해당타타가 자신을 가뿐히 죽일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않고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해당타타를 뒤에서 끌어안은 범한. 살짝 달아올라 떨리고 있는 여인의 몸을 느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정말로 관심이 있으면 춘약 따위는 쓰지 마요. 당신에게는 이 몸을 바칠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자 해당타타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손대고 발을 만지는 거 말고는 내게 감동을 줄 다른 능력은 없나 보군요?”

그러자 범한이 노발대발했다.

“아까 발을 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 손을 댔다는 겁니까?”

무슨 생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해당타타가 갑자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그마하게 말했다.

“황실 금고에서 나올 때 길에서······.”

범한에게 퍼뜩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온 정신이 품 안에 있는 여인의 손에 가 있었고, 그 손을 절대 놓고 싶지 않았는데.

남녀 사이가 발전하려면 서로 밀고 당기고 해야 하지 않던가. 범한은 해당타타를 위해 작년 봄에 시를 준비했었고, 또 그녀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춘약을 썼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만남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지혜를 겨루는 사이에서 마음을 겨루는 사이로 발전했고 지금에 와서는 감정싸움을 하는 사이로 발전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변했고, 감정도 변했으니 수단도 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뭘 더 가지고 싸우겠는가!

‘그런데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게 정말로 재밌는 일인가?’

사실 범한은 싸움을 싫어했다. 그래서 해당타타의 어깨 아래로 손을 쑥 집어넣어 그녀의 양손을 쥐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해당은 얼굴이 화끈거려왔다. 뒤에 있는 죽일 놈이 아내가 있는데도 자기에게 계속 집적대 너무 꼴불견이었다. 그런데 최근 반년 동안 자신의 마음은 갈수록 싱숭생숭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처럼 맑고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로 친근감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해당타타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늘 밤에 같은 말만 벌써 세 번째 반복하고 말았다.

“내가 시집가기를 바라지 않는군요.”

그러자 범한이 불명확하게 말했다.

“내게 시집와요. 여동생까지 데리고······. 그런데 타타에게는 여동생이 없군요.”

“정말 뻔뻔하군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수치심에 화가 난 해당타타가 입술을 물고 한 말이었다.

범한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의 명성을 훼손하고, 또 이 큰 이불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지 않으면, 내일이면 마마님이 당신을 시집보내 버릴 거예요.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해당타타가 또 졌다.

* * *

“오늘, 당신 비밀을 너무 많이 말했군요. 신묘 비밀까지 포함해서요. 설마 내가 미인계를 쓰고 있다는 걱정은 안 해봤나요?”

해당타타가 갑자기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타타······ 당신은 엄청난 미인은 아니거든요.”

* * *

다음날 새벽, 범한이 문을 열고 나왔다. 여명(黎明)이 희미한 가운데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몸이 찌뿌둥했던 범한이 허리를 쭉 뻗어 몸을 풀었다.

“끼악!”

여종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바로 눈을 감아버렸다.

흠차 대인과 해당타타 낭자가 사사로이 만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은 항상 예절을 지키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 작은 범 대인이 이렇게나 떳떳하게 해당타타 낭자의 규방에서 걸어 나오다니. 이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새벽같이 규방에서 걸어 나왔다는 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범한이 미소 지은 얼굴로 여종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일어났느냐.”

그런 후 범한은 앞뜰로 걸어갔다. 그리고 종들과 마주칠 때마다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다.

“일어났느냐.”

화원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대인께서 언제 저렇게 온화하고, 품위 넘치는 거동을 보여주신 적이 있었나?’

‘대인께서 기분이 좋은 건데, 왜 내 머리털이 쭈뼛쭈뼛 솟는 것 같지?’

얼마 후 종들의 입을 통해 화원 곳곳으로 놀라운 소식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은 다시 범한 부하의 귀에까지 흘러들어 갔다.

사사가 입을 쩍 벌리고 그 소식을 듣고 있었다. 조만간 일어날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급작스레 일어난 느낌이었다. 특히 손에 들고 있던 서한이 갑자기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어젯밤에 유난히 깊이 잠든 탓에 이 서한을 도련님께 드리는 걸 깜빡하다니. 그녀는 담주에서 온 큰 여종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범한 생각만 하는 중이었다. 사사가 여종에게 서둘러 물었다.

“지금 도련님께서는 어디 계시니?”

“바깥 대청에 계세요.”

* * *

범한이 정리를 마치고 바깥 대청에서 공무를 논하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였다. 등자월을 포함한 계년조 구성원들과 고달을 포함한 호위들은 모두 화원에서 생긴 제일 큰 소식을 다 알고 있었다.

