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달과 달과 달 (1)
상문을 거느리고 후원으로 들어간 범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파랗고 불그스름한 형상들이 곳곳에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거의 여름으로 접어들었지만 아직 봄의 끝자락인지라 밤바람은 아직 시원했다. 초승달이 걸린 하늘과 사방을 둘러싼 가짜 산, 그리고 그 산 속의 푸른 나무 아래에 걸린 등불. 등불은 초승달과 어우러져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몽롱한 등불 아래에서는 십여 명의 여인들이 재잘재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간이 단정하고 선이 고운 여종들은 옷을 가볍게 입고 있었다. 어떤 이는 서 있고 어떤 이는 긴 의자에 몸을 누이고 있었으며, 그녀들이 입고 있는 얇은 사에 이따금 등불 빛이 투과되어 아름답게 반짝이기도 했다. 그리고 공기 중에는 그녀들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이 섞여 있었다.
범한은 순간 자신이 전설 속의 반사(盤絲) 동굴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화원이 대체 언제 진평평의 진원으로 변한 거지?’, 라고 생각했다.
여인들은 쉼 없이 재잘대느라 뒤쪽 그늘진 곳에 범한이 서 있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들은 검의 위력이며, 거리에서 위풍당당하게 욕한 흠차 대인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쪽은 포월루의 양대 대표 얼굴 중 하나였다. 이야기를 듣는 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 내지는 부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 여종들이었다.
범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청루에 있던 여인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보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자 상문이 입을 가리고 잠시 웃고는 설명을 해주었다.
“본디 화원에 있던 낭자들 아닙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범한은 저도 모르게 여인들에게 여러 번 시선을 주고는 속으로 탄식했다. 여자는 자라면서 열여덟 번 변한다더니만. 강남으로 오는 길에 사사가 길에서 거둔 유랑민 소녀들이었다.
‘소주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꽃처럼 활짝 피어난 걸까!’
미간에는 아직 앳된 느낌이 가득했지만 자연스레 청춘기를 맞이했으니 한창 즐거운 때 아니던가.
후원은 남자의 출입을 금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소녀들은 양점점이 말해주는 낮에 있었던 일을 흥미진진하게 듣느라 행동거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긴 의자에서 엉덩이가 볼록 튀어나오도록 엎드려 있는 사람, 청초하고 정숙하게 부채를 들고 있는 사람, 얇은 천 아래로 가느다랗고 쭉 뻗은 다리가 형태가 보이는 있는 사람. 모두 시각적인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첫째 황형의 첩인 마색색은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낮에 멀리서 지켜보기는 했지만 양점점의 말재간을 통해 들으니 그때의 상황이 훨씬 더 무섭게 다가왔다. 그런데 양점점도 포월루 안에서 일어난 일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에 대해 묘사할 때 그를 천하무적의 용감한 사람으로 과장을 해버려 지금껏 경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가장 완벽한 젊은 남자로 만들어 버렸다.
후원의 여인들의 눈빛이 뜨거워지더니 이내 부끄러운 기색을 담기 시작했다. 흠차 대인이 멋져 죽겠는데도 그걸 차마 입에 담지는 못했다.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채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마색색의 눈동자에서도 무언가 다른 기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범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장면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살면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어린 여종들은 아직 자라는 중이었다. 작은 형수와 양점점 두 사람은 그야말로 타고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검은 눈썹, 붉은 입술, 생기 넘치는 눈을 가지 그녀들은 보고 있으면 넋을 잃을 정도여서 어찌 다시 안 볼 수······. 범한이 두어 번 기침을 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리려 했다. 한데 한 소녀가 무의식적으로 말을 꺼내는 바람에 범한은 입을 꾹 다물고 계속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상문이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시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열둘에서 열셋 정도 되어 보이는 여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언니들, 왜 아씨 마님은 안 보이시는 거죠?”