이에 범한을 바라보는 풍채 좋은 무도인들의 얼굴에는 존경의 빛이 어리어 있었다. 북제 성녀를 품으시다니. 이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기보다는 극강의 무공을 지니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 중 우려의 기색을 띠고 있는 건 등자월 뿐이었다. 등자월은 경도 본가에서도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임완아를 모시는 데에도 대단히 능숙했다. 범한을 근거리에서 호위하는 무사들에게는 후하게 보상을 해주었으며, 사람 됨됨이 자체가 친근해 본가 아랫것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등자월이 갑자기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것이었다.

‘나중에 범씨 가문의 안주인은 대체 누가 되는 거지?’

그를 포함한 모든 종들은 당연히 아씨 마님 편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계속 무언가가 생각났다.

‘나중에 범씨 가문에서 갈등이 일었을 때, 아씨 마님께서 해당타타 낭자를 이길 수 있을까?’

범한은 심복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힘없이 죽만 마실 뿐이었다. 사실 어젯밤에 해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신경을 너무 많이 썼고, 또 섭류운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계획도 세워야 했고, 두 나라 정세도 분석해야 해서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런 말들을 입에 담아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

‘이불 아래에서 국사를 논했다고? 그냥 관두련다.’

바로 그때 사사가 바깥 대청에 나타나 들고 있던 서한을 건넸다.

범한은 서한의 필체를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봉투를 뜯어보고는 절로 입이 벌어져 입가에서 죽이 주르륵 흘러내릴 뻔했다.

‘이 노부인 때문에 죽도 제대로 못 먹겠네! 내가 확실히 좀 뻔뻔하고 파렴치하긴 하지. 그래도······ 아직 준비도 안 된 나한테 그런 고통을 줘야겠습니까!’

범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등자월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을 데리고 사주로 가요. 힘이 세면서 일을 섬세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자 등자월이 딴소리를 했다.

“소주 일을 아직 온전히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얼굴을 찡그렸다.

“배웅을 나가라고요.”

“누굴 말입니까?”

“당신 아씨 마님이요.”

완아가 온다니. 범한은 당연히 기뻤다.

한데······ 기뻐할 일이 갑자기 하나가 더 늘어나자 순간 무언가 번거로운 기분이었다.

임완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범한이 소주에서 지내면서 이곳저곳으로 보낸 이들은 하나둘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강남 각지에 범한을 위한 은밀하고 독한 씨앗을 뿌리고 범한이 필요로 하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첫 번째로 돌아온 사람은 하서비였다.

범한은 그를 화원에서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절반이나 무너져버린 포월루에서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범한은 한밤중에 하서비가 성 남쪽에 마련해둔 저택으로 찾아갔다. 이 저택은 범한의 돈으로 산 것이었지만 정작 범한은 3 황자와 한 차례 와본 후로는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터였다.

손님을 맞는 하서비는 아직 여독이 가시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는 원래 오후에 화원으로 찾아가려던 참이었지만 통지를 받고 집에서 기다리던 차였다. 그러다 호위와 함께 계단을 올라오는 이가 예상치도 못하게 흠차 대인이자 깜짝 놀랐다.

하서비가 범한을 공손하게 서재로 들였다. 두 사생아는 서로 문안 인사 같은 건 나누지 않았다. 범한은 상사로서 으레 따스한 인사 정도는 건네야 했지만, 그마저도 귀찮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서비의 보고에 범한은 그동안 근심하고 걱정했던 것 하나를 덜게 되었다. 하서비는 황실 금고에서 낙찰을 받은 후 감찰원의 도움으로 강남 수채의 형제들을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강남 수채 사람들은 강호 사람이라 범한은 명칠 공자가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 내내 불안했었다.

그런데도 오늘 밤 범한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건 하서비에게 명씨 가문의 피가 제대로 흐르고 있어서였다. 상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인 물건들이기, 출고증서 쓰기, 길 내기, 관원 매수 같은 것에서 단 하나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범한을 가장 안심하게 한 건 상단이 강북을 지나 창주 이남의 어느 작은 고을로 들어가 북제 사람과 접선을 한 일 때문이었다.

일단 화물을 북제까지 안전하게 운반하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북제 황제가 장영후의 아들 위화를 금의위 수장으로 임명한 때문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궁금했던 건 경국 국경 안으로 깊숙이까지 들어와 그 많은 물건을 가져가는 모험을 한 이가 과연 누구인가였다.

“지휘사 본인이었습니다.”

하서비도 그와 직접 만나게 된 게 놀라운 듯했다.

놀라기는 범한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는 위화에 대해 나름 다른 판단을 해야만 했다. 고위직의 관료가 대담하게도 경국 국경을 넘어 들어오다니. 범한에게는 창주 일대의 방어력이 형편없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북제 금의위는 북쪽으로 가는 안전 문제만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는 과거 북제 황태후와 장 공주가 거래하는 동안 이미 능숙하게 이루어지던 일이었다. 하지만 거래 주체가 젊은 황제와 범한으로 바뀌고 진행되는 첫 번째 거래이다 보니 범한은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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