사정 때문에 범한 일행은 항주로 가지 않고 화원에서 몇달 간 지내는 중이었다. 그동안 사사가 어린 여종들을 데리고 화원에서 생활했으니, 여종들은 은인의 이름과 신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흠차 대인 집안의 여종이 된 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흠차 대인과 함께 지낸 지 오래됐는데 아씨 마님을 단 한 번도 뵙지 못해 그녀들도 그게 항상 이상하던 터였다.
양점점은 여종의 말에 살짝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여종들은 경도에서 온 그녀가 범한과 임완아의 떠들썩하게 치러진 혼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임씨 가문의 아가씨가 장 공주의 딸이란 건 조정 권세가만 알던 비밀로 이후 점점 민간에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증거는 없었지만 그래도 거의 모든 사람이 믿게 되었다. 그리고 천하 사람들은 어린 범 대인과 신양 쪽이 일찌감치 물과 불 같은 사이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여종 하나가 한소리 했다.
“주인님에 대한 일이니 우리 같은 아랫것은 말할 자격이 없어. 사사 언니 귀에 들어가기 전에 그 입 조심들 해!”
그러자 앞서 말했던 여종이 천진하게 웃었다.
“헤헤, 실은······ 희아는 그냥 도련님의 아씨 마님께서 선녀처럼 생기셨는지 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녀에게 범한은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임완아의 외모가 궁금한 건 당연할 수밖에.
“아씨 마님께서는 현숙한 집안의 규수라고 들었어.”
양점점이 갑자기 눈을 또르르 굴리고는 예쁘게 생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한데 듣자 하니 생기신 건 별로라더라. 사사 낭자가 더 예쁠 수 있어.”
“그거야 당연하지. 도련님과 어울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히히, 그거야 모르지 나중에······ 맞다! 여기에 어떤 낭자가 묶고 계시지 않아? 평소 몇 번 못 뵈었지만, 거만하던데.”
양점점이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듣자 하니······ 대인의 홍안 지기라던데. 한데 사사 낭자도 아니고 노인이라니. 그건 명분이 없어.”
“닥쳐요!”
해당타타의 신분을 은연중에 알고 있던 여종이 양점점에게 욕을 하기가 뭐해 아까 말을 한 여종에게 비난을 이어 갔다.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봐! 그런 귀한 분이 너 같이 별 볼 일 없는 걸 신경이나 쓰실 거 같니?”
범한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헛기침을 하며 밝은 곳으로 나왔다.
화들짝 놀란 여종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후 정신을 가다듬고 범한에게 일제히 인사를 올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도련님께 인사드립니다.”
화원에서 범한을 부르는 호칭은 경도 본가의 규율을 따르고 있었다.
범한이 여종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안에서 떠도는 이야기가 이 정도인데 밖에서는 어떤 이상한 이야기가 떠돌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범한은 생각이 트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범한이 천천히 입을 뗐다.
“밤이 깊었는데 모두 돌아가 자거라.”
여종들이 입을 삐죽 내밀고는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옷을 단정히 고쳐 입고 조용히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양점점과 마색색은 범한이 불러서 아직 남아 있었다.
범한이 양점점의 청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예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양점점은 은근히 기뻤지만 속으로는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겁먹은 듯 고개를 하늘하늘 떨구며 얼굴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위를 범한에게 내보였다.
경도에서 범한과 임완아가 혼인을 할 때 저잣거리에서는 범한이 병든 처를 무척이나 아낀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작은 범 대인은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란 걸 누구나가 다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온 규중 여인들에게 범한은 꿈속 낭군이 되었고, 이는 놀잇배에서 자란 양점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들이 들으면 불편하게 할 생각과 동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양점점은 자기 외모에 무한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아씨의 외모가 자기보다 훨씬 떨어지니 자신은 작은 범 대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남자의 취향이 불쌍해 보이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에 일부러 겁먹은 척을 했다. 또한 포월루 소주 분점을 연 후 작은 범 대인이 자신에게는 손님을 받지 않도록 한 것 때문에 그녀는 범 대인이 자신에게 살짝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지자 양점점은 기분이 점점 더 좋아졌다. 이에 잔뜩 부끄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범한 뒤에 서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상문의 입가에 역겹다는 미소가 지어졌다.
범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누구든 더 잘 살 권리가 있지. 그러니 너의 생각에 반감 같은 건 없다.”
양점점이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범한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게 된 양점점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범한이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싫기는 하구나.”
양점점은 부끄러움이 밀려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시중들도록 타고난 사람은 없다. 포월루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면 관리자인 상문에게 말해 계약을 정리해 달라고 하고, 널 사 온 값을 가져오면 된다. 그리 하면 포월루에서 놓아주마.”
범한이 양점점의 아름다운 얼굴을 주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상문, 짐을 싸게 하고 거처를 다른 곳으로 알아봐 주게.”
상문은 깜짝 놀랐다. 제사 대인께서 이렇게나 예쁜 여인을 그냥 내보내시다니. 하지만 감히 말을 보탤 수 없었던 상문은 짐을 싸기 위해 양점점을 데리고 들어갔다.
후원에는 범한과 마색색 둘만 남게 되었다.
마색색이 홀연히 입을 열었다.
“대인, 이곳의 청정함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저도 내보내실 건가요?”
그러자 범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호족 공주의 파란 눈동자와 곧게 뻗은 콧대, 입체감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머무르게. 대신 말과 질문은 많이 하지 말고. 그대가 마음에 들어 그러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도와주겠네.”
놀란 마색색이 고개를 들어 범한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모든 일을 다 꿰뚫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저도 모르게 감격하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대인.”
범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 * *
방으로 돌아가니 사사가 이미 뜨거운 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범한은 세수를 하고 뜨거운 물에 두 발을 담그고는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길로 해당타타가 전수해준 법문에 따라 오늘 섭류운의 검기(劍氣)에 당한 경맥을 조심스레 치료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범한의 수행법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랐다. 이에 경맥을 정리하는 명상 과정은 범한에게는 잠시 눈을 붙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다.
눈을 감고 있은 지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무렵, 범한이 눈꺼풀을 살짝 뜨고 정기를 온몸으로 흘려보냈다. 몸이 많이 편안해져 있었다. 그런데 방안도 쥐 죽은 듯이 조용해 범한은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바라보니 사사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아마 낮에는 자신을 걱정해서 잠시도 쉬지 못한 데 이어서 저녁에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쉬지 못한 탓에 피곤함을 이기지 못했으리라.
범한은 웃기만 할 뿐 사사를 불러 깨우지는 않았다. 직접 수건을 끌어다가 발에 묻은 물을 닦아낸 후 조심스레 사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사사가 감기라도 들까 염려되어 자신의 도포로 덮어주었다.
범한은 잠시 사사 뒤에 서서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옆으로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 사사와 담주에서 책을 베끼던 시절이 생각나서였다. 그때는 남의 일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참으로 속 편하고 자유로웠는데. 등잔불 하나, 벼루 하나, 모지와 붓 한 자루. 그리고 시중들어 주는 사랑스러운 한 사람.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석두기》를 적어 내려가면 평론 따위는 없었어도 수려한 글자가 늘어날 때마다 진한 향기가 피어났었지.
그렇게 범한은 잠시 추억에 빠져 있다가 오른손으로 사사의 뒷목을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살며시 정기를 주입해 그녀가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더 깊이 잠들도록 도와주었다. 사사가 깊이 잠들자 범한은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올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런 후 마음 편히 그녀의 얼굴을 톡톡 두드려준 후 신발을 질질 끌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뒤돌아 방문을 닫는 순간, 범한은 깊이 잠든 사사의 얼굴에서 안정감과 만족감에 찬 미소를 본 것만 같았다.